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5월 2009-05-01   1194

최성각의 독서잡설_혁명가이기 전에 ‘기품의 인간’이던 체 게바라





혁명가이기 전에 ‘기품의 인간’이던 체 게바라




체에 관한 여러 책들



최성각
작가, 풀꽃평화연구소장

장자연 리스트, 박연차 리스트, 노무현 게이트, 신경민 교체, ‘피디수첩’ 탄압 등으로 얼룩진 우울한 2009년 봄날, 나는 왜 뜬금없이 지극히 ‘아름다운 인간’으로 그 평가가 완결된 체 게바라를 떠올리는가. 이 무슨 짓인가? 나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인간’ 체 게바라를 떠올린 2009년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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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와 그의 오랜 애인이자 계약직 부인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1960년, 파리에서 아바나로 날아간다. 쿠바혁명이 성공한 이듬해였다. 쿠바혁명에 대한 열정적인 기대를 품고 있었던 사르트르는 그 여행을 ‘혁명의 밀월여행’이라 이름 붙였다. 섬은 축제 분위기가 감돌고 거리는 춤추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프랑스에서 날아온 사상계의 거물 부부는 어디를 가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쿠바 섬을 접수한 혁명세력들은 두 작가를 극진하게 영접했다. 카리브 해에서는 카스트로가 운전하는 고속 모터보트도 같이 탔고, 육중한 장화를 신은 체 게바라와 쿠바 시가를 나눠 피우기도 했다(헤이젤 로울리, 『보부아르와 사르트르, 천국에서 지옥까지』, 해냄, 2006년, 459-460쪽 참조). 현실참여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이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쿠바 혁명이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고전적인 사회주의 혁명인지, 압제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체 게바라를 통해 풀고 싶었다.


아바나 시가지를 지나던 중 사르트르가 말했다.


“이제야 의문이 풀리는군.” “무슨 의문이요?” 하고 체 게바라가 물었다.


“쿠바혁명의 정체성 말이오.”


“그래, 그게 뭐라 생각하오?” “쿠바혁명은 어떤 관념적 이념을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쿠바 민중의 갈망에서 나온 자생적인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체는 그저 빙긋이 웃었다.(박영욱, 『아름다운 혁명가 체 게바라』, 이룸, 2003년, 145-146쪽 참조)


파리로 돌아간 사르트르는 쿠바에 대한 일련의 사설들(「사탕수수밭의 태풍」)을 썼다. 그런 기록을 통해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표현한다.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체 게바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사람들은 사르트르의 평가가 그리 넘치는 수사가 아니라는 데에 수긍하게 된다. 사르트르에 대한 믿음에서라기보다는 그것은 체의 인간적 매력과 인품, 그의 열정, 그의 도덕, 그의 소박함, 그의 실천, 그의 뛰어나게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외롭고 비참했지만 볼리비아 야산에서의 그의 장렬한 죽음까지 가세한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사르트르가 본 대로 체는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소련식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빈털터리로 한 나라를 막 접수해 운영하게 되었으므로 소련의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던 피델 카스트로보다 자유로웠던 체는 사람의 목숨을 쉽게 여기는 소련, 특히 스탈린에 대한 실망으로 고뇌에 빠지곤 했다. 20세기 인간으로서 남미에서 자란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인간해방의 기반이 마르크스주의일 수밖에 없었지만, 체는 소련에서 배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쿠바의 혁명세력으로서 획득한 특권을 모두 버리고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를 택한 것도 이미 그가 혁명의지에 불타는 국제주의자이기도 했지만, 볼리비아는 조국 아르헨티나가 속한 남아메리카였기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나 볼리비아나 그에게는 군부의 폭압과 미제국주의의 세계지배로부터 해방되어야 할 ‘과묵하지만 의심 많고 슬픈 민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희망의 기호가 되어 서서히 번진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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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진배없이 8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한 사람의 젊은 책벌레이긴 했지만, 세계와 긴밀한 소통 자체가 봉쇄된 극동의 한 젊은이였을 뿐인 나는 드물게 아름다운 인간이었던 체의 생각과 삶을 세계의 젊은이들이 이미 이해하고, 감동을 넘어 열광적으로 숭배하고 있던 ‘같은 시기’에 알고 느낄 도리가 없었다. 그 원인은 외신을 곧바로 접할 기회와 능력이 없었던 내게 있었다기보다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때문이었다. 박정희 시절, ‘체 게바라’라는 이름의 혁명가는 수입되어 널리 퍼질 수 있는 정보일 수가 없었다. 지금 젊은이들은 짐작도 못할 일이지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조차도 북녘에 관한 부분은 먹물로 까뭉개고 나서야 수입했던 사상통제, 정보통제의 시절이었으니, 그 존재 자체로서 유럽과 남미의 꿈을 흔들었던 혁명가가 우리 땅에 온전하게 상륙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주 나중에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리고 나서야, 그리고 이듬해 광주에서 학살이 자행되고 나서야 체는 마치 일찍부터 열려 있었던 새벽처럼, 우리도 가질 수 있을지 모르는 어떤 희망의 기호처럼 느린 속도로 퍼져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체의 티셔츠를 입거나 체의 책들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내 기억이 틀릴 수도 있지만, 90년대가 흘러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가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90년대 초반, 인도나 네팔에서 체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후배들에게 줄 선물로 사갖고 올 때 나는 그 싸구려 티셔츠가 마약이나 귀금속이 아니었건만, 입국심사대 앞에서 공연히 가슴이 벌렁거렸던 기억이 난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도 “다른 것은 다 빼앗아가도 좋다, 하지만 체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만은 봐주시라”, 그런 심사로 서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그렇지만 입국심사를 하는 관리들은 땟국 흐르는 전형적인 배낭여행 차림인 내 배낭을 뒤진 적이 거의 없다. 뒤져봐야 빨지 못한 속옷과 양말짝, 고작 인도 향이나 네팔 차 따위, 그리고 긴 여행에 너덜너덜해진 책들밖에 끄집어내 살필 게 없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왜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뭔가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체의 아름다운 실천


