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4월 2001-03-01   1153

[권은정의 파워인터뷰16] 전업주부 홍성담

발로 문을 두드렸다. 처음엔 물론 나도 손으로 노크를 했다. ‘계세요?’ 몇 번을 그렇게 했는데도 응답이 없으니 당연히 주먹이, 아니 발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의 대형 창고 작업실 입구에는 벨이 없다. 약속을 잊고 출타를 한 것일까? 아니면 ‘작가적 은둔’에 들어가 버린 것일까? 어느 경우라도 다시 와야겠네, 예술의 길이 멀고도 험한 게 아니라 예술가를 만나는 길이 험한 거다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서비스센터 아저씨처럼 바로 문 앞에 서서 핸드폰을 ‘때렸다’.

‘아니 안 들어오고 뭣해요.’

아마 중공군이 억수로 추운 겨울날 북한 덕산 지방을 내려올 때 복장이 저러했으리라. 누비점퍼, 누비바지에 물감이 잔뜩 묻혀 있었다. 한시간도 넘게 문을 두드렸노라고 엄살을 부리며 지각한 사실을 은폐하려는 나의 얄팍한 의도를 아는 척도 않은 채 그는 상냥한 미소로 커피를 준비한다. 날렵한 주부의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그는 혼자 산지 십 년이 넘었을 것이다. 손에 밴드가 붙여져 있다.

‘참치 캔 뚜껑에 베였어요. 그 통을 버리려면 씻어서 버려야 되잖아요. 수돗물에 헹구다가 손을 벤 거예요. 이거 뭐 금방 낫겠지요. 살림 하다보면 이런 잔 상처를 많이 입게 되요. 그나저나 주부습진이 안 나아서 큰 일이에요. ’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화가는 심각한 표정이 된다. 붓과 행주. ‘언덕에 올랐다가 산에서 내려온 사나이’처럼 ‘민중미술가 만나러 갔다가 전업주부 만나다’로 방향을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정신 차리고 미술가 홍성담 부터 얘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미션 체인지 임파서블.

최근 서울 시립 미술관에서 민중 미술가들의 작품 전시를 위해 여러모로 준비를 한다는데 어떤 상관이 있으신가요?

‘하하하…. 상관없어요.’ 라면서 그는 상관 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립미술관에 들어간 제 작품이 5월 연작 기록 판화인 ‘새벽’인데 그게 추려서 완간된 게 모두 50점이에요. 전두환 신군부 정권으로부터 최고의 불온물로 낙인찍혀 가장 밉보이게 된 작품이었지요. 그 판화 건으로 구속이 되고 몇 년에 걸쳐 계속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요.

그러나 그 판화를 찍었다는 죄목으로 이리저리 그가 잡혀가거나 불려 다니는 동안 국제 앰네스티와 영국 글래스고우시, 독일 함부르크시에서는 그를 위해 인권활동을 벌였고 그의 작품을 사들여 자신들의 미술관에 소중하게 전시하였다. 그런 행사 때 마다 작가는 초대를 받았지만 갈 수 없었다. 출국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때 간첩혐의로 몰려 옥살이까지 했던 화가의 작품이 버젓이 대중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그것도 공공 미술관에서 개방되다니.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신원조회니 하는 까다로운 조건도 없다. 격세지감의 만감이 교차하시겠군요?

문제의 작품이 공공 미술관의 소장 작품으로 선택된 것이지요. 한국사회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기분이 좋지요. 사실 아직 국가 보안법이 폐지는커녕 개정도 안 된 마당이지만 사고의 인식 자체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은 들어요.

요즘 TV토론 같은데서 나오는 국가 보안법개정이나 언론개혁에 대해 극우적인 발언들을 들으면서 저걸 그냥 두나, 대국민적으로 뭉쳐 뭔가 반응을 해야하는데 하는 생각이 치솟으면서 속이 상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속내를 들쳐보면 참으로 많은 것이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엊그제 한 라디오 토론 프로그램에서 북한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남한정권은 친일세력이 잡았기 때문에 갈등구조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등등.. 이런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되다니 참 많이 변한 거지요. 그런데 그런 얘기 막 해도 되나 몰라? 진짜 걱정되네. 하하하……..

그의 웃음이 커피 향속으로 퍼져 나갔다. 확실히 세상은 변했다. 옛날 같으면 커피 마시면서 이런 얘기 못한다. 소주라면 몰라도. 그럼 도합 감옥에 몇 번을 가신 건가요?

창피하게 그런 것을 자꾸 묻고 그래요? 광주 5월 등과 관련해서 수배와 조사를 받았지요. 89년에 평양축전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 사건으로 감옥 가서 3년 있다가 나왔고.

