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7월 2009-07-01   1128

최성각의 독서잡설_뜻 없는 고난이 없을진대 희망을 잃지 말자




뜻 없는 고난이 없을진대 희망을 잃지 말자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1983년


내게는 비록 고서는 아니지만, 비교적 오래된 책이 한 권 있다. 함석헌이 지은 좬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좭가 그것이다. 단기 4283년(1950년) 성광사(星光社))판, 정가 750‘圓원’짜리 책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판권의 왼쪽 끝자락에 ‘발행소 성광문화사’라는 큰 글자 옆 괄호 속에 ‘비매품’이라 적혀 있다. 정가와 비매품 표시가 판권에 같이 명기되어 있는 이 이상한 현상에 얼킨 사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 책이 4월 1일에 발행되고 두 달쯤 지나 6·25가 터졌으니 그런 사실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귀한 책은 김하수 교수가 2002년 연세대중앙도서관에 ‘교수기증도서’로서 기증한 것을 좬함석헌 평전좭(2005년에 ‘시대의창’을 통해 발행되었으나 지은이와의 판권계약 해지로 현재 개정판 준비 중)을 쓴 이치석 선생이 복사해 지니고 있다가 내게 선물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받고 그에게 어떻게 답례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 내가 지녔던 한길사판이 아닌 같은 제목의 책을 건넸을 것이다.

이번 달 잡설에서 다룰 책으로서 70여 년 내내 읽히고 있는 이 유명한 책으로 작정한 뒤,  한길사에서 펴낸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책장에서 찾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내가 처음 본 책이 한길사 판이 아니었기 때문에 따로 한 권 구해놓았던 터였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한길사 판은 큰애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보라고 건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딸아이는 아빠가 건넨 책은 스스로 되찾아가기 전에는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작심한 것 같다. 자식을 키워놓으면 보라고 준 책마저 제깍제깍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세상에, 함옹이 나를 지목하다

내가 딸애에게 이 책을 권했던 시기도 그 애의 고등 시절이었듯이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했던 때도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몇 학년 때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책을 다 읽은 뒤, 책상 위에 머리를 파묻고 큭큭, 흐느꼈다. 우리나라 역사가 너무 슬퍼서였던 것 같다. 가슴 속에서는 불덩이 같은 것이 활활 타올랐던 기억도 희미하게 나는 것을 보면, 단지 슬퍼서였다기보다 소년다운 비분강개의 감정도 독후讀後의 감정 속에 뒤엉켜 있었던 것만 같다. 내가 국적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왜 하필이면 여기 이 나라에서 태어났을까? 내 나라는 왜 이토록 파란만장하고, 슬프고, 비통하고, 서글픈 일 투성이었단 말인가. 아아, 나는 앞으로도 필경 이 나라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텐데, 그렇다면 장차 어이해야 옳단 말인가? 다 읽은 ‘함석헌’ 위에 머리통을 박고 흐느끼던 소년은 아마 그런 비장함과 처연함이 뒤섞인 감정에서 몸을 떨었던 것만 같다.

그것을 함 옹은 ‘고난의 역사’라 했다. 고난이 거듭된다면 반드시 거기에는 뜻(의미)이 있을 것이라는 게 함 옹의 생각이었다. 소년은 이 책을 읽고 왜 그토록 비분강개에 사로잡혔을까. 1934년 2월 김교신이 펴내던 성서조선聖書朝鮮지에 이 글이 처음 연재되면서 겨우 2~3백 명밖에 안 되긴 했지만, 일제 치하 독자들이 이 글에 표했던 비분강개와 민족적 저항의식과 70년대 초 해방된 나라에서 자란 시골 소년의 비분강개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 후 소년은 대학생이 되었다. 유신시대였다. 그렇지만 함 옹이 살아계시던 때였다. 친구로부터 함 옹이 명동 YWCA에서 ‘노자강독’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와 함께 명동으로 가서 함옹을 기다렸다. 아마도 70년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명동 위장결혼식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함 옹은 후일, 그 결혼식이 반박정희 운동인 줄 모르고, 단지 주례로서 참석했을 뿐이라고 밝히셨다. 그러나 경찰은 흰 옷에 흰 수염을 바람에 나부끼는 함옹을 경찰차에 실었다. 평생 거듭되었지만, 그것이 어른의 마지막 구치소행, 혹은 옥고였다.

함 옹이 나타나시기 전 건물 한 귀퉁이 마룻바닥에는 먼저 와 기다리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앞줄에는 주로 나이 든 분들이 앉아 계셨다. 라면상자만한 녹음기가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더 얇아지고 작아지는 것이 기술발전의 역사라면 70년대 중반의 녹음기는 아직 상당히 큰 덩치를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앞자리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들’ 중에는 후일 ‘함석헌학(學)’이라 할 만한 일에 종사한 학자로서 그와 관련된 책들을 수없이 쏟아내고, 그의 이름으로 지금도 갖가지 행사와 제각각 다른 단체를 맹렬하게, 배타적으로, 혹은 입신양명의 방책으로서 꾸려가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장발의 청년은 미리부터 왠지 엄숙한 분위기에 주눅이 들어 숨을 죽이고 함 옹을 기다렸다. 노자라면 “그저 애써 뭔가를 이루려 하지 말고 물 흐르듯이 잘 놀아라, 그러면 꺾이지도 않고, 깨어지지도 않고, 부러지지도 않고, 종당에는 만사형통할지니”라는 말을 남긴 할아버지 정도쯤으로밖에 모르던 청년이었다. 친구와 그곳에 참석하기로 작정하고 내가 준비한 좬노자좭는 삼성출판사 사상전집 보급판(1976년) 23번이었다. 지금도 내가 사랑하는 그 사상전집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할부로 산 책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함 옹이 나타나셨다. 당시 원효로에 살고 계셨던 함 옹은 버스나 택시를 타지 않고 흰 고무신에 하얀 한복을 입고, 걸어다니셨다. 어른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한 희디흰 수염을 미염美髥이라 해야 옳을지 그런 말조차도 불경스러운 표현일지는 모르겠다. 가슴이 쾅쾅, 뛰었다. 함석헌 선생을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뵙다니. 이래봬도 나는 좬뜻으로 본 한국역사좭를 읽고 울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를 실물로 만나다니, 어찌 가슴 설레고, 피가 뜨거워지지 않을쏜가. 그 순간도 내 삶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들 중의 하나라고 감히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쿵쾅쿵쾅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선생의 노자강독을 들었다.

