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6월 2011-06-13   2085

김용민이 만난 사람-‘운동권 전설’은 계속된다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사진 김은진 작가
김용민 시사평론가

교수가 떼지어 줄지어 막아섰다. 짐작건대 ‘데모는 안 된다’, ‘너희가 다친다’ 이런 명목이었으리라. 분기탱천한 학생들은 ‘스승님, 비켜 주십시오’라고 정중히 요청한다. 절체절명의 상황, 한 교수가 ‘그러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며 바닥에 눕는다. 그러자 또 다른 여러 교수도 엉겁결에 눕는다. 필경 ‘오버’였다. 그러자 예리한 눈매의 한 선배급 학생이 외친다. “지나가!”

  상기 사건은 6·3 한일회담 반대투쟁 당시의 전설적 일화이다. 그 선배급 학생은 숱한 60년대 학번 후배들의 선망과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개념에 더한 카리스마 때문이다. 1960~1970년대 학생운동했다며 이 사람을 모르면 간첩이다.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야기다. 달인 김병만은 매번 16년 경력을 자랑한다. 또 다른 달인 정성헌 이사장은 그보다 7년 더 많은 23년의 손때를 운동권에 묻혔다. (1987년 기준) 23년 전인 1964년으로 돌아가 본다.

DMZ 인근 농촌 마을서 ‘평화 일구는 농군’으로

“내가 대단한 소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1964년 19세에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한일회담 반대운동 즉 6·3항쟁이 한창이었어. 이론과 소신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었어. 그저 상식적인 판단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지. 지금도 그때 생각과 다르지 않아. 민족 주체적인 입장에서 식민지 체제를 청산 극복하지 못하다보니 한반도나 민족, 또 동아시아 역사가 지체된 것 아니겠어? 정상적으로 또 엄정하게 과거사 청산을 했다면, 이것이 더 이상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아 남과 북이 통일로 가는데 수월했을 것이고 동아시아의 공존공영에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봐. 당시 한일회담은 그런 시대적 과제에 역행했다고.”

“내가 대단한 소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1964년 19세에 고려대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한일회담 반대운동 즉 6·3항쟁이 한창이었어. 이론과 소신으로 무장한 것도 아니었어. 그저 상식적인 판단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지. 지금도 그때 생각과 다르지 않아. 민족 주체적인 입장에서 식민지 체제를 청산 극복하지 못하다보니 한반도나 민족, 또 동아시아 역사가 지체된 것 아니겠어? 정상적으로 또 엄정하게 과거사 청산을 했다면, 이것이 더 이상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아 남과 북이 통일로 가는데 수월했을 것이고 동아시아의 공존공영에 큰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봐. 당시 한일회담은 그런 시대적 과제에 역행했다고.”

  20줄 넘기도 전부터 시작된 정성헌 이사장의 파란만장한 역정은 서경원 평화민주당 의원 밀입북 사건 문제로 1989년 구속되고 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계속됐다. 6·3항쟁 이후 박정희 유신독재, 전두환 신군부독재 정권 들어서 벌인 6월 항쟁까지 그를 빗겨간 현대사 사건은 없다시피 했다. 만약 그가 회고록을 출간한다면 명실 공히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사 그 자체일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인 2011년 5월 23일. 5·18이 시원始原이었던 6월 항쟁의 정신을 터득하기 위해 정성헌 이사장을 만났다. 5월과 6월은 그렇게 엇물려 있었다.

  강원도 인제군 서화리에서 정성헌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사)한국 DMZ평화생명동산 이사장도 맡고 있어, DMZ를 평화와 생명의 가교로 만들기 위해 힘을 쏟고 있다. 이곳은 청정한 공기 속에, 화학적 작용 없는 100% 천연 신선풍이 부는 DMZ 인근 농촌 마을이다. 동산 일대에 재배하는 식물을 일일이 소개하던 정성헌 이사장은 영락없는 농군의 풍모 그대로였다. 착석하자마자 ‘6월의 기억’을 떠올려달라고 했다.

전부 돈으로 가고 있어, 모든 것의 구심에 자본이 있어

“6월 항쟁, 나는 성공을 확신했어.”

  과반은커녕 소수당에 불과한 야당, 비우호적인 언론환경, 4·19 이후 25년 넘도록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민주혁명,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안정희구 정서’. 가톨릭농민회 사무국장,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 집행위원 직함으로 1987년 6월 전국을 누비던 재야운동가 정성헌에게 이런 만용 비슷한 승리의 기대감을 준 동인動因은 무엇일까.

  “모금함, 모금함이었어. 1만 원짜리도 많았고 10만 원짜리 수표도 꽤 있었거든. 소액이 다수였던 거지. 시민의 마음이 우리에게로 온다는 느낌이 확 오는 거야. 그 언제더라, 날짜를 잊어버렸는데, 한 2천만 원 넘게 나온 날이 있어. 그때 무릎을 쳤지. 전두환이 저거 쫓겨난다고.”

