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6월 2009-06-01   1231

이제훈이 만난 사람_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지금은 민주주의 총체적 위기 상황”




“지금은 민주주의 총체적 위기 상황”


이제훈 <한겨레> 통일외교팀장

지금은 굶을 걱정은 하지 않지만 사는 건 더 힘들다고 한다. 불과 한 세대 사이의 일이었는데, 앞으로 한 세대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이 순간의 역사가 중요하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뼈저리게 느낀다. 강좌에서 역사가 진보하냐고 물으면 다들 진보한다고 답한다. 그런데 10년 전에 비해 살기 어떠냐고 물으면, 어렵다고 한다. 그 10년이 민주정권 10년이었다. 그러니 민주정권이 인기가 없는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과거사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오늘이 내일의 역사라는 걸  자각하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역사를 살고 잇다는 자각이 중요하다.


 두 시간 가까운 인터뷰가 끝났다. 늘 그렇듯 마지막은 이랬다. “제가 준비한 질문은 다 했습니다. 혹시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한 마디 해주세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과거사 문제에 오래도록 천착해왔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 이렇게 되니까, 지금이 과거사를 하고 있을 때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운동도 10년 가까이 해왔는데, 노무현 정부 때 하기로 한 대체복무제를 이명박 정부가 뒤집지 않았나. 그런데 지금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가지고 싸워야 할 때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민주주의의 총체적 위기라는 의식이 강하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뭘까,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고민이 많다. 사실 나는 성격이 느긋한 편이고, 별로 극단적이지 않게 살아왔다. 1980년대도 밧줄을 타거나 목숨을 걸던 때였지만, 그때에도 ‘꼭 저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절박한 심정이다. 정말로 엄중한 상황이다. 내가 나이를 더 먹어서 그럴 수도 있다. 1980년대엔 20대였으니 욱하는 기질이 있었지만, 내가 상황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나이 쉰을 넘기고 책을 써 독자도 생기고, 단체도 만들고 하다보니 상황에 대해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손을 대면 끝까지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노무현 정권 때 하고 싶었던 일들은 다 우선순위가 밀리고 있다. 내가 지금 평화박물관에 나와 앉아 있지만, 사실은 좁은 의미의 평화운동에 시간을 쓰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엄중한 상황’, 1980년대보다 더 절박


 한 교수가 ‘1980년대보다 더 절박한 심정’이라며 지금을 ‘엄중한 상황’이라고 한 게, 아직도 귓가를 맴돈다. ‘절박한 심정’은 한 교수만의 것은 아니겠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6월 항쟁’ 22돌이 되는 2009년 6월, 이번엔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서의 역사를 가장 잘 풀어낸다는 소리를 듣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를 모셨다. 인터뷰는 5월 22일 낮 서울 종로구 견지동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사무실’에서 두 시간 남짓 이뤄졌다.    


사법부가 바로 서야 대한민국이 바로 서


– 요즘 자주 거론되는 법 얘기부터 해야겠다. 최근 <한겨레>에 ‘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라는 제목의 연재를 시작하셨는데,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생각은 뭔가?

= 국가정보원 과거사위(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조사한 결과를 대중들께 꼭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과거사가 결국 사법부로 귀결된다. 예전에 중앙정보부가 사람 끌고 가서 고문하고 두들겨 패고 했던 것도 사법부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걸 마지막 관문이어야 할 사법부가 걸러내지 못한 것이다. 가장 가슴 아픈 게 사법부의 잘못으로 국가폭력에 희생된 분들이 다시 사법부에 재심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법부가 바로 서야 대한민국이 바로 서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정원 과거사위 활동을 하며 사법사, 간첩사, 정보기관사를 책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 작업으로 사법사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난해 촛불 탓에 미뤄두고 있다가 최근 신영철 대법관 사태를 보곤 더 미뤄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과거에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일들이 많았다. 보고서에도 상세하게 기록해놨고. 이런 게 미리 알려졌더라면 국민들이 최근 사태를 이해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우린 개다, 물리면 문다’더니 요즘엔 알아서 물어
 
– 신영철 대법관 사태를 보면 판사들은 그래도 문제가 있다 싶으면 목소리를 낸다. 그런데 대한민국 검찰엔 그런 게 없다. 내부에서 아무런 문제제기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 검사들의 문제제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초기 ‘검사와의 대화’가 있지 않았나? 검사들이 자기네 집단 이익과 관련해 움직인 것이긴 하지만. 사실 1차 인민혁명당 사건 때 ‘양심적 기소 거부 사건’ 이후 검찰은 권력에 평정됐다. 검찰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며 전두환 등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가, 나중에 기소를 하고는 한 검사장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나. ‘우린 개다, 물라면 문다’고. 예전엔 물라면 문다였는데, 요즘은 알아서 무는 것 같다.

