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2월 1999-12-01   1165

사람의 딸, 시대의 풍란

여성노동자의 대모 – 조화순 목사

『고난의 현장에서 사랑의 불꽃으로』 아름다운 인간미의 향기를 피워내는 조화순 목사. 1900년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호에 만난 인물이다.

차별과 억압에 대항해 열정적으로 살아왔던 그녀의 삶은 많은이들의 귀감이 되어왔다. 그녀의 삶을 소개하는 것을 끝으로 창간 호부터 연재해온 ‘오한숙희가 만난 사람’을 마친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강원도의 산과 들은 후덕한 가운데도 정신을 맑게 하는 독특한 능력이 있었다. 졸다가도 차가 서면 저절로 잠이 깨는 사람의 능력은 또 어디서 오는 건지. 창으로 드는 볕에 겨워 잠깐 졸았나 했더니 어느 새 장평터미널이었다.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채 배낭과 노트북을 챙겨들고 일어선 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중나온 목사님이 다섯 살쯤 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막대 아이스크림을 빨아먹고 계신 게 아닌가. 목사님의 특징인 빳빳한 흰 머리카락은 더 늘어났는데 옆에서 초코렛을 먹고 있는 꼬마 아이와 똑같아 보이는 그 천진난만한 모습은 보는 사람을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지.

내가 막 여성운동에 눈을 뜨던 80년대 중반 무렵, 그날은 여성 생존권 대책위원회라는 것이 탄생하는 날이었다. 소개를 받자마자 단숨에 단상에 오른 키 작은 여인, 그의 목소리는 탄력적이고 낭랑하면서도 부흥회 강사처럼 선동적이었고 관념적이 아닌 구체적인 내용에다 익살스럽기까지 해서 한 순간에 분위기가 활기차게 변해버렸다. 옆에 앉은 선배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조화순 목사’. 여자 목사도 있었어? 그런데 무슨 목사가 저래? 그날은 내가 여자 목사를 처음 본 날이며 동시에 목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날이기도 했다.

서른 네 살에 당한 망신

그가 29세라는 늦은 나이에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전도사로서의 훈련기간을 거쳐 달월교회의 담임목사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두 남자가 찾아왔다. 조지 오글(한국이름 오명걸) 목사와 조승혁 목사였다. 산업선교라는 말이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그에게 느닷없이 함께 산업선교를 하자고 제의했다.

“이야기중에 그들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산업선교를 하려면 노동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다들 오겠다고 했다가도 노동한다는 바람에 그만둔다는 거예요. 그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내가 그랬어요. ‘진작 말씀하시지요. 그러면 갈게요.’ 나는 어려서부터 남이 하기 싫어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한다. 그게 신앙인의 도리라는 생각이 있었거든요.”

그는 목사의 신분을 속이고 인천 동일방직에 여공으로 들어갔다. 산업선교를 하기 위한 단련의 과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34세의 그에게 처음 맡겨진 일은 설거지 보조자. ‘야, 이리와. 설거지해.’ 이렇게 3주일을 지내면서 그는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 되고 모욕을 당하며 사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삶을 맛보았다. 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소외감과 수모였다. 그러나 그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정포작업(광목 천에 쌍올이 끼었나 살펴보고 쪽집게로 뽑아내는 작업)으로 옮겨진 첫날 노동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 친해지려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걸고 있는데 갑자기 호루라기 소리가 났다. 70∼80명쯤 되는 여공들이 모인 방안에 한 순간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작업반장이 소리를 질렀다. ‘저 여자, 오늘 처음 왔는데 왜 저렇게 말이 많아’ 작업반장이 가리키는 사람은 바로 조 목사였다. 너무 망신스러워 미칠 지경이 되어 ‘내일 당장 그만 두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다시 사건이 발생했다. 작업중 다시 호루라기 소리가 났고 ‘설마 나는 아니겠지’ 하는 그에게로 작업반장이 다가와서는 그의 어깨죽지를 두 손을 붙들고 흔들면서 ‘근무태도가 틀려먹었어’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똑바로 서서 일해야 하는데 다리가 아파 저도 모르게 작업대에 기대고 했던 게 눈에 거슬렸던 것이었다. 열여덟에서 스무살 갓 넘은 아이들 앞에 망신을 당한 굴욕감에 그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그에게는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인생 전환의 찰나였다.

“내가 목사인데 저 팔자 사나운 과부 작업반장에게 모욕을 당하다니 하면서 그를 저주하는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구유에 나고 사람에게 무시와 멸시당하신 게 생각나면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별안간 눈물 콧물이 쏟아져 내려 뒤범벅이 되면서 울기 시작했어요. 이건 분해서 우는 게 아니었어요. 하나님은 사람이 돼서 모욕을 받으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는데 나는 같은 사람으로서 목사랍시고 며칠간의 이걸 감당 못해서 저주를 하다니, 회개의 눈물이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약속했어요. 일생을 이 현장을 떠나지 않겠다. 민중과 함께 가난하게 살겠다. 그 다음부터는 감동의 눈물이 또 한없이 흘러내리는 거예요.”