  ‘고수’는 안다. 공기 냄새만 맡고도 대세가 어느 쪽에 기울었는지. 6월 15일이 지나고 정성헌은 당시 전남 광주에 내려간다. 민주화의 성지 광주의 1987년 6월 풍경은 어땠을까. 가장 뜨겁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아니야. 대학생만 몇 백 명씩, 이를 테면 히트 앤드 런 식이었어. 트라우마가 있었던 거야. 7년 전에 무차별 학살을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대세가 우리 쪽으로 넘어오니까 달라졌어. 광주가 부활한 거야. 학생은 물론 넥타이부대도 거리로 나오더라고. 금남로 꽉 메우고 그랬지. 사실 광주 시민들은 용감한 거야. 7년 전, 내가 만약 트라우마를 겪었다면 대세가 어떻게 돌아가건 간에 집 밖으로 못 나갔을지 몰라. 게다가 그때는 한참 계엄령을 내리니 안 내리니 뜬소문 돌때였거든.”

  6월 항쟁은 결국 ‘전두환의 백기’로 종결됐다. 직선제 개헌, 김대중 전 대통령 사면 복권, 시국 관련 구속자 전원 석방, 언론기본법 폐지 및 언론자유 보장 등의 야당 시민사회단체 및 학생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잘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 후에 돌아보니 반성할 것이 적지 않았던 거야. 전체적으로 보면 정치적 민주화는 진전시켰다지만 사회 또 경제 분야의 민주주의 신장에는 소홀했던 거야.”

  하긴 ‘부자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대통령 후보에 표를 몰아줘 당선시키고, 그것이 무위로 돌아갈 것 같으니까 아류의 허풍선을 타는 지도자에게 기대와 지지를 보내는 현실 아닌가.

  “전부 돈으로 가고 있어. 그 옛날에는 징역살고 나오면 그만이었어. 요새는 벌금을 때린단 말이야. 꼭 돈으로 한다고. 독재 권력은 이겼는데 그 자리에 앉은 돈을 못 이기고 있는 게야. 돈에게 노예가 된 것은 언론도 마찬가지 아닐까. 조중동 대 비조중동 이런 분류로 보지 말고 전체로 살피라고. 신문이나 방송 모두 자기 수입의 50% 미만이 광고가 아니면 자기 말을 할 수 있어. 그런데 그걸 넘으면 광고 자본주 말씀을 주로 참작하게 되지. 어디 자기 말하는 언론이 몇이나 있을까? 교육도 똑같아. 종교는 또 어때? 모든 것의 구심에 자본이 있어.”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6월 항쟁의 어젠다 세팅을 한다면 어떻게 하겠나’라는 물음을 던졌다.

  “내가 그때 국민운동본부 내부의 헌법 기초소위원이었거든. 토지 국유화 내지 공유화를 주장했어. 나는 지금도 물이나 땅 모두 그 누가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 돼야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당시는 박정희 18년, 신군부 7년 그러니까 25년 독재에 종지부를 찍고 직선제를 관철한 것만으로도 상당히 감격할 때였어. ‘그런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면 급진적이라는 비난 역풍이 일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야. 그래서 그때 치열하게 고집하지 않았어. 그게 참 아쉬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정부도, 민주화운동 세력도 아닌 국민의 것

정 성헌 이사장은 이런 배경과 경과를 들어 ‘우리 민주주의 토대가 취약하다’고 진단했다. 부분적인 성과이긴 하나, 이런 민주주의는 그래도, 정치개혁, 인권신장, 환경의식 고양, 남북화해협력 강화 등을 불러왔다. 6월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야기로 화제를 옮겼다. 이 사업회는 김대중 정부부터 생긴 공기관이다. 따라서 이사장 임명장은 이명박 정부가 수여한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이 있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정부 소유물이 아니다. 법으로는 그러할지 몰라도. 그렇다면 민주화운동 진영의 전리품일까. 그렇지도 않아. 나는 별 능력은 없는 사람이지만 임기 3년 동안에 국민의 것으로 되돌리도록 노력할 거야. 이 사업회는 정부 것도 아니고 운동권 것도 아니고 민주화 위해서 애썼던 국민 것이거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인가 하는. 사실 민주주의는 달성하기보다 유지, 확대하는 가치이지 않겠나. 이런 문제의식에는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민주주의가 크게 퇴보하는 현실을 전제로, 이명박 정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민주화운동기념사업을 추진하는 모순성을 짚은 것이다. 좀 더 노골적이고 거칠게 말하자면 ‘이런 난조에 이사장직을 왜 수락했는가’하는 물음이다.

