월간참여사회 2014년 02월 2014-02-07   2627

[참여연대 20년20장면] 주고 받는 마음의 과학 – 참여연대 후원의 밤

참여연대 20년 20장면 Scene #18

 

주고 받는 마음의 과학

참여연대 후원의 밤

 

차병직 변호사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 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참여연대의 독립성과 지속가능성 모두를 위해 재정 원칙을 수립하고 지켜온 역사를 짚어봅니다. 

 

참여사회 2014-02월호
1994년 10월 29일, 용산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열린 안경환 당시 집행위원장의 출판기념회 기획안. 『이야기 한마당』과 『뮤즈가 디케에게』 출판기념회는 참여연대가 창립대회를 연 지 한 달 뒤로, 참여연대 최초의 후원 행사였다. 

이후 참여연대는 재정 확보를 위해 다양한 후원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였다. 큰 성과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있었고, 때로는 거액의 후원금을 기부자에게 돌려주는 일도 있었다. 크고 작은 모금 사이의 희비의 사연들은 참여연대가 흔들림 속에서 부단히 자기의 진정성을 찾아가려는 시민단체의 최소한의 절제와 용기를 드러냈다.  

 

 

“세 배로 올린다고 후원금이 그만큼 늘어날 것도 아닌데,
아직은 처음에 정한 100만 원 원칙을 그대로 지킵시다.”

“300만 원은 무리한 금액도 아니고 우리 이미지를 훼손하지도 않습니다.
안팎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불분명한 순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2004년 창립 10주년 후원의 밤 행사를 앞두고 참여연대 내부에서는 이색 논쟁이 벌어졌다. 100만 원으로 유지해 오고 있던 후원금의 한 구좌 상한선을 300만 원으로 올릴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몇 날 며칠을 싸웠다. 그것이 왜 문제인가? 후원금에 상한이 왜 필요한가? 상한을 인상하는 데 왜 주저해야 할까?

선량한 보통 사람들의 의문에 직접 단답형으로 대답한다면, ‘소액다수의 원칙’ 때문이다. 한마디 덧붙인다면, 참여연대는 모금에서 그 원칙을 가능한 고수하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간략한 설명을 곁들이면 이렇다. 특정인이나 단체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게 될 경우 그 기부자의 영향력에서 자유롭기 힘들다는 경고가 모금의 논리에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은 액수라도 많은 사람으로부터 기부를 받을 때 그 단체의 시민적 정당성은 그만큼 더 커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초판 클럽’ 저자들의 도서 영업

 

투쟁적 민주주의가 아닌 이상적 민주주의는 경제력을 기초로 한 생활의 안정성을 전제로 발전이 가능하듯, 아무리 고상한 가치를 지향하는 NGO라도 물리적으로 존속하려면 최소한의 재정적 바탕이 있어야 한다. 창설 당시의 참여연대도 가장 어려운 점이 재원 확보였다. 지금은 한 해 수입 20억 원에 순수 회비만 15억 가까이 되지만, 첫 회계연도 5개월 남짓 동안 총수입은 빌린 돈을 제외하고 1억 1600여만 원에 불과했다. 그 다음해 총수입도 2억 2700여만 원으로, 매월 2000만 원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십수 명의 상근자들 활동을 뒷받침하여야 했다. 그러면 언제부터 어떻게 재정적 안정을 찾을 수 있었는가. 일반의 활동 못지 않게 참여연대의 재원 확보를 위한 노력도 우리 시민운동사에서는 특기할 만한 자취를 남겼다. 

 

맨 처음 시작한 것은 출판기념회였다. 참여연대에 결합한 교수들이 책을 낼 때마다 행사를 열어 모금의 기회로 삼았다. 창립대회를 연 지 한 달 뒤인 1994년 10월 29일 토요일 오후, 지금의 대형 역사와 쇼핑몰이 들어서기 전의 낡고 작은 용산역 광장 맞은 편에 자리 잡은 더 초라한 2층 사무실에서 첫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내건 상품은 당시 집행위원장 안경환의 『이야기 한마당』과 『뮤즈가 디케에게』였다. 대표 홍성우 변호사의 인사말로 시작한 그 행사에는 이회창·이수성 등 유명인사가 참석하였는데, 그 덕분인지 비용 300여만 원을 공제하고 900만 원 정도를 남겼다. 

 

참여사회 2014-02월호
1994년 10월 29일, 용산 참여연대 사무실에서 열린 안경환 당시 집행위원장의 <이야기 한마당>과 <뮤즈가 디케에게> 출판기념회 행사는 홍성우 공동대표의 인사말로 시작했고, 이회창 이수성 등 유명인사가 참석했다. 그 덕분인지 비용 300여만 원을 공제하고 900만 원 정도를 남겼다. 서 있는 사람은 김중배 당시 공동대표.