교회적으로 말하면 예수의 성육신에 대한 커다란 깨달음이요, 성령의 은혜를 입은 것이었지만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이 비로소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이 그렇게 달라지니 연민같은 게 생기고 연민이 생기고 나서는 이해와 사랑이 생긴다는 것도 그 때 깨달았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친구들 사이에서 왕초노릇을 하고 교회에서도 항상 대접받으며 생활해오던 그에게 서른 네 살에 당한 이 망신은 절절한 회심의 사건이었다.

위장취업 1호

위장취업을 하는 그에게 오글 목사는 말했다.

“너는 배우러 들어가는 것이지, 가르치러 가는 것이 아니다. 노동세계를 배우라. 그 노동자 사회 질서를 배워라. 거기 이미 예수가 와 계신다. 그 예수를 찾으라.”

산업선교회는 그에게 6개월 훈련을 받는 동안 매달 보고서를 써내게 했다. 여성노동자에 대한 깊은 애정이 생기면서 그의 보고서는 달라졌다. 가장 천시 당하면서 묵묵하게 일하는 어린 여공의 모습을 보면서 ‘이게 예수’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그의 보고서를 본 오 목사는 그를 인정하게 되었고 그의 보고서는 더 이상 찢겨지는 운명에 놓이지 않았다.

1978년 2월 21일을 조 목사는 평생 못잊을 날짜라고 부른다. 그날은 동일방직 여공들이 대의원 선출을 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73년부터 조 목사는 산업선교회의 총무로 활동하고 있었다.

“자다가 아침에 전화를 받았는데 ‘큰일났어요. 남자들이 우리에게 똥을 뿌리고…’ 하더니 통곡소리로 변하는 거예요.”

이게 그 유명한 동일방직 사건이었다. 동일방직은 71년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노동자 지회장을 비롯하여 여성 집행부가 탄생된 곳으로 이는 세계 노동운동사에 남을만한 대단한 일이었다. 노조의 역사는 길었지만 남자들이 주도하면서 여성부장만 여자일뿐 어용노조였는데 이를 뒤집어서 집행부가 전원 여성이 된 것이었다. 그 여파가 다른 조합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는데 독재정부는 바로 이것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기업주들은 노조 집행부를 돈으로 매수하여 노동 귀족화시키는데 성공해왔지만 여자들에게는 그게 먹혀들지 않았다. 회사와 어용노조는 이를 뒤집으려고 노력해왔지만 여공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집행부는 해를 거듭할수록 튼실해졌다. 대의원대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갖은 회유와 협박을 했지만 완강한 저항에 부딪친 그들은 똥을 무기로 테러를 자행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선거는 치러지지 못했고 노조는 법적 싸움을 시작하면서 농성투쟁에 돌입했다. 그러자 무단결근을 이유로 한꺼번에 124명의 여공을 해고시켜버렸고 블랙리스트가 작성되어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라고 하면 어디에서도 받아주지를 않았다. 조 목사는 이들이 억울하게 탄압당하고 부당하게 생존의 위협에 처해 있는 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전국을 다녔고 그걸 막으려는 안기부와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그때는 미친 것같이 열심히 살았어. 피곤한 것도 모르고 우는 놈과 같이 울고. 특별히 뭘 해줘서가 아니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들에게 힘이 되거든.”

1974년 그는 해고 여공 다섯이 잡혀 들어가자 옥바라지차 부산에 갔다가 저녁에 YMCA 앞을 지나다 ‘가을맞이 신구교연합 강연회’라고 써붙힌 걸 보고 들어간다. 강사로 약속된 함세웅 신부, 김지하 시인 어머니(그때 김 시인은 갇혀 있었다)가 다 연금 당해서 못 내려오는 바람에 꽉 찬 청중을 보며 주최측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던 순간 그가 들어간 것이었다. 그는 미국 감리교 여성대회에 가서 동일방직 증언을 하기 위해 찍히면 안 되는 몸이었건만 할 수 없이 단상에 올랐다.

다음날 아침, 형사 넷이 와서 10분만 하더니 그것이 발전해서 그는 경찰서로, 안기부로 끌려다니다가 마침내 7년 구형을 받기에 이르렀다. 구형되는 순간 그가 법정에서 외친 말은 다름 아닌 ‘남녀차별 하지마’ 였다. ‘박형규 목사는 같은 박씨인 대통령을 비난한다고 괘씸죄가 적용되어 10년 구형받았는데 나는 여자라 봐준다고 7년이냐’ 유관순이 갇혔던 방에서 1년 2개월 살다가 박정희가 죽어서야 출옥했다. 최근 일고 있는 복고풍, 박정희 찬미론을 들을 때 어떠시냐고 물었다.

