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0년 03월 2010-03-01   1991

아주 특별한 만남_최영동 회원




“완소 참여연대, 열심히 해줘 고마워요”


이경휴 수필가, 참여연대 자원활동가


밖에는 지금
누가 오고 있느냐
흙먼지 자욱한 꽃샘바람
먼 산이 꿈틀거린다…


오늘은 무슨 기별 없을까
온종일 궁금한 삼월
그 미완의 화폭 위에
그리운 이름들을 써놓고
찬연한 부활을 기다려본다.

                                             삼월’ 중에서 임영조




백설이 난분분亂紛紛 했던 지난겨울이었다. 우수雨水 지나 경칩驚蟄이 내일모레건만 바람은 여전히 쌀쌀맞게 우리들의 옷깃을 파고든다.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아니라 가지를 흔들어 뿌리를 깨우는 바람,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한 ‘꽃세움 바람’이라고 희망을 담아 중무장한다. 하지만 체감온도는 한겨울보다 더 심하다고 느끼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이미 남녘 산야엔 매화를 선두로 산수유, 조팝, 목련, 개나리, 제비꽃이 차례를 기다리며 기지개를 켜는데, 서울의 봄은 아득하기만 하다. 도심의 가로수들은 여전히 알전구를 칭칭 감고 밤마다 ‘자체발광’을 하고, 광화문의 세종대왕은 성군의 이미지만 도용당한 채 놀이동산의 구경꾼의 전락해버렸다.

현란한 시각 위주의 정책 속에 민생은 계절 감각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747이 아닌 447(400만 실업, 400조 국가채무, 700조 가계부채)시대요, 공약이었던 120만 개의 일자리는 7만 개뿐이고, 서민은 소득은 줄고 빚은 늘어난 형국이 되어버렸다. 과연 이 땅에 민생의 봄은 오고 있는 것일까.

서초동에 있는 법률사무소 원元을 찾아가던 날은 햇살이 제법 따스했던 오후였다. 그래도 그늘진 곳은 여전히 눈밭이었고 건물을 휘감아 오는 바람 끝에는 칼날이 숨어있었다. 다투어 치솟는 건물마다 간판은 경쟁하듯 자신을 알리기에 급급했다. 공증, 종합법률컨설팅, 법무법인…. 변호사 최영동(43세)회원의 베이스캠프는 그곳에 있었다. 사무실은 하늘공원이나 다름없었고 공원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달려가는 서울의 모습’ 그대로였다.

옅은 분홍빛 Y셔츠에 자잘한 무늬가 있는 감청색 넥타이, 잿빛 정장 차림이 무척 단아했다. 화이트칼라의 전형을 마주하는 듯해 다소 긴장했지만 이내 편안해졌다. 부드럽고 낭랑한 목소리와 맑고 잦은 웃음소리에는 소년티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김포공항 소음피해 집단소송’ 승소로 이끈 작은 거인


회원 가입이 1999년이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은 시간인데도 묵묵히 지원하며 조용히 지켜  보는 그를 제 16차 정기총회(3월 6일)를 앞두고 만났다. 회원 누구나가 참석하는 총회이지만 한동안 뜸한 그의 근황도 궁금했고, 10년 차 회원에 대한 감사의 인사 겸 어렵게 시간을 얻어냈다. 먼저 인사로 총회 참석 여부를 묻자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가입 당시 ‘작은권리찾기 운동본부’(현 민생팀)에서 활동한 그는 참여연대에 폭발적인 힘을 제공한 회원이었다. ‘김포공항 소음피해 집단소송’ 담당 변호사로서 승소를 이끈 장본인이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그 때를 회상하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결코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또한 겸손하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혼자서 한 게 아니고 주변에서 준비를 철저히 해주었지요. 그 때는 사법연수원 2년차였기에 시간도 여유 있었고, 참여연대에서 함께 활동하던 변호사들이 순서를 정해 활동 하다 보니 그 소송을 제가 맡게 되었죠. 당시 박원석 부장(현 협동사무처장)이 치밀하고 빈틈없이 준비를 했죠. 2000년 1월에 소장訴狀을 제출하여 2005년 대법원이 승소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김포공항 소음피해는, 2000년 김포공항 인근 주민 약 120명을 원고로 시작한 집단소송으로 5년 만에 소음피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었다. 이 소송을 위해 소음피해지역에서 현장조사와 주민설명회 6회, 설문조사 등을 진행했으며 소송과정의 자료를 묶은 <김포공항 항공기소음피해 집단소송 백서>도 출간 했다. 이 판결은 국가의 잘못된 환경정책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배상 책임과, 소음피해에 대한 법적 기준 또한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한 결과였다. 이는 참여연대라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사례였다.

