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7월 2009-07-01   957

젊은 기자에게 언론의 길을 묻다_다시, 언론의 죽음을 생각하다




다시, 언론의 죽음을 생각하다



일마레 기자



세상의 인기 직업 중 하나는 ‘기자’다. 많은 사람들이 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는 기자라는 직업이 가진 매력 외 사회 변화의 중추가 되는 역할을 언론이 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막중한 책임론과 보도 행태에 대한 몰매질을 맞은 것이 언론이다. 좬참여사회좭에서는 신문사의 2~3년차 기자들이 한국 언론의 구조적 현실의 벽과 부딪쳐 느끼는 기자로서의 고충과 갈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노무현의 죽음  2009년 5월 23일 오전. 여느 토요일 아침과 마찬가지로 전날 마신 술 때문에 잠을 깨지 못하고 있었다. 난 일주일간의 피로를 금요일 밤 먹은 술로 해소해야만 다음 일주일을 버티는 ‘직장인’에 불과했다.

“당분간 바빠지겠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접한 뒤 내린 ‘직장인’ 수준의 예측이었다. 그의 죽음을 직접 취재해야 할 입장은 아니었지만(난 증권부에 소속돼 있다) 큰 사건일수록 과민 반응을 보이는 직업을 택한 나로선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난 이 사건이 내게 준 개인적 수준의 충격도, 공적 수준의 논란도 아랑곳하지 않는, 하루 먹고 하루 사는 데 충실한 직장인에 불과했다.

언론의 죽음  언론이 죽었다고 말한다. 권력에 대한 비판자, 약자에 대한 보호자 노릇을 자처하는 언론은 이제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진보든 보수든, 자신의 이해에 충실할 뿐 ‘공적 진실’을 밝히려 애쓰는 언론은 사라졌다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비판을 ‘맞다’라고 인정할 수 없어 불편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잣대 내지 가치관은 다양하다. 언론사는 공적 진실로 여겨지는 많은 사실(진실은 하나이지만 진실을 좇는 사실은 여러 가지다) 중 하나를 택해 그것을 자신의 잣대에 기반, 이해관계로 삼을 수 있다. 그래서 언론이 ‘공적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에 난 ‘대체로’ 수긍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현재의 언론에 대한 비판은 모두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더욱 불편하다. 직업으로서 기자를 선택하고 3년째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난 언론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먼저 세워두고 현상을 바라본 뒤 그 현상이 자신의 잣대에 맞지 않으면 이를 왜곡하는 경우를 종종 봐 왔다. 작금의 언론의 문제는 자신의 이해관계만이 진실이라고 여기고 이에 맞지 않는 현상은 호도해 버리는 언론의 보도 방식에 있다.
 
이념의 죽음  사람들은 언론이 이해관계를 먼저 내세우는 이유로 이념을 꼽는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지는 이념의 차이가 이해관계의 차이를 낳는다고 여긴다. 그러나 언론에서 이념은 이제 수단에 불과할 뿐 더 이상 목적이 되지 않은 지 오래다. 이념을 위해 기사를 쓰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이념은 죽었다.

이념을 대체한 건 자본이다. 언론사 살림에 보탬이 되는 내용일수록 그 기사는 부각될 확률이 높다. (이 같은 자본의 논리에 저항하는 언론사가 있다. 정의와 도덕, 윤리 등이 언론 본연의 임무라고 말한다. 이들의 뜻은 숭고하기도 하나,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는 점에서 자본의 또 다른 논리에 포섭돼 있다고 본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수많은 실책 속에서도 언론의 비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이유는 그가 친자본적이라는 것, 단 하나다. 이념은 언론의 친자본적 성정을 숨기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일 뿐이다.