“도나 하나님은 근본이 되는 것이고, 증명될 수는 없지만 우리와 멀리 떨어져 초월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이나 세상에 시작이 있다天下有始는 것도 화폭에 점 하나 찍듯이 없는 것이지만 시작은 있다 라고 풀 수 있다”고 하셨을 것이다. 노자의 저 유명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씀도 그때 들었던 것만 같다. 앞자리의 아저씨들은 열심히 말씀을 받아 적기도 했지만, 녹음기에 녹음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자주 확인하곤 했다. 가끔씩 여기저기에서 테이프를 교환하는 소리가 찰칵찰칵 들리기도 했다. 그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런데 마침내 사건이 터졌다.

“저기 앉아 있는 학생!”, 함 옹께서 나를 손으로 가리키셨다. 세상에, 함 옹이 나를 지적하다니. “예, 저요?”, 엉겁결에 오그라드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네는 왜 그렇게 허리가 굽은가? …저 학생처럼 허리가 굽으면 마음도 굽고, 마음이 굽으면 정신도 굽지, 그러면 바른 생각, 바른 삶을 살 수 없지. 학생은 자세를 고쳐야 해.”

세상에, 천하의 함 옹께서 첫 만남에서 하필이면 나를 지목해 하시는 말씀이 나의 굽은 자세를 교정해야 한다는 충고였던 것이다. 나는 거의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함 옹을 만나러 가자고 한 친구가 원망스러웠다. 실로 얼굴 빨개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등이 좀 굽은 편이지만, 20대 때에는 많이 굽은 편이었다. 독재자가 나를 땅바닥만 보고 걸으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고치지 못한, 표 나도록 나쁜 자세. 함 옹에게 치명적인 충고를 듣고 창피해서 얼굴 빨개졌다고는 하지만, 강독이 끝나고 나올 때에는 그래도 기분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저 유명한 광야의 외치는 자가 나를 지목해 나의 자세를 고쳐야 한다는 사소한 부탁을 하셨기 때문이다.



후퇴하는 민주주의, 역사가 가르쳐준 확신

1950년 3월 28일에 쓴 단행본 서문에서 함석헌은 “본래 이것은 자신 홀로의 탄식이며, 반성이요, 친구에게 하는 위로며 권면이다. 우리의 기도요, 신앙이지, 역사연구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첫 단행본으로 펴내면서 30년대 연재 당시의 날것 그대로 세상에 내놓는 일에 대해서는 “이 고난의 역사는 이대로 그 포인시대捕囚時代의 일종 예술품이니 그 모양대로 두어서 고난을 말하게 하자는 것이다. 불완전히 표시된 것도 그 시대의 그 공기니 그냥 두자는 것이요, 연구가 치밀하지 못하고 논법이 거친 것도 그 고난곡苦難曲에 뽑힌 깨어진 악기 저 제대로의 면목이니 그냥 두자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책의 발간을 기뻐하기보다는 그는 슬퍼하고 있었다.

일부 학자들 중에는 고난사관에 의거한 이 책의 저자 함석헌을 ‘30년대 최고의 역사가’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당시 학생들에게 우리 역사의 참모습을 가르치기 위한 고뇌의 산물이었으므로 “역사서로보다는 차라리 수필로 읽어야 할 책‘(김현. 좬고난의 시학좭)으로 봐야 할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혹은 처음 발표될 때의 지면과 첫 제목을 생각할 때, 역사를 기독교의 신 중심의 역사서술로 간주하고 있기에 보편성이 없다거나 잃어버린 만주를 한스러워하는 지리적 결정론을 들어 패배주의가 흐른다고 그 평가에 유보적인 태도도 있는 것(좬씨알 함석헌 평전좭 이치석, 시대의 창, 305-306쪽)으로 알고 있다. 1965년 ‘네째판에 부치는 글’(한길사 1983년판에 수록)에서 함옹은 기독교의 신만이 역사를 주관한다는 생각을 철회한다.

이 명저의 평가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든, 내게 이 서늘하고 호탕한 문체에, 비애와 고통에 가득찬 함석헌의 한국사는 우리가 누구이며, 왜 이곳에 태어났고, 지금 할 일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지침서로서, 우리 속에 잠자는 어떤 격정에 불을 붙이는 화약 같은 빼어난 문학작품으로서 자리 잡고 있다.

이명박 정권 2년차, 최후의 자존심마저 야비하게 조롱당한 전직 대통령은 벼랑에서 몸을 던져버렸고, 이후 뚜렷하게 후퇴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각계의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지만, 이 정권은 대통령으로 뽑힌 과정이 합법적이라는 단지 그 이유 하나로 마치 한 나라를 접수한 점령군처럼 오불관언 지금, 국가폭력을 남용하고 있다. 주권자들이 국가에 허락한 합법적 폭력을 바로 그 주인에게 무자비하게 행사했던 정권은 반드시 처참하게 망했다. 역사가 가르쳐준 것 중의 핵심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함 옹의 삶과 앞으로도 오랫동안 읽힐 그의 베스트셀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확신도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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