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01월 2014-01-09   1504

[역사] 정치보다 더 정치적인 종교

참여사회 2014-01월호@atopy

 

정치보다 더
정치적인 종교

 

 

역사학자가 한국사만의 특수성에 골몰하는 건 직업병이다. 역사학자로서 되묻는다. 왜 한국에서는 종교가 근대화의 길을 개척하고 민족 독립을 부르짖고 독재에 항거하는 정치의 최전선에 섰던 걸까. 근대화 과정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그들을 대신해 종교가 정치세력화한 것이라는 계급론적인 해석이 한때 유행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명쾌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분명한 것은 종교가 정치보다 더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근현대사의 격변기마다 주어진 역사적 소임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중세를 전복한 서학과 동학

 

1801년 공노비 해방으로 문을 연 19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내우외환 속에 지키려는 자와 바꾸려는 자가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민중은 농민항쟁을 거듭하며 진보와 혁신을 요구했고, 평등을 갈구했다. 민중의 자각을 촉발하는 데 촉매제 역할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종교였다. 서구로부터 들어온 서학과 최제우가 만든 동학 모두 유교적 위계질서의 타파와 수평적인 평등사회의 실현을 지향했다. 그들 스스로 남녀노소가 함께 살아가는 자치적인 종교공동체를 만들어 지냈다.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될 때 퍼진 전봉준이 작성한 격문.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될 때 퍼진 전봉준이 작성한 격문.

 

이렇게 삶으로서 중세를 전복하고자 하는 서학과 동학의 무리는 조선 정부 입장에서 보면 사문난적, 즉 체제 전복 세력이었다. 탄압은 극심했다. 서학의 경우, 최초의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래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인박해로 많은 신부와 교인들이 살육당했다. 조선 정부는 제사를 우상숭배라며 거부한다는 이유를 들어 죽이기도 했지만, 오랑캐인 서양인과 내통하는 위험 분자, 즉 간첩 혐의를 씌워 죽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학 역시 1대 교주인 최제우와 2대 교주인 최시형이 반역을 도모한 괴수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으며, 동학농민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동학 지도자와 교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종교의 이름으로 새로운 사회를 지향한 대가가 죽음이었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천도교가 몰방한 3·1운동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이라는 외세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또다시 엄혹한 시절이 찾아왔다. 조선총독부는 모든 정치 사회 단체를 해산시켰다. 이 무단통치 시대에는 종교단체만이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숨 쉴 곳을 찾던 민중들이 종교에 몰려들었다. 그 덕에 천도교는 단숨에 100만 교인을 자랑하는 조선 최대 종교로 부상했다.    

 

종로구 보신각앞 만세를 외치고 있는 민중들
종로구 보신각앞 만세를 외치고 있는 민중들

 

1919년 3월 1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동시에 독립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 조직적인 시위를 모의하고 이를 위한 재정을 마련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자임한 것은 종교, 바로 천도교였다. 먼저 천도교는 기독교, 불교를 끌어들여 33인의 민족대표를 구성했다. 33인은 종교연합의 형태인 천도교 15인, 기독교 16인, 불교 2인으로 짜였다. 이어 학생과 연대하고 독립선언서의 작성, 인쇄, 배포를 위한 시설과 자금을 제공했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이 발발하자 손병희를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두었고, 천도교를 와해시키기 위한 공작에 나섰다. 결국 손병희는 감옥살이 중에 병을 얻어 1922년에 숨을 거두었으나, 조선인은 독립을 위해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던진 종교, 천도교를 지켜 주었다. 천도교는 일제 강점기 내내 가장 많은 교인을 가진 ‘민족’ 종교였다. 

 

독재에 대한 저항은 계속된다

 

무단통치를 능가하는 엄혹한 유신독재가 찾아오자, 또다시 종교가 반체제운동의 전면에 섰다. 서슬 퍼런 긴급조치법이 기승을 부리던 1974년에 만든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 기독교와 가톨릭 지도자들이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박정희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종교는 빨갱이라는 모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민주화 단체를 결성하고 정권 퇴진 시위를 벌이고 성직자 구속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도회를 개최하는 일들을 반복했다. 그 한복판에 1974년 원주교구장이던 지학순 주교가 ‘유신헌법 무효’라며 양심선언을 발표한 뒤 체포돼 15년형을 선고받자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원주에서 결성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 대한 종교의 끊임없는 저항은 1987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서울대생 박종철 씨 고문치사 사건 폭로로 이어지면서 6월항쟁의 계기를 마련했다. 20여 년에 걸친 종교의 민주화운동으로 기독교회관은 민주화운동의 공론장,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얻었다.

 

2014년 갑오년이 열렸다. 1894년 갑오년에는 동학이 농민전쟁을 일으켜 부패한 정부와 침략자 일본에 저항했다. 2014년은 지난 한 해를 뜨겁게 달군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의 대통령선거 개입 사건의 진상이 점차 드러나는 가운데 종교인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시작되고 있다. 종교가 반정부·반체제운동의 전면에 설 때마다 적지 않은 파장을 몰고 왔음을 돌아볼 때, 이건 분명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참여연대 창립 멤버, 현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궤적을 좇는 작업과 함께 동아시아사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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