감옥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화두이다. 지난 98년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서 ‘홍성담의 감옥’은 강한 주제가 되었다. 지금 그가 중공군 복장으로 손을 호호 불어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도 감옥이다. 대저 그에게 있어서 감옥이란 무엇인가?

파시즘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의 콤플렉스로 작용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라, 뭐 이런 관계 안에서 말이지요. 파시즘의 기본 원리라는 게 바로 나 이외의 사람도 나를 닮아야한다. 저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격리시키거나 죽이거나 하는 지경까지 가는, 이게 파시즘의 골조라는 거지요. 한 사회의 파시즘의 가장 전형이 바로 감옥이 아닌가 생각해요.

현재 작업 중인 그림도 역시 감옥과 관련 있는 것이지요?

3월17일부터 과천 국립미술관에서 작가 30여명을 선정해서 대규모 기획전을 하는데 그 중에 민중 미술 쪽으로 세 명이 선정되었어요. 우리 주제는 ‘메시지의 전달’인데 제 그림제목은 ‘통방’이고요. 제 경험으로 통제되고 꽉 막힌 감옥에서의 생활에서 재소자들이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나 보여주고 있는 거지요.

그전에는 감옥 안에서 감옥을 바라보았는데 이번엔 감옥 밖에서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림을 그리면서 이렇게 보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는 생각이 새삼 들어요. 물론 그 안에 있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그러니까 살았지만…. 이제 이 그림으로 감옥그림은 끝이에요…. 내가 마음속에서 기어코 부닥치고 말아야할 게 있지 않것소. 그것을 그리고 나서야 다른 것을 그릴 수 있는 그런 것이지. 이걸로 나는 그런 부담을 덜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이제 감옥에서 탈출을 하게 되는 것인가? 인간은 너무나 이상한 존재여서 제 스스로 강요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다고 뭐랄 사람도 없건만 기어코 혼자서 우기는 게 인간인 것이다. 시지프스 보다 더 힘겹게 무거운 바위를 지고 끙끙거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옥죄었던 80년대라는 시대의 올가미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나?

80년대는 자신의 꿈은 없어야지 미덕인 시대였습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역사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무한하게 ‘유보상태’로 남아있어야 했던 시대였지요. 그게 우리에게 콤플렉스였고 스트레스였던 것이지요. 현재는 다양성을 요구하는 시대, 시대가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대이지 않습니까? 예술가의 생명은 가없는 상상력이 아닙니까? 80년대는 작가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그런 면이 분명히 있었지요.

때로 붓질 자체를 제한하는 수도 있었다. 그의 작품 <사계절> 중에는 겨울이 없다. 판화시리즈 사계절을 봄, 여름, 가을로 그려내고 있을 때 ‘너무 관념적으로 흐른다’는 주위의 비판이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그 등쌀에 못 배겨나 ‘에라, 그럼 겨울은 없다’고 포기한 것이다. 그의 슬픈 겨울이야기다. 그렇지만 이런 저간의 이유도 밝힌 지가 얼마 안 된다. 이러한 이유를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던 시대가 있었다. 이제 장산곶 매처럼 그도 훨훨 날아 갈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안의 파시즘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가?

글쎄요 그러한 도정에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 그 동안의 급박한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있어온 산업화의 잔해, 또 정보 파시즘, 사이버 파시즘 같은 게 등장하고 있잖아요. 아직도 한국사회가 많이 다양해졌지만 아직도 그 다양한 것끼리의 간격이 불안정하지요.

그는 특히 사이버 파시즘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www. humani. org)를 만들어 왕성한 사이버 액션 즉, 미술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그림이 최첨단 기술과 어울린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그의 그림 중 어떤 것들은 전통적인 색채인 오방색의 현란함으로도 섬뜩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민중미술의 한복판에서 동영상으로 뛰는 그의 표현방법은 가히 전방위적이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욕심이 대단한 것 같은데요?

그림이든 뭐든 자기표현의 도구라고 봐요. 내 표현에 합당한 것이라면 장르와 매체를 구별하지 않겠다는 게 제 의지예요. 80년대 그 당시 광주에서 문화운동에 장기간동안 일하면서 음악, 연극 등에도 전방위적으로 참여했지요. 뭘 구별할 처지가 아니었거든요. 그때 습성이 그대로 붙어 있는 거지요. 대학 다닐 때 영화도 좀 해보았고, 90년대 감옥에서 나와서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하면서 동영상이 갖는 대중적 호소력을 깨달았어요.