 

많지는 않았지만 적은 돈도 아니었기에, 1996년 1월 세종홀에서 한 차례 더 시도했다. 이번에는 안경환, 박원순의 저서 각 두 권씩에 사법감시센터의 『사법개혁』까지 모두 다섯 권을 내 놓았다. 한승헌과 이효재가 축사를 하고 송창식과 양희은이 연설용 마이크에 대고 열창을 하였건만, 책값은 권수에 비례하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고 2월 초까지 열흘 가까이 연장하여 모금했지만 전체 수입은 1000만 원이 조금 넘었다. 

 

1000만 원도 두 번이면 2000만 원이 된다는 셈법에 홀려 그 해 7월에 정종섭의 헌법이론서를 가지고 또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서초동 변호사회관에서 송창식·권진원이 모금을 호소하듯 축가로 흥을 돋우었지만, 총수입은 300만 원에 못 미쳤다. 1997년의 『부정부패의 사회학』은 겨우 14만 원을 남겨 주었고, 1998년 장명봉의 『분단국가의 통일헌법연구』는 50만 원을 보탰다. 정기적인 출판기념회는 준비하는 간사들의 노고에 비하면 그 대가가 턱없이 형편 없었다. 마이클 샌델이나 신경숙이면 모를까, ‘초판 클럽’ 저자들의 저서로 더 이상 돈을 모을 수는 없었다. 도서 영업은 출판사나 서점, 아니면 정치인에게 맡기는 것이 옳았다. 

 

새로운 시도

 

책을 쓰는 대신 박원순은 다른 아이디어를 내고, 문화사업국장 김용숙과 이태호가 밤잠을 설치며 준비한 행사는 <명사들의 애장품전>이었다. 1997년 9월 27일부터 일주일 동안 백상기념관에서 연 애장품전에는 전략 품목으로 기획한 명사들의 휘호가 들어간 도자기를 비롯해 백낙청, 조정래, 김민기의 육필 원고까지 다양한 물건이 전시되었다. 김종찬이 진행한 자체 경매에선 변호사 조영래가 생전에 펜으로 쓴 시국 성명서 초고가 500만 원, 김덕수의 장구·이광수의 꽹과리·송창식의 <우리는> 악보가 각 120만 원, 박은정이 프라이부르크 유학 시절에 사용했던 붉은색 가죽가방이 30만 원에 낙찰됐다. 밀라노 컬렉션에 출품됐다는 영화배우 장미희의 바지 정장을 비롯해 전시장에서 임자를 만나지 못한 애장품들은 계약에 따라 삼구홈쇼핑텔레비젼으로 넘겼다. 거기서 이가범의 문인화 <묵죽>은 600만 원에 팔렸다. 

참여사회 2014-02월호
1997년 명사들의 애장품전에 출품된 김민기의 아침이슬 육필 악보.
100만원에 팔린 이 악보는 현재 구매자의 집 서재에 걸려 있다.

 

1998년 7월 4일자 소년동아일보 1면 톱기사 제목은 <김대중 대통령-이창명-심형래-이봉주-최진실, “이런 모습 어때요?”>였다. 만화가 58명이 그린 각계각층 인사들의 캐리커처 전시회를 열어 일반인이 살 수 있도록 했다. 팔리지 않는 초상화는 본인이 직접 돈을 내고 가져 가게 했다. 참여연대 임원들은 30만 원씩 내고 싫어하는 부위가 과장된 자기 얼굴을 가져갔다. 어느 전직 장관은 자신의 초상을 우스꽝스럽게 그렸다며 작품 인수를 거부하기도 했다. 박재동, 허영만, 이두호, 김수정, 이현세, 이희재 등의 만화가들은 판매 대금의 80%를 참여연대에 기부하였다. 

 

참여사회 2014-02월호
1999년 9월 10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맑은사회만들기 기금 마련 콘서트 ‘휘나리’. 이 공연에는 중앙국악관현악단, 김덕수패 사물놀이 한울림 예술단, 한영애, 정태춘, 김영임이 출연하였다.