“그런 말 들으면 정말 미치겠더라. 어떻게 하지. 경제논리에 파묻혀서 다들 저러니, 이를 어쩌지. 난 이해가 안 돼, 왜들 그러는지. 현실에 대한 불만이 과거를 더 미화시키는 건지. 돈으로만 가치를 따져서 그런지, 요샌 교회도 점점 보수화 하고 있다니까, 큰일이야. 이걸 어쩌지.”

미리 쓴 묘비명

그의 소원은 묘비에 “평생을 노동자와 함께 살다 가다”라고 새기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뭘 하나 깨달았다 하면, 눈귀가 열려 새로운 사실을 안 것만큼 그대로 한다. 지식인은 실천 안한다. 체면, 눈치 다 재고 따진다. 지식인과 달리 노동자는 아는 만큼 실천한다. 그게 힘이다’ 그가 노동자를 존경하는 이유이다.

동일방직 사건 때 잡혀간 여공 50명은 한결같이 자기가 주동자라고 했다. 지금도 못잊고 놀라워하는 그 일을 두고 세월이 지난 다음 우연히 조 목사가 그들에게 물었다. 왜 내 이름 말 안했냐고. 그들은 ‘서운하게 생각지 말라’는 말을 먼저 하고 말했다. “목사님 때문에 깨우치고 새 인생 살게 된 것은 고맙다. 그러나 목사님이 시켜서 한 거 아니다. 당할 생각하니까 무서워서 밤새 고민하다가 이렇게 사는 게 인간다운 삶이라면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했다. 그러니 내가 한 거다.”

그는 이 감동을 못잊어한다. 이 감동을 통해 학벌에 대해 넘어섰다고 한다. 좋은 스승, 친구, 이웃을 만나든지 해서, 한번 깨우치면 스스로 일어서는 그들이야말로 진짜 스승이며 ‘아는 것만이 힘이다. 그게 민중의 힘이고 역사변화의 원동력’이라는 믿음을 안게 되었다.

이 믿음은 84년 복귀한 달월교회에서 다시금 확인되었다. 농민들이 많았던 보수적 재래 기성교회에서 새롭게 깨달은 여성신학, 민중신학은 교인들의 반발을 샀다. 힘들었지만 그는 옳다는 생각으로 계속 의식을 바꿔나갔다. 농민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말을 알아 듣거나 말거나 계속하고 주인의식 찾기 프로그램으로 의원 선거때 남선교회 주최로 후보자를 불러다 정견발표회를 가졌다. 여당은 왜 안 불러오냐고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청했는데도 안 왔으니 당신들이 좋아하는 여당에 직접 항의하라’고 했다. 그 다음부터 그들은 야당을 찍었다. ‘우릴 우습게 알았다 이거지.’

달월교회가 있는 곳이 시로 승격되었다. 신임시장을 불러다 시의 미래상을 말하게 하기로 하고 강사교섭을 직접 나서라 했다. ‘당신들이 주인이야. 목사는 떠나면 그만이야.’ 민초가 시장 만나러 가는 게 용기가 안 나서 10명이 함께 갔다. 면담을 신청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시장이 안 나오는데 울화통이 나서 동시에 10명이 ‘머슴아, 주인이 왔는데 왜 이리 푸대접하냐’ 떠나가게 소리를 지르니 시장이 회의하다가 듣고 와서 ‘어디서 오셨냐’고 하더니 ‘조 목사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라고 했단다. 그날부터 여자 목사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생겼고 달월교회라는 긍지가 생겼다. 이걸 보면서 조 목사는 교회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지고, 또 목회자에 따라 교회가 달라질 수 있고 교회가 부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교회에 나오는 시골 노파 하나가 ‘문서 없는 노예로 살았는데 이제는 여성으로서 신난다. 당당하다. 고맙다’고 했던 말을 그는 기적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떠날 때는 말없이

장평터미널에서 작은 승용차를 타고 메밀공장을 지나 산비탈로 한참을 올라오면서 내가 물었다. “목사 은퇴하시니까 어떠세요?” 그가 화끈하게 답했다 “좋지, 얼마나 좋은데.”

62살이 되던 4년전 그는 운동의 한계, 자신의 한계를 느꼈다. 몸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데, 모든 게 이론화되는 것을 보면서 ‘내 식대로 하는 때는 다 지났구나’ 했다. 목회도 어느날 갑자기 한계가 왔다. 더 이상 교인들을 속이면 안 된다 싶었다.