매체를 도구로 이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술이 엔터테인멘트화 되는 것인데 여기서 주의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될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하느냐 하면 자본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자기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지요. 백남준 같은 경우가 그렇지요. 썩어가는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그에 종속되는 작품을 만들어내게 되는 당연한 귀결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우리 미술 쪽에서 매체를 광범위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의 문제지요. 요즘 미디어 미술이 유행하면서 우리 민중 미술계 쪽에서도 그런 흉내를 내는 친구들이 다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배제해야 하는 자본의 종속구조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고 애석해요.

창고형 작업실은 가히 넓었다. 축구장만 하다면 너무 허풍이지만 배구 시합은 능히 하고도 남을 공간이다. 책장 안에 물감이 빼곡히 쌓여져 있었다. 그의 보물들. 저게 전부 돈이 아닌가. 난 유화 물감을 볼 때마다 돈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있다. 갈탄 난로 위에 곰국 솥이 끓고 있었다. 광우병이라고 난리들인데 걱정이 안 되는가보다.

요럴 때 얼른 사서 끓여 먹어야 재. 값이 싸지 않소.

’살림의 지혜‘. 그는 광우병의 잠복기는 길면 60년이나 된다는 사실에 특히 주목하고 있는 듯했다. 주방을 살펴보니 어쭙잖게 살림하는 여자들은 겁먹을 정도로 손이 맵 짠 것 같다. 밥그릇 하나 하나도 함부로 고른 게 아니다. 살림하랴, 작품하랴 힘드시겠어요. 가끔 슬럼프가 찾아올 땐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일단 청소와 빨래를 하고 인스턴트 죽과 스프를 준비한 다음, 이불로 굴을 만들어 들어가 묻혀요. 다른 사람들한테 나 힘들다 이런 표시 안 하죠. 술로 풀 생각도 안 해요. 그리고 저와 같은 주부들이 주로 한다고 알려져 있는 쇼핑, 그것도 안 해요. 또 어딜 허우적대며 돌아다니지도 않아요. 그렇게 하고 난 뒤의 허전함을 알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자기 안으로 잦아드는 방법을 택하지요(존경의 염이 저절로 생김).

그는 운보 김기창 화백을 기리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느낀 게 있단다. 예술가로서의 삶은 일정한 선이 있는 것이다. 길게 갈 것 없다. 나이 들어서도 그 열정을 삭이지 못한 모습은 추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이 더욱 바쁘다. 대학시절 국전에 당선되었으면서도 그의 젊은 날은 그림보다는 문화운동가로서 충실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그림에 입문한 듯 한 느낌마저 든다고 한다.

화가로서 홍성담을 얘기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문화운동가로서 삶이 워낙 치열해서인지 내가 정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 때도 있다니까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그의 자세는 언제나 겸손한 것이지만 그의 그림은 기가 세다는 평을 받는다. 실제 그의 비엔날레 작품 중 ‘봄’ 전시장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림을 보러 온 어떤 스님이 그림의 기가 너무 세어 달래야 한다며 가부좌를 하고 염불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랬더니 주위에 아들 손주가 소원인 할머니, 두루 빌 것이 많은 아주머니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는 전설 따라 삼천리. 사실 어떤 그림은 보고 있으면 강한 기운이 뿜어 나오는 듯하다.

하하…. 어릴 적부터 동네 앞 바다에서 드리는 풍어제나 씻김굿을 많이 보고자란 탓일 거예요. 나도 모르게 그런 색감이나 분위기가 내 그림에 나타난 것이지요. 동양적인 샤머니즘이 내 그림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의 지난 개인전 작품 중 문학에서 원형비평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있다. 사람과 바다고기가 서로 꼬리를 물고 원형으로 돌고 있는 모습은 신화에서 재생의 의미를 되새겨 주는 것이다. 물고문을 당하면서 고향 앞 바다를 떠올렸다는 섬 소년. 그는 고향의 푸른 바다에서 혹독한 세월을 거치며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지금까지 예술가로서 내게 힘이 되는 것은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섬에서 자랐다는 것, 또 하나는 고등학교 때 사서 장학생으로 도서관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때 책을 많이 읽었거든요. 여름 방학 때는 운동장에 책을 말리는 일을 했는데 그 넓은 운동장 책이 전부 내 책이었지요. 공부는 별로 안 했어요. 게을러서. 원래 선생이 되고 싶었는데 예비고사 점수가 별로여서… 하하하..게으른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가 평생의 감동으로 꼽는 소설이 D.H.로렌스의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 그는 평생 이 소설을 세 번 읽었다.

