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 대하여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어쩌면 세상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일지도 모른다. 역사책을 조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은 지금 신문의 사회면에 등장하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범죄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종교와 권력과 교육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의 ‘뿌리’는 뽑히지 않으며 언제나 이 시대에 가장 크게 창궐하는 듯 보인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이미 세상의 시작과 함께 악도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신의 뜻을 거역한 아담과 이브의 첫 번째 죄는 뱀의 형상을 한 사탄의 꼬임과 함께 시작되었다. 단 한 세대도 살기 전에, 그 완벽한 세상의 시작에서부터 인간은 유혹에 넘어가 악을 행하고, 그들이 낳은 자식 중의 한 명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다. 인간은 그토록 ‘어쩔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경계를 넘어 무를 향하는 악
존 밀턴의 『실락원』에는 사탄(루시퍼)이 이브를 유혹하기 전의 상황이 그려져 있다. 이미 루시퍼는 신이 세상을 만들기 전부터 다른 천사들과 음모하여 신에 대항하는 반역을 꾀했고, 그 벌로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나온다. ‘악’을 뜻하는 영어 ‘evil’의 어원은 ‘경계를 뛰어넘는 오만함’이다. 루시퍼의 원초적 악과 이브의 첫 번째 죄는 모두 경계를 뛰어넘으려고 한 데서 시작됐다. 루시퍼는 신을 이기려 했고, 이브는 신과 같아지고 싶었다. 넘을 수 없는 것을 넘으려고 하는 것이 ‘악’의 근원이라면, 바로 거기에 인간이 악에 물들 수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의 역사는 경계를 뛰어넘음으로써 진보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가장 인간적인 욕구 속에 근원적인 악의 의미가 도사리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는 행위가 낳는 비극을 그린다. 그런 점에서 악을 나타내는 가장 본질적인 이미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신’과 닿아있는 셈이다.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다. 신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그는 무엇보다 ‘창조’하는 존재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다. 그는 진흙에도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다. 신의 영역에 닿으려고 하는 근원적 악의 아이콘들은 그 창조를 무화無化함으로써 신의 의미를 거스른다. ‘유’를 ‘무’로 만드는 행위야말로 창조와 생명이라는 신의 질서를 뛰어넘는 최고의 오만함, 즉 악이다. 그래서 선이 창조라면, 악은 언제나 파괴다. 그런 점에서 모든 파괴가 일시에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전쟁은 인간이 도달한 악의 최고 형태다.
전쟁은 가장 철저한 ‘무화’의 행위기 때문이다. 개인이 수행하는 전쟁의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살인’일 것이다. 살인은 타인의 생명을 일거에 빼앗아 조금 전까지 살아 숨 쉬던 인간을 살덩이일 뿐인 시체로 변형시킨다. 그것은 생명을 부여하는 신의 영역을 거슬러 생명 자체를 무화해버리는, 악의 가장 사악한 구현이다.
김길태라는 외설적 진실
최근 며칠 동안 한국인들은 ‘김길태’라는 이름을 통해 그 ‘악’의 이미지를 지켜보았다. 국민들은 죄 없는 여중생을 납치해, 강간하고, 살인해, 유기했던 김길태의 행위 속에서 생을 철저히 무화시키는 악의 모습을 목격했다. 김길태는 악행을 저질렀고, 그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김길태의 인생에서 시작해 사악한 범죄로 이어지는 모든 과정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 보도는 김길태의 악을 오직 그 혼자의 문제로 개인화해버리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가로등의 불빛이 자신의 뒤편은 더욱 어둡게 만들듯, ‘김길태 사건’은 김길태를 만든 사회적 환경들을 가린다. 즉, 우리는 김길태를 악마로 만들면서 우리의 악들을 저 어둠 뒤편에 숨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 여중생은 재개발로 비어있는 으슥한 마을에서 살아야 했는가?’라는 질문은 대표적으로 숨겨져 버렸다. 이 여중생의 죽음은 계속되는 재개발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오늘날 자본의 공간논리를 빼놓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 가난하고 약한 이들만이 어둡고 음습한 곳에서 살아야 하고, 왜 이들이 끔찍한 범죄에 쉽게 노출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들. 그리고 왜 오늘날 한국의 가공할 범죄자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피해자처럼 가난하고 약한 계급에서 나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 단란주점과 안마방, 키스방 등에서 ‘싼값에 여자를 사는’ 한국사회의 성산업과 지하철, 학교, 직장에서 쉽게 성폭력이 이루어져도 ‘너그럽게’ 해결되는 변태적인 문화, 10대 걸그룹 멤버들을 세워놓고 엉덩이를 돌려보라고 하면서 박수치며 좋아하는 대중문화의 분위기에 대한 질문들. 이런 질문 속에서 사실은 우리 모두가 김길태고 여중생이다. 김길태를 ‘싸이코패스’나 ‘변태’로 규정해버리고, 여중생을 ‘운 없고 불쌍한 피해자’로 둔갑시키면서, 한국사회는 자신들이 행하는 일상적 악에 대한 사면장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를 유지시키는 외설적 진실이다.
진짜 심각한 것은 ‘김길태’가 아닌 ‘일상적 악’의 창궐이다. 김길태를 사형시킴으로써 정의를 행한다고 믿는 판타지는, 나치의 가스실은 두고 히틀러만 죽이면 된다고 믿는 것과 같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수만명을 가스실에 보내 기소된 아이히만이라는 끔찍한 ‘악’의 아이콘이 ‘사탄’보다는 ‘광대’를 연상시킨다고 쓰고 있다. 악은 근엄한 진지함이 아니라 ‘남들도 다 하니까 나도 하고, 내게 맡겨진 일이니까 하는’ 그 ‘일상의 습관’에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타인의 존엄성을 해치는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성찰할 줄 모른 채, 그저 관습적으로, 재미로, 심심하니까, 본능이니까 한다면 그게 바로 가장 무서운 악의 얼굴이다. ‘알몸 졸업식’에서부터 ‘노숙자 폭행’ 동영상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약자에 대해 행해지는 악이 사실은 즐거운 광대의 표정을 짓고 있음을 안다. 날이 갈수록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지는 이 끔찍한 멘탈리티의 창궐 뒤에는 ‘남을 죽이고 나만 살면 되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논리라는 대타자가 버티고 있다. 자본주의 역시 언제나 ‘쾌락’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광대’와 닮아있다. 우리를 즐겁게 하는 일상의 쾌락 속에서 가장 무서운 악이 출몰하는 것이다. 그 일상의 악과 ‘김길태’와의 거리는 놀랄 만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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