 다시 생각해보는 언론의 죽음  언론의 이 같은 성정을 간파한 이들은 이를 친자본적 천박성이라고 비판한다. 쉽게 얘기하면 ‘돈만 밝힌다’는 얘기다. 단 두 개의 어절로 이뤄진 이 문장은 그들의 말처럼 천박하다. 그러나 이 천박함에서 자유로워지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수년째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흑자 경영을 하고 있는 언론사 이윤의 대부분도 언론 외적인 부분에서 나오고 있다. 그래서 이 같은 항변에 돌멩이를 던지며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라’고 요구하고자 한다면, 자본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언론에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정의와 도덕, 윤리 등으로 이를 이겨내라고 채근한다면, 그 전에 기자 역시 하루 먹고 하루 사는 데 충실한 직장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핑계로 삼고 싶다.

언론에게 자본의 논리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었으면 한다. 보다 정직하게 세상을 서술해 나가고자 하는 언론사에 좀 더 많은 애정을 쏟아주길 바란다. 그 애정의 방식은 신문 구독이나 방송 시청이며, 그 애정이 깊을수록 자본의 논리에서 언론은 점점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게다.

희망인 점은 정의와 도덕, 윤리 등을 소중히 여기는 기자들이 내가 경험한 바로는 여전히 많다는 사실이다. 이들 모두는 자본에서 자유로워지길 원하며 나 또한 그러하다.


탁알의 ‘뭐라고?


정작 하는 일은 없으면서 구시렁거리기 좋아하는 참여사회 신참 자원활동가. 늘 소지하는 명함을 기반으로 소개하자면 모출판사 홍보팀 3년차 직원. 일마레 기자의 원고를 읽으며 연신 구시렁대더니 결국 궁금증을 해결해야만 한다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도 일 생각이 먼저였다니, 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온전히 슬퍼할 수 없어 자괴감이 드시겠어요.


기자라서 온전히 슬퍼할 수 없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개인적, 사회적, 직업적 감정이 다 조금씩 다를 수는 있지만 한 기반에서 나오죠. 저도 슬펐고, 슬픔을 느낄 수 없는 환경도 아닙니다. 단지 일이 많아지는 게 힘들 뿐이죠. 즉 스스로가 직장인임을 인정하게 되는 거죠.



자본 논리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독자들에게 있나요? 신문 구독료보다는 광고가 많은 비중을 차지할 텐데요.


구독료와 광고는 분리되어 있지 않아요. 구독자 수가 늘면 광고도 늘 수밖에 없죠. 그러니 독자의 힘으로 언론을 이끌어 나가야죠. 광고주의 힘이 아니라 독자의 힘이 주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미국은 신문 구독료가 비싸요. 우리는 이에 비해 신문 단가가 지나치게 싸서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인터넷에서도 마찬가지로 클릭 수가 높은 기사의 광고 단가가 높죠. 그러니 진보 성향 매체들도 연예 이슈를 메인에 띄우죠. 독자들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큽니다.



본인 성향에 맞는데 연봉이 천만 원 적은 언론사와, 성향이 다르지만 연봉은 천만 원 많은 언론사 중 선택한다면?


아무 데로도 안 옮길래요. 전자는 제 입장에선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생기고, 신념을 포기하면서까지 더 벌어야 할 정도도 아니기에 후자도 별롭니다. 물론 성향이 더 맞는 곳에서 일하고 싶죠. 솔직히 진보 언론사 기자들 존경합니다. 제 성향과도 맞고 구독자이기도 하고요. 기자들끼리 ‘배우자가 돈이 많아야 한다’는 농담을 하곤 해요. 경제적으로 어렵단 거죠. ‘돈을 못 버는 대신 윤리 의식이나 정의를 지킬 수 있다. 더 가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은 허술합니다. 배를 곯으면서도 ‘노동은 자체만으로 위대하고 가치 있다’는 주장과 다를 바가 없잖아요.



늘 자신의 목소리를 감추고 기사를 작성하셨을 텐데 이런 글을 쓰니 어떠셨나요?


기사에 기자의 개인적인 목소리가 들어 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겠네요.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어떤 기자든 기사를 통해 자기주장을 하죠. 원점으로 돌아가 답하자면, 기사가 아닌 글을 쓰니 굉장히 힘들었어요. 글쓰기 방식이 달라가지고요. 이렇게 인터뷰를 당하는 기분도 색다르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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