 역사학자로서 꼭 기록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 (촛불 집회에) 유모차 끌고 나온 엄마들을 아동학대죄로 잡아넣자고 한 놈들, 조중동에 전화 걸었다고 협박죄로 걸자고 한 놈들, 미네르바를 잡아들이는 법리를 만들어낸 놈들, 역사에 그 이름을 길이길이 남겨야 한다. 다시는 권력을 치졸하게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 우리 사회 지식인들이 그런 구실을 해야 한다. 진중권이 황석영을 금붕어라 했지만, 그거 잊어버리면 우리가 금붕어 된다. 역사에 그 이름들을 기록해야 한다. 


– 요즘 ‘법치’가 유행어다. 이명박 정부의 법치를 어떻게 생각하나?

= 일제 강점기 때 만주가 온갖 비적들의 천국이었다. 그 가운데 으뜸가는 비적을 법을 갖고 장난치는 법비(法匪)라고 불렀다. 국가는 강제력, 국가폭력을 갖고 있는데 그 행사가 정당해야 한다. 국가는 보호자의 기능도 있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도 국가가 보호자의 기능을 내던지지는 않았다. 창피해서라도 시늉은 했다. 그런데 용산참사의 본질이 뭐냐? 재개발 사업과 관련해 코너에 몰린 약자가 망루에 올라갔는데, 국가가 나서 중재하기는커녕 바로 강제력을 행사해 진압해버렸다.



가슴속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이 역사 만든다


– 촛불 1년이 지났는데, 평가가 각양각색이다. 어떻게 생각하시나?

= 굉장히 힘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다. 이명박이 참 모진 사람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제국주의자들보다 더하다. 일제는 3?1운동 직후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전환했다. 그런데 이명박은 촛불이후 무단통치로 내달리고 있다. 3ㆍ1운동 당시에 해외로 망명했던 청년들이 1년 쯤 지나 돌아와도 일제가 처벌하지 않았다. 그저 종로서에서 두어 시간 조사받고 끝이었다. 일본 놈들도 3?1운동으로 폭발한 조선 사람들 마음을 달래려면 처벌로만 대응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 거다.

그런데 이 정부는 ‘전문시위꾼’은 끝까지 추적한다고 하고, 미네르바는 잡아들이고 피디수첩은 분질러 놓고…(3?1운동 직후) 일본 놈들이 한 정책과 아주 비교가 된다. 일제는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고 싶어 ‘문화통치’로 전환한 것이고, 이명박은 5년 단임이라 단기 회수를 꾀하는 것이다. 촛불로 1년을 날렸다고 생각할 테니 더 조급한 거지.

사람들이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데, 3?1운동 1년 뒤 성공한 운동이라는 평가가 가능했겠나? 조선이 독립됐나, 민족이 해방됐나? 일본 놈들이 (독립운동하던 분들을 붙잡아) 쓴 조서를 보면, ‘너 왜 이런 생각했나, 왜 이런 짓 했나’라고 물으면, 다 3?1운동의 영향을 이야기했다. 만세만으로는 안 되니까 좀 더 기층민중 속으로, 평화적으로 안 되니까 무장투쟁으로…. 3?1운동의 체험이 실패를 반성하게 하고 오래도록 힘이 됐듯이, 가슴에서 촛불을 끄지 않은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갈 것이다. 역사에 누가 남을 거 같나? 이명박? 촛불?



무고한 시민이 두들겨 맞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하나?


– 5월 광주 29돌이고, 6월 항쟁 22돌이다. 어떤 이는 지나간 역사라 하고, 어떤 이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한다. 한 말씀 부탁한다.

=(1980년) 5월 광주가 있어 (1987년) 6월 항쟁이 있을 수 있었고, 6월 항쟁이 있어 촛불이 가능했던 것이다. 민주주의가 잘 발전했으면 아마 옛날 일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가 거꾸로 가다 보니 오늘의 일이 되는 거 아닌가. 광주도 6월도.

 아직 발표는 못했지만, 최근 광주와 관련해 ‘5?18과 죽음’이라는 논문을 썼다. 광주는 우리한테 무엇인가를 되묻는 글이다. 5월 광주 때 나는 대학 3학년생이었다. 그때 도청에서 죽은 사람들이 우리한테 자꾸 질문을 던진다. ‘그때 내가 거기(광주)에 있었으면 총을 들었을까, 도청에 남았을까?’ 우리는 그 물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그 죽음을 끼고 살았다.

 그때 광주에서 죽은 사람은 200명 정도다. 한국전쟁 때 200명 학살당한 곳이 어디 한 두 군데냐. 그 학살과 광주는 무엇이 다른가. 광주엔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만든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곳은 어쩔 수 없이 죽은 것이다. 그날(1980년 5월27일 새벽) 도청에 있었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계엄군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나? 이유는 간단하다. 앞에 가신 분들이 있는데 텅 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내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생각이 사람들한테 이어진 것이다.