이런 집단소송이 참여연대가 최초였나,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는지 답변이 빙그레 미소를 띠며 즉시 나왔다.

“참여연대가 소송하기 전 부천에서 한번 있었는데 패소 판결이 나왔지요. 그때는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언론에 한 줄 오르지도 못하고 사라진 소송이 되어버렸죠. 요즘은 소음 문제를 가지고 소송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거의 60만 명 정도라고 하더군요. 이제는 공공시설의 설치와 관리에 있어 인근 주민의 삶의 질과 환경을 고려한 개발 정책이 필요한 때가 된 셈입니다.”

한 뜸을 들이다 우스개 삼아 독백처럼 내뱉었다. ‘이제 소송의 트랜드가 환경문제가 되었지. 그러나 실제로 친환경적인 소송은 거의 없지’ 서늘한 고백이었다.

녹색성장, 녹색개발, 녹색뉴딜정책 속에 감추어진 토건국가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닐까. 환경마저도 성장을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는 4대강살리기운동 프로젝트처럼.




“법 보다 법을 운영하는 사람의 소양이 중요”

회원 가입 당시 2건의 소송을 맡았다. 승소로 이끈 김포공항소음피해 사건과 비록 패소했지만 검사의 ‘긴급체포’에 관한 소송이 있었다. 문외한이라도 판결의 결과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소송을 연수원 2년차였던 ‘작은거인’은 검사 집단에 용기 있게 칼을 들여대었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라, 두렵지만 그 보다 더 소중한 게 있음을 아는 것이 아닐까.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형사소송법이 개정되어 긴급체포를 하면 그 사실에 대한 일정한 보고를 해야 하고, 어떤 제도상의 절차가 생겼죠. 하지만 대한민국을 상대로 검사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소송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도 일반인들이 이런 문제가 있구나 하는 걸 알게 한 성과였죠.”

때론 사람들은 자조적으로 법을 해석한다. 법이란 기껏해야 지배층의 이익과 안전을 꾀하는 수단이다. 힘 있는 자, 돈 있는 자, 연줄 닿는 자들이 제멋대로 살기 위한 방편의 성격이 짙다고. 이런 이들에게도 이 소송은 한 모금의 감로수였을 것이다.

그는 겸양이 몸에 밴 사람처럼 느껴졌다. 소송 2건 외에 참여연대를 위해 한 별로 없다며 쑥스러워했다. 더구나 최근엔 ‘회비만 열심히 내는 회원’일 뿐이라고 과소평가까지 했다. 하지만 그가 2년 넘게 자원활동을 한 수요 법률 상담은 당시 공익법센터에 횃불을 높이 든 활동이었다. 그 또한 상담을 통해 많은 사람들도 접했고, 후배 변호사나 간사들과의 좋은 만남도 기억에 남는다며,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곳으로 참여연대를 생각합니다. 일을 깔끔하게 잘 처리했던 박원석 씨, 마음이 따뜻했던 안진걸 간사, 이지은 간사 모두 생각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참여연대가 처한 어려움에 대하여 우려하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사회가 과거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고 일을 하니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렵겠어요? 일은 즐겁게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상황이니 안타깝습니다.”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사회적인 분위기를 탓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에 대한 검열을 해보았다. 시민운동의 방향이나 방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또 집단소송이나 정책에 대한 문제 제기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두루 가슴이 답답했다. 전문가답게 명쾌하게 단박에 가르마를 탔다.