<차탈레이>를 읽기 전에는 정말 영혼이 제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었지요. 이까짓 몸뚱아리가 무슨 소용이 있어. 죽으면 썩을 것. 그저 우리 소중한 영혼을 싸고 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왜 젊을 땐 다들 이상이니 영혼 이런데 넋이 나가잖아요.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이 싹 바뀐 것이지요. 우리 육체란 것이 엄청 아름다운 것이구나, 이건 뭐 미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자는 게 아니지요. 내말 무슨 말인지 아시것소?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거란 말이지.

그는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흔히 <차탈레이 부인의 사랑>을 읽는다고 하면 으흠, 흐흐흐 하면서 묘한 눈길을 보내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이 있지 않은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다시 한번 그 책을 정독하고 싶어 동생한테 부탁을 했더니 동생 역시 영 마뜩치 않은 눈길을 던졌다고 한다.

어쨌거나 다시 한번 진한 감동을 받은 그는 다른 룸메이트들한테 읽어보라고 권했단다. ‘아니 이런 남녀상열지사를!’하던 이들 중에도 결국 ‘알아들은 자’ 있어 ‘역시 담이 형님’ 이라며 다시 한번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는 이야기. 그런데 문학작품 읽고 감동한 이야기인데 왜 내게는 무용담 같게 들리는가?

최근 그는 정음정양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제껏 세상은 양의 세계에 의해 움직여 왔지만 앞으로 도래할 세계는 음의 세계가 지배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원리를 동양적으로 해석해보면 세상변화의 원리는 음양이 어떻게 조화롭게 어울리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 안에는 서로가 견제를 하면서 긴장관계를 갖는 것도 포함되어 물론 있지요. 그런데 이제까지 세상은 양이 우위에 있으며 지배를 했다는 말이거든요. 20세기 전반기는 양이 극대화되었던 시대였지요.

양의 시대가 드세었던 이 시기에는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엄청난 과학문명과 산업화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은 희생되어 갔지요. 산업화가 몰고 온 이해득실이 우선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 이상 어떻게 되지 못할 정도로 심해졌지요. 그리고 20세기는 전쟁이 오죽 많았습니까? 피의 시대였지요. 이제는 음이 기운을 펼칠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야만 돼요. 정음정양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음의 세계란 무엇입니까? 바로 여성성이지요. 디지털의 세계에서 저는 특히 이 여성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제까지 세상에는 여성성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는데 디지털의 세계야말로 드디어 여성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는 공간이란 말이지요.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사이버 공간으로 들어와 남성들이 구축해 놓은 험악한 세상을 부드럽게 만들어 놓을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는 마흔을 옛날에 넘겼으면서도 악동 같은 미소를 곧잘 짓는다. <도청 앞 궐기대회>그림에는 특히 그의 장난기가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시위대는 목청껏 외치고 있건만 구경꾼 아저씨의 손은 옆에 선 처녀의 엉덩이 쪽으로 가고 있고, 자전거 위에 서서 목을 빼고 구경하던 이는 기우뚱 떨어져 엉덩이를 찧는다. 그걸 고소해하는 옆 친구. 등에 업힌 아이가 칭얼대건 말건 구경에 넋이 빠진 애기 엄마, 한몫 잡겠다고 판을 벌이고 앉은 걸인. 홍성담에게 시민은 이런 것이다. 그럼 시민운동은 무엇인가?

시민운동은 목적과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지요. 기본적으로 개인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터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거거든요. 80년대처럼 훈장 같은 교만함으로는 더 이상 안 되지요. 우리는 그때 하늘을 가로지르는 화염병은 아름답다고 하면서 꽃밭의 꽃은 그냥 지나쳐 버렸잖아요.

이제 우리는 역사와 더불어 자기심성의 반성을 해야해요. 민중은 무지렁뱅이 교화의 대상이 아니지요. 뭇 사람들과 더불어 상생하는 것을 배워야하고 정서적 상생 관계를 이루어 내야한다고 생각해요. 시민운동도 이제 경영마인드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시민운동은 호혜시장이거든요. 자본주의 시장은 이해관계가 우선이지만 호혜시장은 손해를 보아도 재미있는 곳이지요.

진압부대의 군화발에 밟히고 찢어질 그림들을 밤새도록 그리면서 보낸 청춘의 나날들은 민중미술가란 이름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고 시대가 어떻게 바뀌어도 사람들은 그 이름을 부를 것이다. ‘아, 홍성담, 민중미술가였잖아.’

글쓴이 : 권은정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 런던통신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영국과 유럽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 특별한 사람, 유명한 사람, 덜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저서로 <젠틀맨 만들기>, 번역서로 줄리언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조아나 트롤로프의 <타인의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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