  “건전한 보수 또한 합리적인 진보, 나는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동안 우리 한국사회는 독재 반독재의 대결구도였어. 이러다보니 이분법에 익숙해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양측이 서로의 역할과 존재가치를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해. 지난 4·27 선거 당시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한 목사가 민주당 후보인 손학규 씨를 찍어줘야 한다고 말하더라고. 내가 전화를 했어. ‘목사님, 그 말씀에 놀랐습니다’라고 했더니 ‘놀랄 것 없습니다. 민주당이 잘돼야 한나라당이 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더라고. 상당한 식견과 이해가 있는 것이지.”

  여당의 독주가 가능했던 것은 뒤집어 이야기해 야당의 무력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야당을 키워줘야 국민 무서운 줄 알게 되고 나아가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뿌리내린다는 것이다. 정성헌 이사장은 어쩌면 극과 극의 이념대결 구도의 완화에서 본인의 역할을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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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서 지역으로, 사무실에서 현장으로, 이슈에서 생활중심으로

6 월 정신의 핵심적 성과는 모든 국민이 동등한 효력의 한 표를 부여받은 것이라 하겠다. 6월 정신의 현재적 계승은 자본 앞에서도 모든 국민이 평등한 기본권자가 되는 것이리라. 이러한 세상을 가꾸는데 있어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은 시민단체다. 시민운동은 6월 항쟁의 성과를 발전 계승하기 위한 동력으로 출발한 것 아니겠나. 정성헌 이사장은 따끔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독재 반독재의 싸움 당시, 권력은 강고한 군사독재세력 아니었던가. 싸우려면 강한 기동력과 고밀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고. 중앙, 사무실 중심적이고 청년, 학생 중심적이었잖아.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 중앙에서 지역중심으로, 사무실에서 현장중심으로, 이슈에서 생활중심으로 가야해. 예컨대 갯벌문제는 환경단체 중앙본부 사무실이 아닌 현장에 가서 할 일이야. 조직의 비대화 백화점화도 경계해야 해. 조직이라는 건 평소에 일 잘하고 위기 때 싸움 잘하려고 하는 건데 규모가 커져 가지고는 일을 잘 못하고 싸움도 잘 못한다고. 법치주의를 따른다며 고소·고발운동을 참 많이 하지. 그러면 운동의 주력이 법조인과 교수 중심으로 흐른다고.”

  ‘이쪽’ 진영에 너무 신랄하다 보면 오해를 사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맺어진다.

  “운동이라는 게 최고로 잘하는 운동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하는 거라고. 우리나라 시민운동은 소금 역할은 하지. 사회를 안 썩게 한다는 것이야. 그런데 소금은 치면 좀 아리단말이야. 그렇다고 정권이 나서서 때려잡으면 안 될 일이지. 그러면 손해거든. 시민운동의 견제 없이 독주하다보면 자기가 먼저 썩게 된다고. 김대중 정부 당시 우리는 공익자금 선정 시 새마을운동이나 자유총연맹에도 보조금을 주도록 했어. ‘빵간(감옥)’에 다녀온 사람도 그렇게 마음을 쓰는데, 솔직히 말해 여기는 양지만 있던 사람들이 뭘 그렇게 원수졌다고 욕보이고 돈 줄 끊고. 물론 그렇게 한다고 시민운동이 죽지 않아. 진짜배기로 재탄생 할 테니까.”

총포성… 평화생명동산 존재감 키우는 배경음악

운 동권의 ‘전설’이기도 했으나 시대정신에 따라 정치개혁, 지방자치, 농민운동, 통일운동을 주도해 온 시대의 사람. 지금은 잠시 경색된 남북관계가 다시 회복되는 날에 대비해 생태적 공동체 회복을 위한 운동을 벌인다. 그런데 인터뷰 내내 총포성이 울렸다.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의 존재감을 키워주는 배경음악쯤으로 여긴다는 정성헌 이사장, 지금도 남과 북의 DMZ를 뚫는 생명과 평화가 숨 쉬는 동산을 가꾸는 꿈을 키우고 있다. 북한의 변화와 호응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감추지 않았다.

  양극단의 대결 구도를 끝내고 평화와 공존의 세상을 꿈꾼다고 하자, 모두冒頭에 정성헌 이사장의 ‘지나가!’ 발언 역사를 증언한 1960년대 당시 여대생(현 모 교회 원로목사 사모) 최 모 씨는 놀란다. 그러면서 의지대로 해낼 것이라고 지지했다.

  “내가 한 번은 그 분을 전도하려고 했어. 그랬더니 ‘최 양은 나를 전도하지 말고, 썩어빠진 교회를 개혁하시오!’ 이렇게 호통 치는 거야. 훗날 시골교회에서 남편 따라 살 때에 수배 상태였던 이 양반이 우리 집에 왔더라고. 이튿날, 공짜로 숙식해주는 게 미안해서인지 연탄을 다 날라주고, 그날로 다른 곳으로 떠났었어. 우리도 가난했으니 노잣돈 줄 여력도 없어 미안했지. 그래도 가장 치열하게 살아오며 시대를 봉사한 사람이 아닌가 해. 청년예수가 그러지 않았나.”

  이 최 모 씨는 나의 어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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