“이해관계가 더욱 복잡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도의 변형이나 개선이 쉽지 않고 전문화되어 버렸죠. 뿐만 아니라 예전과 달리 이제 시민운동은 일반화 되어버렸고, 사회는 효율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경쟁을 불러일으키니 자기 자리도 불안하고…. 이런 상황에서도 참여연대는 잘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주례사’ 같은 말씀이지만 잠시 마음이 편해졌다. 내친 김에 이런 상황에서 참여연대가 꼭 해야 할 일들은 어떤 게 있을지, 조언 같은 질문을 드렸다.

“여태껏 잘 찾아서 하고 있잖아요. 그래도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예전에 한번 하다 못 한 일이 있었죠. 참여연대의 힘만으론 역부족이었던 일로 해외 공관에 대한 문제 제기였지요. 해외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참여연대로서는 자료를 찾아내기도 힘들고 참 어려운 감시죠. 해외에 거주하는 자국민에 대한 보호를 국가가 책임을 져야하는데 거의 그러지 못하는 편이죠.”

해외여행객이 1000만이 훌쩍 넘는 시대, 세상 끝까지 뻗어나간 한국인들의 강인한 뿌리는 종종 감탄을 자아내지만 그에 못지않게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최근 우리는 해외에서 일어나는 숱하게 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하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해외공관에서 발 벗고 나서서 자국민을 보호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오죽하면 한인교회에서 적극 나서서 중재하고, 피해자는 인터넷에 호소하고 언론에 고발하며 보호를 요청하는 실정이 아닌가.

“제도는 개선되었어도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일 때는 아무 쓸모가 없는 법안이죠.”

이 보다 더 적절한 지적은 없지 싶다. 사람이 희망이라고 노래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사람이 문제라고 일침을 가하는 수도승도 있다. 이게 세상사이니 어찌 하랴. 얽히고설킨 세상살이가 잘 풀려가는 게 좋은 세상이지 싶다.






“왕성한 활동은 어려워… 회비 열심히 낼게요”

그의 휴대전화의 잦은 벨소리가 자리를 마무리하게 했다. 이미 예정된 시간은 지나고 있었고, 기자회견 하듯 진행된 인터뷰라 모법답안도 다 나온 상태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함께 한 자리라 아쉬움이 컸다.

마지막으로 참여연대에 대한 그의 애정을 확인하고 싶은 질문들을 여럿 했다. 나에게 참여연대는 어떤 존재인가, 아쉬운 점이나 분발할 점이 있으면 어떤 부분인가, 다시 왕성한 활동을 한다면 어떤 분야에 힘을 쏟겠는지, 격려의 말씀까지 부탁하고 나니 마음이 급했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특유의 침착함을 잃지 않고 대답 했다. 간간이 웃음도 흘리면서.

“나에게 참여연대는? 고마운 존재이죠. 내 이름을 걸고 한 소송에서 승소도 했고, 분발할 점보다는 칭찬 할 점이 더 많은 것 같은데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문제제기를 잘 하잖아요. 제가 활동했던 때보다 사회적인 분위기나 여건이 많이 달라졌고 이해관계도 복잡하고 전문화되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을 해주어서 고마워요. 좋은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개인적인 일이 많다보니 다시 왕성하게 활동한다는 건 좀 어렵겠고 대신 회비 열심히 잘 낼 게요. 교회로 치면 십일조 내듯 돈 많이 벌면 더 많이 내고.”

웃음소리가 방 안에 가득했다.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라면서 마무리는 스스로 했다.

“인터뷰 할 내용이 별로 없는 이런 사람도 회원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요.”

웬 생뚱맞은 발언, 마주 보며 다시 한바탕 웃었다. 웃음소리 따라 봄이 성큼 사무실로 들어왔다. 하늘 공원에서 바라본 봄은 흙먼지 속에 아득한데 신축 중인 건물의 타워크레인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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