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8월 2011-08-04   1783

문강의 문화강좌-재미의 희망, 공포의 희망

 

재미의 희망, 공포의 희망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MBC <집드림>이라는 프로그램은 이 시대 한국 대중문화의 어떤 경향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전형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집드림>은 작년 후반기 <슈퍼스타 K2>의 성공 이후 불어 닥친 ‘서바이벌 오디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다. ‘서바이벌 오디션’이라는 대중문화의 형식은 성장과 재생산의 위기를 맞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도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귀결과도 같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유토피아 기획이 실패로 치닫는 가운데 모두가 함께 잘 사는 사회의 꿈도 옛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원부족과 경쟁의 격화,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로 새로운 파국의 기미가 먹구름이 되어 몰려오고 있는 현재, 남은 것은 적자생존의 원칙뿐이다. 경쟁과 경쟁을 거쳐서 최종에 남은 단 한 명이 다른 모든 참가자들 대신 영광을 누리는 것, 곧 적자생존의 원칙이 문화적으로 형식화한 것이  오늘 한국 대중문화에 유행처럼 번지는 ‘서바이벌 오디션’이다.

  지금까지의 오디션이 대개 노래, 연기, 재능 등을 선보인 결과 돈이나 차 같은 ‘동산’을 획득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집드림>은 ‘내 집’이 절박한 가족들을 모아놓고 퀴즈를 풀게 하여 최종으로 살아남은 단 하나의 가족에게 집이라는 ‘부동산’을 선사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한국에서 ‘부동산’이 가지는 경제적, 사회적 의미에 비추어 볼 때, <집드림>에 이르러 오디션의 규모가 얼마나 커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집드림>을 통해 오디션이라는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는, 마치 한국의 압축 성장 역사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그 짧은 시간에 거대한 스케일로 돌변했다.

 

꿈으로서의 집, 집드림 

<집드림>의 최종경품이 ‘집’이라는 사실은 규모의 측면을 제외하고서라도 매우 흥미롭다. ‘집’은 한국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최종 욕망이다.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인 노동 강도를 견디며 노동을 수행하는 것은 언젠가 ‘내 집’을 갖기 위해서이고, 스타가 된 연예인들은 토크쇼에 나와 가난했던 과거를 회상하다 ‘드디어 강남에 집을 한 채 마련했다’고 울먹이며, 대통령은 퇴직이 가까워 올 무렵부터 퇴임 후에 살 새 집 공사를 시작한다.  한국사회에서 내 집을 가졌다는 것은 적어도 인생에서 실패하지는 않았다는 말이고, 이 살벌한 생존경쟁의 세상에서 가족이 맘 놓고 발붙일 최소한의 공간을 획득했다는 의미다. 집은 ‘루저’가 아니라는 생생한 기호이자,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시금석이며, 인생 전체의 목숨을 건 인정투쟁의 전리품이다. 요컨대, ‘집’은 곧 ‘꿈’dream이다. 집드림.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꿈이 될 수 없다. 집이 인생 전체를 걸고 성취해야만 할 ‘드림’이 되었다는 말은 그만큼 집을 얻기가 힘들다는 말이다. 이는 주지하다시피, 주택보급율 100%를 이미 오래 전에 넘긴 한국사회의 주택 정책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집-드림’이라는 표현은 그 어떤 정부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한국사회의 어떤 핵심적 모순을 가리키고 있다.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현실의 실재적 모순을 해결할 수 없는 사회에서 문화는 현실적 모순을 상상적으로 해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말한다. <집드림>이라는 문화텍스트는 바로 집을 둘러싼 이 한국사회의 모순을 퀴즈 토너먼트를 통한 오디션이라는 엔터테인먼트 형식을 빌려 상상적으로 ‘해결’한다. 

 

진정한 희망은 공포를 동반한다 

물론 이 상상적 해결은 실제적 해결이 아니지만, 실제적 해결만큼이나 정치적이다. 어쩌면 문화를 통한 모순의 해소에는 정치보다도 더욱 정치적인 데가 있다. 마치 환자에 대한 무당의 굿이 의학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민중이 겪는 모순을 은폐하면서 동시에 ‘해결’하는 것처럼, 이 시대에 ‘꿈’이라는 무당은 현실의 문제를 상상의 차원으로 뒤바꿈으로써 모순에 대한 대중의 직접적인 정치적 해결을 무마한다. 여기서 ‘꿈’은 ‘희망’으로도 ‘도전’으로도 바꿔 쓸 수 있다. 오늘날 가장 정치화한 미디어가 꿈, 희망, 도전이라는 단어들을 가장 열심히 사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와 가족이 맘 편히 쉴 한 채의 집마저 ‘꿈’으로 호명되는 이 놀라운 사회병리학적 증상은 미디어의 서바이벌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한 편의 감동적 오락으로 소비되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찍는’ 퀴즈가 3층짜리 집으로 ‘교환’되는, 현실에서 그리 지독히 관철되는 자본주의의 교환 원리마저 작동을 멈추어버리는 이 마술적인 과정은 승자가족에게 보내는 착한 박수를 통해 ‘승화’된다. 이 시대의 정치는 이렇게 즐겁고 따뜻하게 스릴 넘치고 드라마틱하게 작동한다.

  미디어의 꿈, 희망, 도전 타령이 가지는 정치성은 극명히 대비되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분명해진다. 부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진중공업 노동자의 파업투쟁 현장에 시민들을 싣고 가는 ‘희망버스’가 그 사건이다. <집드림>이 말하는 ‘희망’이 실재적 모순의 상상적 해결이라면, ‘희망버스’가 말하는 ‘희망’은 실재적 모순을 현장에서 해결하려는 근본주의적 정치성을 가진다. 법과 경찰이 막는 것은 어떤 희망일까? 언제나 그렇듯 <집드림>이 아니라 ‘희망버스’다. 똑같은 ‘희망’이라는 단어도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 왜 사용되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른 대접을 받는다. 당연히, 법과 경찰이 ‘희망버스’의 ‘희망’을 막으려 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 체제에 어떤 ‘위협’을 가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실제로 ‘꿈’꾸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실제로 ‘희망’하고, 법으로 막아놓은 것에 ‘도전’하는 일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에게는 ‘공포’와도 같은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이 ‘공포’를 자아내는 ‘희망’의 발자취로 가득하다. 진정한 희망과 꿈과 도전은 미디어 오락프로그램의 ‘재미’ 속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적 모임에 대응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법의 얼굴에 서린 ‘공포’ 속에 있다. 공포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희망은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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