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10월 2004-10-01   773

[회원사랑방] 철새의 인연, 사람의 인연

8월 25일 밤, 아기 하나가 내 곁에 왔다. 바라던 예쁜 딸. 굉장했던 올여름 더위를 용케도 피해 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일렁일 때 나를 찾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기도 하지만, 나는 아기 낳으러 병원 갈 채비를 하면서 책 한 권을 챙겨 넣었다. 본격적인 진통이 오기 전까지는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보겠노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진통 간격이 너무나 짧고 강해서 이 소박하고 여유로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분만대기실에 가지고 들어갔던 책은 김종철 교수의 에세이집 <간디의 물레>였다. 나는 그때 왜 그 책을 집어들었을까. 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뒤늦게 궁금해졌다.

이 책의 감수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짧은 이야기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이 이야기에는 나의 무모한 ‘분만대기 중 독서 계획’을 조금은 이해시켜줄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감옥에 있을 때 읽은 책 가운데 조류의 이동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북유럽의 철새들은 지중해를 건너 나일강까지 여행을 해야만 하는데, 이것은 짐작할 수 있듯 새들에겐 너무도 멀고 험난한 여정이 아닐 수 없다. 독수리나 매처럼 몸집이 큰 새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며칠간 강변 모래밭에 엎드려서 일어서질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연약한 작은 새들은 어떻게 그 먼 곳까지 갈 수 있을까.

작은 기적 하나가 이 철새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평소에는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던 큰 새와 작은 새들이 평화로운 공존을 약속하는 것이다. 작은 새들은 나일강의 물결이 바라다보일 때까지 큰 새들의 등에 업혀 하늘을 날아간다.

저자는 이야기 곁에다 이런 말을 적어두었다. 자연의 세계는 사람의 인위적인 지식이나 기술로 개입하기에는 어림도 없는 정교하고 신비스러운 상호의존의 인연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모든 것은 하나의 생명으로 통일되어 있음이 분명하다고….

힘없고 작은 것들에게 자신의 넉넉하고 건강한 몸을 빌려주는 존재가, 그런 인연 관계가 우리 사는 세상에는 얼마나 있을 것인가. 나는 자신을 작은 새와 같다고 새삼 생각한다. 누구에겐가 강을 건너도록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돼준 적이 있었던가 말이다.

그러나 이젠 다르다. 등에 업고 길을 함께 걸어갈 아기가 생겼으니. 아기뿐만 아니라, 늘 세상 속에서 내가 의지하고 싶었고, 내가 의지가 되어주고 싶었던 사람들. 저자의 말대로 자연이나 사람이나 서로 의존하는 인연 관계가 정교하다고 보면, 나는 일부러 애쓰지 않고도 저절로 그러한 삶의 법칙을 따라 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런 따뜻한 위안과 희망을 다시 한번 얻고 싶어서, 딸이 태어나려 하는 그 소중한 시간에 이 책 한 권을 지니고 갔던 것이다.

원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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