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8월 2004-08-01   715

[회원마당] 뿌리내린 곳 등지면 희망도 등을 보인다

강원도 사북 권광희 회원

석탄산업과 흥망을 함께한 지역, 지역주민들의 힘겨운 투쟁 끝에 카지노를 유치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강원도 사북은 이젠 그 카지노에 지역의 흥망을 걸고 있다. 삶의 막다른 곳까지 내몰린 사람들이 석탄 하나 믿고 찾아들던 막장,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광부로도 살 수 없게 된 사북엔 지금 어떤 사람들이 남아 있는지, 남은 자들을 지탱하고 있는 끈끈한 희망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떠나지 않아야 지역도 살린다”

사북에 있는 참여연대 회원은 열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 중 가장 연배가 위인 권광희 회원은 1971년 처음 사북에 정착한 후 줄곧 이곳을 지키고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주민 중 한 사람이다. 설비업과 보일러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지금도 ‘사북살리기’에 열정이 가득한 그를 만났다.

큰 매형의 일을 돕기 위해 고향인 전주를 떠나 잠깐 머물 생각으로 사북에 왔던 그였지만, 아예 정착하기로 작정하면서부터 진짜 사북사람이 된 지 오래다. 건재상 일을 하면서 지켜본 1980년 4월의 사북항쟁에서부터, 90년대 석탄사업합리화정책으로 인한 급속한 지역경제 해체 및 환경파괴 위협에 맞선 주민주식회사 설립, 폐광 후 대체산업으로서의 카지노 유치 등 생존을 위한 주민운동에 이르기까지, 사북 현대사의 거센 격랑 속에서 그는 늘 ‘사북사람’으로서 그 험악한 물살에 온몸을 실어 왔다.

“보이는 게 다 산이고 탄광인 데다가 하늘 한번 보려고 해도 얼굴을 높이 들어야 하는 이곳에 처음 왔을 땐, 평야가 시원스레 펼쳐진 고향 전주와 너무 달라서 참 답답했다. 게다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있을 만큼 비 온 뒤엔 검은 탄물이 질척거리는 곳이라 마음까지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곳도 좋은 사람들 만나 정을 붙이니 고향이 되더라. 그 정, 이젠 떼지 못할 것 같다.”

그래도 그 역시 사람이다. 하루가 다르게 떠나가는 사람들 보며 안 힘들었을 리 없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다. 매형 건재상을 인수해 운영하다가 경영위기에 처했을 때 처음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어렵다고 도망치듯 나가면 뒤꼭지가 부끄러울 거 같았다. 다시 일어서자고 다짐하며 고비를 넘겼다. 두 번째 갈등은 아이들 교육 때문이었다. 안식구가 나가자는 걸 겨우 말렸다. 이곳은 아이들 고향인데 고향을 버리고 나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아이들을 외지로 유학 보내는 주변사람들을 보면 99%가 실패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여기서 길을 찾기로 했다. 대신 교육환경이 열악하니까 아이들 공부 잘하는 걸로는 욕심내지 않았다. 공부 잘하는 놈이 사회에서도 일등 하는 건 아니니까, 가족이 함께 살면서 다만 아이들 비뚤어지지 않게 키우자고 맘먹었다.”

다행히 소신껏 ‘고향’에서 키운 연년생 형제는 건강히 자라 줬다. 덕분에 사북을 떠나지 않는 그의 이유도 이전보다 더 명쾌해졌다.

“지역을 위해서 뭐 했다고 내세울 건 없었다. 그러나 지역을 살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는 자부심만은 지키고 싶었다. 뿌리박고 사는 곳은 한 곳이어야 된다. 사북이 나와 아이들이 뿌리를 내리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주민들 결속력이 사북 살릴 희망

사북에 남은 마지막 탄광,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동원탄좌도 올 11월이면 문을 닫는다. 탄광폐쇄가 진행되는 동안 대체산업으로 추진했던 국내 유일의 내국인 출입 카지노 강원랜드의 설립은 사북지역 주민들의 눈물겨운 생존권 투쟁의 성과다. 카지노 유치는 객화차 공장, 관광레저 산업, 국공립대학교, 심지어는 핵폐기물 처리장 등 주민들이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대체산업 유치노력이 좌절되면서 지역을 살리기 위해 주민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극약처방이었다. 하지만 강원랜드가 설립된 지금도 지역의 변화는 더디기만 하다.

“건설공사가 시작되면서 부분적으로 지역이 활기를 되찾고 있지만 아직도 미약하다. 1995년 폐광지역개발지원특별법을 제정할 당시에 요구했던 카지노 수익의 70% 지역환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10%로 축소돼 지역에 별다른 도움이 안 되고 있다. 지역주민의 고용창출도 기대에 못 미친다. 실제로 광부가 다수인 지역주민들은 카지노의 수위자리도 얻기 힘든 게 현실이다.”

카지노 설립의 결과가 아직은 실망스러운 수준이지만, 카지노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그가 경험한 사북 주민들의 열정과 결속력은 남달랐다. 그가 사북에서 발견하는 희망의 원천도 바로 그 열정이다. 강원도지사도 “사북처럼 똘똘 뭉치면 강원도가 발전 안 할 수가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사북 사람들은 느슨한 것 같아도 잘 뭉친다. 선후배 관계도 든든하다. 나도 뜻 있는 동창들이 지역을 위해 봉사하자며 만든 자생단체협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역의 현안이 있으면 이 모임을 통해 일사불란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단단한 결속력이 지역사회의 고유한 특성이 된 것도 지역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막장인생에 폭리는 중간상인이 다 갈취해 가니까 광부들은 인생 자포자기하며 막사는 사람들이 늘었다. 술집과 다방은 넘쳐나고 고생해서 번 돈을 몽땅 탕진하는 사람도 많았다. 분위기는 점점 더 흉흉해졌다. 이러다 보니 뜻 있는 사람들끼리 이건 아니라며 문제제기를 하게 된 거고, 조금씩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서로가 솔선수범하면서 함께 노력하는 전통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다.”

권광희 회원은 폐광지역 문제를 고민할 때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진폐문제, 환경문제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지금도 간혹 그렇지만 예전엔 여기 초등학생들 대부분이 개울물을 새까맣게 그렸다. 이 일대 전체가 탄 먼지와 찌꺼기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 뿐 아니라 지역주민도 진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문제는 지역의 모든 탄광이 다 폐광되기 전에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까다로운 진폐판정 절차와 열악한 요양시설 개선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진폐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면서도 도심의 기름때보다 차라리 탄 먼지가 낫다고 말하는 그는 그래서 사북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한다. 모기 없고 시원한 곳, 이제는 탄먼지 조차 날리지 않는 공기 좋은 사북을 왜 떠나겠냐고 반문하는 그에게서 사북에 대한 애정이 물씬 느껴졌다. 그를 보면서, 희망은 거창하지 않은 소박한 마음에서부터 싹튼다는 일상의 진리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정지인 참여연대 시민참여팀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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