 

바자회 형식의 일회성 행사 수익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끝에 대규모 본격 공연을 제작한 적도 있었다. 문화사업국을 맡은 박영선은 명광복, 최현주와 함께 국악인 김덕수 사물놀이패·박범훈의 중앙국악관현악단·김영임, 가수 정태춘·한영애를 섭외하고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빌렸다. 전문 기획사나 할 수 있는 복잡한 일을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구걸하듯 도움을 받고 배워 가며 가까스로 1999년 9월 10일 하루 2회 공연으로 무대를 열었다. R석은 5만 원, S석은 2만 원, 가장 싼 B석은 1만 원이었다. 티켓 관리는 이지은과 한재연이 하였는데, 일반 판매는 교보문고·종로서적·세종문고에 의뢰했다. 오후 3시 공연에는 1329명, 저녁 7시 30분 공연에는 2217명의 관객이 들었다. 매회 500명이 넘는 초대 손님을 제외한 입장료 총수입은 3900만 원이었고, 대관료 574만 원을 비롯한 총경비는 4474만 원이었다. 그런데 정산한 뒤 남은 돈이 1억 1746만 원이었다. 협찬금이 1억 2000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인력과 전문성이 소요되고, 기업의 후원에 기대지 않을 수 없는 모금 공연은 그것으로 끝내기로 하였다. 

 

희비의 사연들 

 

참여연대가 행사에만 의존하여 모금한 것은 아니다. 어떤 NGO도 마찬가지이지만, 비영리단체의 근간이 되는 재원은 회원의 회비다. 회비가 부족할 때에는 후원금이나 수익 사업의 이익금으로 충당한다. 참여연대가 초창기에 행사에 급급하였던 것은 워낙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1994년에는 회원이 245명이었고, 회비 수입보다 부채가 훨씬 많았다. 그 다음해 회비는 모두 5000만 원 정도였는데, 자료에 보면 회원이 1500명으로 표기돼 있다. 하지만 다른 문서에는 349명이라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것은 회비를 낸 회원 수일 가능성이 있다. 1996년에는 회원이 500명 늘어 2000명으로 집계돼 있으나, 실제 회비를 납부한 회원은 800명 남짓으로 회비 총수입은 2958만 원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매번 특별 후원금을 거둘 궁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그런 상태로 운영해 나갈 수는 없다고 판단한 사무처장은 회원의 확충과 관리를 통한 재정 구조 안정화 프로젝트에 돌입하였다. 해외 단체들의 모금 사례와 기술을 수집하고 분석한 뒤, 일부의 반대와 인력 부족난에도 불구하고 서너 명의 간사로 하여금 회원 관리를 전담하게 했다. 1998년 3000명이던 회원이 총선연대 운동으로 성가를 높이던 2000년에 1만 명을 돌파했다. 다시 목표를 2만 명으로 수정하였으나 그 다음해의 1만 4479명이 공식 기록으로는 최고치였다. 2004년에 9000명 대로 잠시 하락하였다가 현재는 1만 37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회원 관리는 성공적이었다. 2006년에 연간 회비 수입이 처음으로 10억 원을 넘어섰으며, 2012년에는 14억 2700만 원으로 매월 1억 원 이상의 회비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매년 창립기념일을 기념한 후원의 밤 행사 모금으로 해결한다. 2000년 창립 6주년 행사 때부터 후원의 밤 행사를 정례화하면서부터 다른 수익 사업 행사는 일절 하지 않는다. 

 

참여사회 2014-02월호
<만화가로 만나는 우리 시대 사람들> 전시에 출품된 김대중 대통령의 캐리커처(허남길 작). 1998년 7월 3일부터 7월 9일까지 백상기념관에서 열린 이 전시회에는 만화가 58명이 그린 각계각층 인사의 캐리커처가 출품되었다.

 

단체의 전체 예산에서 회원의 회비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을 좁은 의미의 재정자립률, 후원금까지 포함한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을 넓은 의미의 재정자립률이라 한다. 참여연대는 2002년에 협의의 재정자립률 80%를 기록한 뒤 줄곧 75% 전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광의의 재정자립률은 당연히 100%이며, 따라서 정부의 후원금은 한푼도 받지 않는다고 어디에서든 자랑할 수 있다. 사심 없이 뛰어든 상근활동가들이 흘린 땀의 성과였지만, 그 마음을 알아채고 적극 호응한 시민들의 힘이 일군 기적이나 다름없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희비의 사연이 얽혀 있다. 초기에 4억 원 가까운 거금을 희사한 Y씨는 한동안 참여연대의 귀빈이었다. 그러던 그가 10여 년이 지난 뒤 그 돈은 빌려준 것이라며 난데없이 반환을 요구했다. 그러다가 참여연대 몰래 공시송달로 소송을 끝낸 뒤 이자까지 포함하여 강제집행으로 돈을 빼앗아 갔다. 기부금품모집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행태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러한 폭력적 시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회원의 식지 않는 열정으로 참여연대의 바퀴는 멈추지 않는다. 현재까지 가장 큰 금액을 기부한 사람은 어쩌면 익명의 후원자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슬쩍 남겨두고 싶다. 