 광주에서 총을 든 사람들은 이른바 민주화운동가가 아니었다. 권력이 보기엔 룸펜이나 뭐 그런 거였다. 그러나 그들은 대한민국을 믿어온 사람들로서 ‘국군이 어떻게 시민한테 총을 쏠 수 있나?’라는 질문을 한 거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점이다. 지금 대한민국 군은 지휘관이 총을 쏘라고 하면 쏠까? 착검해 찌르라고 하면 찌를까? 곤봉으로 때리라면 때릴까? 지금 엄청나게 때리고 있지 않는가?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

내 옆에서 무고한 시민이 두들겨 맞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도망간다. 둘째, 못 본 척 한다. 셋째, 시민을 도와준다. 넷째, 시민을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이 정부는 무고한 시민이 두들겨 맞더라도 모른 척 하라, 나서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광주에서 항쟁에 참여했던 분들 중에 지금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시민사회가 모르는 척 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살아간다는 자각이 중요하다


–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나

=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 하지 않나.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오늘을 만든 뿌리와 궤적을 추적하는 것이다. 요즘 ‘지금 이 순간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다닌다. 주로 저소득층, 자활근로자, 노숙자 등이 대상이다. 그분들한테 조선시대 얘기하는 거 뜬금없다. 인문학이란 자기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서민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90%는 일자리 교육 주거 문제다. 이 셋 때문에 고통받고 아등바등한다. 이 얘기를 역사적으로 풀어주면 강좌에 오신 분들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20년 전에는 비정규직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사교육비가 이 지경으로 서민 등골을 빼먹기 시작한 것도 불과 20~30년 사이의 일이다. 강남 땅 투기도 30~40년 사이의 일이고. 30년 전에는 다 같이 못살던 시대였다. 하지만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지금은 굶을 걱정은 하지 않지만 사는 건 더 힘들다고 한다. 불과 한 세대 사이의 일이었는데, 앞으로 한 세대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지금 이 순간의 역사가 중요하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말 뼈저리게 느낀다. 강좌에서 역사가 진보하냐고 물으면 다들 진보한다고 답한다. 그런데 10년 전에 비해 살기 어떠냐고 물으면, 어렵다고 한다. 그 10년이 민주정권 10년이었다. 그러니 민주정권이 인기가 없는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과거사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오늘이 내일의 역사라는 걸 자각하는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게 아니라, 역사를 살고 있다는 자각이 중요하다.



수천수만의 부엉이가 떠올라 새벽을 알릴 것이다. 
 
(한 교수를 만난 바로 다음날 아침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한 교수한테 소회를 추가로 물었다)
= 슬프다. 무슨 말을 하겠나. 이른바 진보보다 대중들이 더 슬퍼하고, 더 상처받은 것 같다. 그 분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의 과정은 정말 그가 있어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학도 못 나와서 고시 패스해서 판사하고 국회의원하고 장관하고 대통령까지 된 그 분이야말로 개천에서 용 난 것 아니었겠나. 개천에서 용이 나도 다들 지배세력의 품에 안겼지만, 그 분만은  그래도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꿈을 대중들과 같이 꾸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공포의 원천이었던 권력을 국민들에게 돌려주려는 시도는 뜻 깊은 것이었다. 대통령 노무현은 검사와의 대화로 직을 시작하여 검찰수사로 생을 마감했다. 검찰이라는 막강한 권력이 국민들에게 돌아왔으면 이런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국민이 그 권력을 돌려받지 못하고 개가 물어가 버렸다.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겠는가? 개천에서 난 용이 끝내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진 곳이 부엉이 바위다. 수천수만의 부엉이가 떠올라 새벽을 알릴 것이다.
   


# 한홍구는
1959년 서울에서 났다. 출판사(일조각)집 아들로 자라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1980년대 운동에 꼭 필요했던 현대사 연구에 매진하는 것으로 공부와 운동의 접점을 찾았다. “어찌 보면 운동과 공부 사이의 박쥐인생, 줄타기인생이기도 한데, 좋아하는 걸 하니까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이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린다. 원래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국정원 과거사위 일을 하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선 설날 빼고 매일 마시는 거 같다”는 걸 보면, 요즘 세상을 견뎌내기가 힘겨운 게다. 성공회대 교수,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집행위원장, 전의경폐지를 위한 연대 공동대표…, 하는 일이 정말 많다. 굴곡진 현대사의 갈피를 날카로우면서도 읽기 쉽게 담아낸 <대한민국사1~4> <특강> 등 대중적 현대사 저술로 중고등학생팬까지 거느린 ‘스타 저자’, ‘스타 강사’다. ‘걸어 다니는 현대사 사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하고 일하고 술 마시는 데 쓰는데도, “건강검진을 했는데, 특별한 이상은 없다고 나왔다”고 한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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