생각이 들자 바로 선포하고, 선포한 후 바로 실천하는 것이 ‘조화순’식이었다. 평소 소원하던 바대로 자연 속에서 유기농사를 지으며 살고자 강원도 봉평 태기산 밑으로 찾아들었다. 짐 둘 곳이 없이 여기 저기 흩어놓은 살림을 장로들이 와서 보고 울면서 마치 쫓겨서 오는 것처럼 이렇게 사시냐고 속상해 했다.

“떠날 때는 말없이 싹 떠나야 해요. 모든 분야에서 그냥 최선을 다 하다가 스스로 양심에, 내 능력에 한계가 오면 떠나야죠. 조건달지 않고 미련없이 떠나야 사회가 맑아지고 젊은 애들이 기를 펴요. 은퇴할테니 집을 한 채 사내라. 물러서서 뒤에서 한 마디씩 하는 이런 게 늘 문제예요.”

제2의 인생 감격시대

조화순 목사에게는 귀여운 후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젊은 나이에 연애를 못해본 것이다. 목사가 연애를 하면 천벌을 받는 줄 알았단다. 그는 오래전에 앞장서서 여자 목사 금혼규정을 없앴다. 이는 산업선교회 총무시절 남자 총무와의 차별 임금에 항의한 전력과 더불어 여성단체연합 3대 회장에 앉을만한 여성운동가의 면모가 드러나는 ‘업적’이다. 또 다른 후회 하나는 2년 앞서 60세에 은퇴하지 못한 것이다.

“생명체가 모두 다 나와 하나라는 것을 알았어요. 나무를 옮기다가 가지가 하나 부러졌는데 내 팔이 부러지는 것 같이 ‘아’하고 소리질렀어요. 너무 미안하다고 나무 붙잡고 울면서 사과를 했어요” 그는 요즘 자신이 구체적으로 하나님 품안에 있음을 실감한다. 주변의 것들과 함께 있는 것이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다고 한다.

“산책로 가시덤불 속에 노란 꽃이 꼭 한 송이 핀 게 신기해서 한참을 보았어요.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라도 오대산에 있던 태기산에 있든 그 있는 거 자체가 곧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은퇴해서 인생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새 인생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내 모습 자체가 사람들에게 좋은 활력소와 자극제가 된다면 그게 운동이고 서울 복판에서 활동하는 것보다 더 운동이다 싶어요.” 그렇다고 그가 운동판을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다. 감리교 여성들과 ‘함께 하는 여성회’를 만들어 청소년쉼터 운영사업을 하고 있다. 그 회의는 정기적인 서울나들이이다.

“여자들에게 담임목사를 줘야 말이지. 교회가 점점 보수적이야. 여성 목회자들의 활동영역을 개척하느라구, 그게 또 사실은 진짜 목회활동이기도 하구. 송탄에 가출 청소년쉼터를 누가 하겠다고 하네. 여자 목사들이 또 자기돈 털어야지. 돈이 많기나 한가, 그런데 우선 시작해 놓으면 다 되게 마련이야.”

혼잣말처럼 하던 그가 갑자기 천진한 아이의 얼굴이 되어 말한다.

“농사짓기 시작하면서 너무 대견하고 신기해 가지고 첫 수확을 내던 날 ‘오, 내가 추수했다’고 얼마나 감격했다구.”

지금 그 집에는 11식구가 산다.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먹는다. 그의 소원대로 찾아와 깃드는 사람들끼리 공동체가 만들어져가고 있다. 일복을 타고나서 쉬어보지도 못했기에 지금 이렇게 쉬는 게 좋다고 하지만 그는 오래전부터 아픈 허리로 농사를 짓는다. 서둘러 당일치기로 떠나오는 나에게 미숫가루 한 봉지를 들려주며 그가 말했다.

“사람들에게 일하는 것보다 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어. 일만 하다보면 실수도 많고 인격도 파괴되기도 하고 남에게 상처주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어.”

봉평 가기 며칠전 제주 바다 바위돌에서 본 풍란이 떠올랐다. 비바람을 맞으며 뿌리 담을 흙 한줌 없는 바위를 붙잡고 사는라 애쓰는 삶의 열정이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향기를 피워낸다고 했던가. 그의 삶과 신학을 담은 책 제목 그대로 『고난의 현장에서 사랑의 불꽃으로』 아름다운 인간미의 향기를 피워내는 그가 1900년대를 마감하고 몇 년간 연재해온 이 지면을 마감하는 자리를 채우게 됨은 새로운 세기에는 사람의 딸이 사람답게 살 수 있음을 알리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오, 내가 추수했다’는 조 목사의 감격이 차별과 억압에 대항해온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도 터져 나올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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