 

마음의 과학

 

논란 끝에 2004년 후원의 밤부터 한 구좌의 상한을 300만 원으로 올렸다. 9월 8일 저녁 6시 30분부터 세종홀에서 열린 행사장에 큰 봉투가 하나 접수됐다. 그 안에는 작은 봉투 17개가 담겨 있었고, 각 봉투마다 300만 원씩 들어 있었다. 어느 대기업에서 계열사별로 따로 봉투를 만들어 5100만 원을 후원한 것이다. 다음날부터 이틀에 걸쳐 다시 토론이 벌어졌다. 너무 과하므로 전부 돌려주어야 한다는 이상적 과격론과 어차피 우리가 정한 새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니 받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온건론이 팽팽하게 맞붙었다. 인간이 머리로 만든 규칙과 감각으로 움직이는 행위 사이에는 어떤 형태로든 괴리가 있게 마련이고, 그 우연의 틈을 메우는 시급한 묘안은 단순한 절충이다. 시간을 끌면 전부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므로, 고심 끝에 절반만 들고 가서 돌려주었다. 성의는 받겠지만 영향은 거부하겠다는 의미의 상징적 태도로 이해해 주길 바라면서. 

 

2006년부터 상한선은 다시 500만 원으로 올렸고, 한두 차례 그런 소동이 더 있었다. 1998년 5월 경인미술관에서도 유사한 사태가 벌어졌다. 후원 행사로 연 ‘참여연대 사랑 중견화가 초대전’에서 어느 기업이 조각 한 점을 2000만 원에 사겠다고 하였다. 500만 원 정도로 매긴 것이었는데 후원하려는 호의가 대단하구나 생각하며 팔았다. 하지만 그날 저녁 경제민주화를 외치며 기업 감시의 눈을 부라리고 있던 장하성이 강력히 반대하였고, 다음날 봉투를 들고 달려가 물건을 되찾아왔다. 

 

제3자들이 보기에 확고하지 못한 원칙의 좌충우돌식 행동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참여연대의 고뇌와 양심이 뒤섞인 현실에 대한 대응 양식의 하나다. 조금씩 흔들리는 듯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참여연대 특유의 치열한 실천 체계이며 모금의 과학이다. 자연의 진리가 어떻게 뒤바뀌어 왔는지 과학사가 잘 보여주듯이, 참여연대 모금의 과정은 흔들림 속에서 부단히 자기의 진정성을 찾아가려는 시민단체의 최소한의 절제와 용기를 드러낸다. 그에 부응하는 시민의 기부 행위는 단순한 감정의 작용으로 보일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크고 작은 감동이 교차한다. 마음의 과학이다. 

 

 

참여연대 20년 20장면 연재 순서

  • #01 봄은 주총의 계절이었던 시절 – 1997 소액주주운동
  • #02 법원 하나를 날려버린 고발장 – 1998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 #03 거리의 신화, 시민불복종 – 2000 낙천낙선운동
  • #04 호루라기를 나눠 드립니다 – 1994~공익제보자 지원 운동
  • #05 “비가 싫어질 수도 있겠구나” – 2004, 2010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UP 캠페인
  • #06 어느 문패에 대한 20년의 명상 – 1994 참여연대 창립선언문
  • #07 ‘올리브’가 서쪽으로 가서는 안 되는 까닭 – 2003~2008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 #08 깃발의 상상력 – 1인시위
  • #09 작은 것도 치열하다 – 1997~ 작은권리찾기운동
  • #10 만리장성으로도 광장을 막지는 못한다 – 2009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
  • #11 종이에 새긴 희망, 열정 그리고 고뇌 – 참여사회
  • #12 햇빛은 어디에 필요한가 – 1998년~ 선샤인 프로젝트
  • #13 은유의 전사들 지리산 방황기 ? 2000년 여름 고난의 행군
  • #14 천안함은 가라앉고 의혹은 뜨고 – 2010 천안함 침몰 사건 대응
  • #15 옥은 보이지 않고 티만 보이는구나 – 1994~ 인사청문회
  • #16 압구정 아줌마의 방향 전환 – 1996~ 참여연대 아카데미
  • #17 기우뚱한 균형을 찾아서 – 2000 ~ 정치적 중립성 논쟁
  • #18 주고 받는 마음의 과학 – 참여연대 후원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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