체 게바라는 비록 천식에 평생 시달렸지만, 그 생각이 그지없이 고결했으며, 인간에 대한 사랑이나 연민은 너무나 깊었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어떤 위치에 처하든 권위적이지 않았으며, 진심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겼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압제와 불의, 폭력, 실천이 결여된 이론, 자제가 안 되는 탐욕, 거짓과 위선을 미워하고 증오했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그가 너무나 잘생겼다는 점이다.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본인은 ‘실패한 시인’이라 자조했지만 그 또한 한 사람의 작가로서의 지성과 죽음에 연연해하지 않는 의연함이 결합되어 있다. 가혹하리만큼 아름다운 실천의 삶을 보여준 사람이 그토록 빚은 듯이 잘생기기까지 했다니.


단지 12년여의 우정일 뿐이었지만, 혁명동지였던 피델 카스트로만큼 체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1967년 10월 18일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열린 체의 추모집회에서 백만 명의 민중들 앞에서 피델이 말한다.


“우리는 생각하는 인간으로, 행동하는 인간으로, 때 묻지 않은 도덕적 인간으로, 따뜻한 인간성을 가진 인간으로, 오점 없는 행동을 한 사람으로, 그의 사상이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체처럼 모든 미덕을 갖춘 사람을 찾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그와 같은 성격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와 비슷한 사람을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니며, 그를 뛰어넘은 사람을 찾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존재가 그와 비슷한 사람이 생겨나게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의 CHE』, 김장윤 옮김, 2003년,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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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야기지만, 1987년 피나르델리오 신축 전자부품공장에서 가졌던 게바라 사망 20주년 추모식에서 피델은 체가 일찍 죽었으므로 다시금 마음 놓고 그를 그리워한다.


“우리는 체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닮아 행동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에라도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일에 대한 태도나 가르칠 때에도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가장 어려운 일에도 헌신적으로, 자발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의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진정한 연대를 실천하고, 동지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말하고, 실천하는 데 모순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됩니다.”(피델 카스트로, 『피델 카스트로의 CHE』, 김장윤 옮김, 2003년, 182쪽)


체가 시대와 정치적 신념과 상관없이 보통사람일 뿐인 ‘우리’에게 어떤 내용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 피델은 안내하고 있다. 나는 평소 ‘쿠바’와 동일어로 간주되기도 하는 피델에 대해 그가 이룩하고 지켜낸 놀라운 성취에도 불구하고, 비록 아바나 접수라는 긴박한 시절의 혁명동지이긴 했지만 아우 라울에게 정권을 세습한 데 대해 “피델도 할 수 없구나” 하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체를 추모하는 피델에게서 체뿐 아니라 피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정치가의 말이 아니라 인간의 말을 느끼게 된다.




“인류보다 더 진화한 인간”


피델은 체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은연중에 맡게 된다. 항상 스스로 너무 많은 짐을 지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체는 무모하리만큼 대담했고 ‘살아남는 일’에는 대체로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를 지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그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놔두면 죽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죠.”(피델 카스트로 / 이냐시오 라모네, 『피델 카스트로 마이 라이프』, 송병선 옮김, 2008년, 202쪽)라고 우려한다. 하지만 피델의 우려대로 체는 ‘남아메리카 연방’의 꿈을 품은 한 사람의 게릴라 자격으로 볼리비아로 갔고, 그 황량한 볼리비아의 야산에서 중과부적의 전투 중, 부상당한 동료의 안경을 주우려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사로잡힌다. 지금은 절판된 『체의 일기』(거리문학제, 1997년)에 의하면, 게릴라들을 목격한 볼리비아 농부를 처단해야 한다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농부가 신고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예측하면서도 풀어준다. 혁명가이면서도 동시에 불필요한 살상을 극도로 혐오했던 체는 파멸의 순간을 당겼으되 의연했고, 끝내 자신의 원칙에 충실했다. 볼리비아군은 체를 살해하라는 린든 존슨의 명령에 의해 체를 사살했지만, 그의 주검에서조차 두려움을 느낀다.


체는 마침내 불멸이 되었고,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박애주의자 예수에 비견되는 신화가 되었다. 이 세상이 지금보다 좀 더 나은 세상이 되는 일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기호가 되었다. 시인 이산하가 체를 일컬어 ‘인류보다 좀 더 진화한 인간’이라고 한 말(체 게바라, 『체 게바라 자서전』, 박지연 옮김, 2004년, 10쪽)에 나는 사심 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체를 생각하면 진화는커녕 퇴행을 선택한 ‘여기 이곳’의 우리 사회와 치열하지 못한 나의 삶이 왜소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시골에서 밭에 거름을 뒤섞으면서 내게 허락된 시간을 이제야 내 마음대로 사용하게 된 기쁨 속에서 나는 항구나 광산에서 몸으로 자원활동을 하던 체를 떠올린다. 후회와 습관적인 반성으로 가득 찬 책 따위를 잠시 경멸하고, 몸을 사용해 ‘자원봉사의 대가’이기도 했던 체처럼 땀 흘리고 일을 할 때, 나는 마치 그를 멀지 않은 이웃마을에 살고 있는 한 선배로 착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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