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10월 2016-09-30   453

[경제] 매뉴얼과 상식

 

매뉴얼과 상식

 

 

글.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서울출생. 서울대와 미국에서 경제학 공부, 텍사스 오스틴대에서 조교수로 근무, 한국개발연구원에서 근무후 홍익대 경제학과에 현재까지 재직중. 화폐금융론이나 거시경제학에 관심이 많음.

 

 

경주 지진은 매뉴얼 부재 탓인가
경주 지방 지진 때문에 난리다.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서울에서야 그저 그런 정도로 넘어갔을 수도 있지만, 정작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무너지는’ 공포를 경험한 경주 주민들의 심리적 트라우마는 쉽게 진정되지 않는 것 같다.
이번 경주 지진 사건은 ‘무능한 정부’의 본모습을 또 한 번 보여주었다. 세월호 참사는 물론이고, 최근 경·제계를 뒤흔들고 있는 한진해운 물류대란 사태나 이번 경주 지진 사태는 무능한 정부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증거들이다. 
이번 지진을 두고 많은 사람들은 “매뉴얼이 없다”거나 또는 “매뉴얼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개탄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무엇보다 “방재 당국의 상식이 실종되었다”는 점을 더 우려한다. 지진에 놀라 대피한 주민들에게 주차료를 징수한 울산의 공영주차장은 단지 매뉴얼이 없어서 주차료를 징수했을까? 정말 이것이 시스템의 부재를 탓해야 할 정도의 문제인가?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재난의 종류를 상세하게 규정한 후, 그런 사유로 주민이 긴급하게 대피한 경우 주차료를 받지 않는다는 매뉴얼을 만들고 집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위기를 매뉴얼로 대처할 수는 없다. 모든 위기에는 일정한 정도의 불가측不可測한 부분이 있고, 재앙이 클수록 그런 불가측한 부분도 증가하기 때문이다. 결국 재앙은 시스템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식과 공감이 극복하는 것이다. 시스템은 그런 극복을 도와주는 평균적인 보조 재료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은 매뉴얼만이 아니다. 더 원초적인 부분인 상식과 공감대가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참여사회 2016년 10월호 (통권 239호)

 

유연하고 합리적인 사고 길러야
필자는 일전에 일본 동경대 경제학과의 유지 겐다 교수와 위기 대응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우리 사회의 재난관리 능력이 부족하고 매뉴얼도 없고, 있는 매뉴얼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개탄했었다. 그런데 겐다 교수의 반응이 의외였다. 당연히 일본의 잘 짜인 시스템과 매뉴얼, 그리고 수십 번의 반복 훈련의 장점을 자랑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정작 그가 내민 것은 한 장의 그림이었다. 사람들이 손을 잡고 산으로 올라가는 그림. 그 그림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촉발한 동일본 대지진 때 있었던 사건과 관련된 것이었다. 주지하듯이 일본에는 지진이 잦다. 그래서 매뉴얼도 많고 대피 훈련도 일상적이다. 동일본 대지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매뉴얼 중 하나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학생들은 지진이 나면 학교 건물 옥상으로 대피하라.” 

아마도 일본은 건물을 튼튼하게 지어서 옥상이 안전한 장소였나 보다. 그래서 대지진이 있던 그날도 학생들은 학교 옥상으로 대피했다. 그리고 집채보다도 큰 파도가 자신들을 집어 삼킬 것처럼 덮쳐 오는 것을 보았다. 그때 학생들은 선택해야 했다. 매뉴얼을 믿을 것인지, 상식을 믿을 것인지. 학생들은 상식에 따라 옥상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모두 손을 잡고. 그리고 다 살았다. 합리적이고 유연한 사고, 즉 상식에 기반한 위기대처 능력이 그들을 살린 것이다.
일본 국민에 대해 잘 훈련된 꿀벌이나 규율에 무조건 복종하는 독일 병정의 이미지를 떠올리던 필자에게 이 에피소드는 충격이었다. 학생들이 매뉴얼을 저버릴 수 있었다는 점도 신기했지만, 이것을 위기 극복의 요체로 설명하는 겐다 교수의 시각도 충격이었다.

그러나 찬찬히 곱씹어 보면 그것이 정답이었다. 위기대처는 단선적인 정책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복합적인 정책이 필요하다. 물론 공통적으로 취해야 할 대응책은 매뉴얼화 할 수도 있다. 그 매뉴얼 중에는 국민이 준수해야 하는 것도 있고, 방재 당국이 준수해야 하는 프로토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 되는 것인가? 아니다. 상식과 공감대가 근저에 있어야 한다. 부족한 매뉴얼이나 상황에 맞지 않는 매뉴얼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유연한 상식.

 

방재 당국의 가장 큰 문제는 상식 결여
경주 대지진이 발생한 지 5시간 지난 13일 새벽, 경북 김천에서 KTX 열차에 치여 선로 작업자 2명이 사망했다. 열차가 들어오는데 선로에 작업하러 나갔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연히 매뉴얼의 부재다. 그러나 참변의 진정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선로에 끼인 손수레를 끝까지 치우려다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2명의 작업자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이들은 빠져 나오라는 ‘매뉴얼’이 없어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인가? 아니다. 달리는 열차와 손수레가 충돌할 경우의 참상을 직감하고, 손수레를 치워야 한다는 상식을 실천하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그 숭고한 희생 덕분에 300명의 소중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매뉴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과 상식이 없는 매뉴얼은 그저 종이조각일 뿐이다. 지금 방재 당국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상식적인 문제해결 능력이다. 쓸만한 매뉴얼은 먼저 상식과 문제의식이 준비되어야 비로소 제대로 만들 수 있고,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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