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호] 서평 4_‘창조적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


서평
‘창조적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

이희영 _ 대구대 사회학과 교수

 

한스 요하스 저, 신진욱 역《행위의 창조성》
 (한울아카데미, 2002)

1. 행위의 창조성 다시 읽기

최근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소위 ‘민주화 20년’ 후의 정권교체를 맞이한 현실이 그것의 구체적인 동력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앞으로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진지해질수록, 손바닥 속에 있다고 여겼던 ‘민주주의’가 빠르게 미끄러져 나가고 있다. 지금까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는 것은 정당 정치의 척박함이다.  

민주화 ‘운동’이 민주적 제도와 질서로 정착되지 못 하고 있는 현실 정치상황에 대한 진단이다. 이와 연관된 보다 중요한 문제는 민주주의적 가치의 부재이다. 개인이 현실 정치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게 되는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라, 상호 비판적 정치활동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행동원리가 공유되지 못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새롭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법제도로 축소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일상으로부터 제도적 차원에까지 이르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소통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민주적 가치는 어떻게 형성될 수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상상할 수 있을까?   

독일 사회학자 한스 요아스(Hans Joas)의 이 책은 이와 연관된 두 가지의 문제, 즉 불확정적이고 불연속적인 역사구성의 발생 원리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과 현대 사회 ‘분화과정의 민주화’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구성을 시도한 야심적인 기획이다. 1992년 독일에서 처음 출간되고 1996년 영어로 번역 출간된 이 책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에 대한 독해를 통해 독일 사회학의 전통이 남긴 유산을 새롭게 구성하는 데 주력해온 요아스 교수의 연구 성과를 결산한 저작 중의 하나이다. 그는 이 저작을 통해 “행위 그 자체가 인간이 세계(世界) 속에 존재하는 양식”이며, 이것의 특성이 창조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행위의 창조성 이론에 기초하여 현대사회의 불확실한 분화과정이 민주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첫 출간으로부터 16년의 시차를 두고 이 책을 다시 읽는 의미는 민주주의적 경로에 대한 어떤 해답을 제공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데 여전히 많은 재해석의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2. 행위와 ‘세계’ 구성의 원리에 대한 재구성
 
저자는 1장에서 사회학 고전이론들 속에서 행위의 창조적 측면이 주변화 되어온 경과를 추적한다. 2장에서는 사회학 이론들의 중심에 위치한 창조성의 은유들을 독창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이를 기초로 3장에서는 합리적 행위모델과 규범적으로 정향된 행위모델 속에 잠재한 세 가지의 암묵적인 가정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행위의 창조성 이론을 구성한다. 여기까지가 막스베버의 합리적 행위이론이 남긴 사회학적 유산들로부터 유럽대륙과 미국의 지적 전통들을 섭렵하면서 그의 행위의 창조성 이론이 구성되는 과정을 치밀하게 보여주는 1부에 해당한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제4장에서 행위의 창조성 이론을 집단적 행위과정을 이해하는 데 적용하고자 시도한다. ‘창조적 민주주의’라고 명명한 이 장의 목적을 저자 스스로 기능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단을 넘어설 수 있는 ‘거시사회학적이론’을 구성하기 위한 것으로 밝힌다(323)는 점에서 내용상 2부로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저자의 물음은 ‘인간의 행위(Handeln)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이다. 이에 대답하기 위해 저자는 파슨즈의 수렴테제(Konvergenzthese)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하여,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 속에 내장된 디오니소스적 특성, 뒤르켐의 종교 이론이 갖는 가능성과 한계를 지적한다. 나아가 근대사회의 합리화와 분화의 경향을 분석하는 준거점으로 ‘창조적인 것(das Schöpferische)’을 이해하고자 했던 짐멜의 시도, 맑스의 혁명 개념에 대한 메를로-퐁티와 한나 아렌트의 이해(198), 그리고 데카르트적 의심의 유의미성에 대한 의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는 실용주의 철학 속에서 행위의 창조성에 대한 다양한 은유들을 읽어내고 있다.
이와 같은 저자의 해석학적 사유는 결국 합리적 행위를 출발점으로 하는 모든 행위이론들이 비합리적 행위라는 하나의 대립상을 생산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실용주의 철학에서 발전된 “창조성” 관념의 유용한 측면과 표현적 인간학의 전통에 기초하여 “인간행위의 창조성”이라는 상을 그려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나아가고 있다(247).

저자의 행위의 창조성 이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행위의 의도성에 대한 비목적론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목적을 설정하는 행위’가 ‘행위’에 선행한다는 “인간 행위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의 다양한 변이들이 갖는 공통점은 그 행위이론 속에 데카르트적인 자아-세계, 정신-육체의 구분을 반복하는 것”(261)이라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목적의 설정은 행위가 일어나기 이전의 정신적 작용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 속에서 이미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전-성찰적 행위 지향에 대한 성찰의 결과이다. 인간의 행위는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구성적으로 상황에 연관된다. 이와 같은 행위는 필연적으로 계획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며, 설사 계획된 행위라 해도 구체적인 행위의 전개는 상황의 변화에 따라 구성적으로 산출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외적 현실을 향한 한 개인의 총체적인 태도를 조율”하는 인간 행위의 창조성이 자리하게 된다. 이러한 능력은 단순히 주어진 것으로 간주되는 자명한 행위능력이 아니라 그 실현을 위해서 수많은 전제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하는 잠재적인 능력이다(275). 나아가 저자는 인간의 창조적 행위가 육체적 체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육체에 대한 통제를 상실함으로써 발생하는 웃음과 울음에 대한 헬무트 플레스너의 탁월한 연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우리는 웃거나 울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메를로-퐁티의 상호육체성(intercorporéité)을 통해 인간의 모든 체험이 우리 육체의 체험과 타인의 육체의 체험 사이에 기초하고 있음을 역설함으로써 정신으로부터 분리된 육체라는 이분법, 즉 육체에 대한 도구주의적 관점을 해체한다. 또한 본원적 사회성을 행위 구성의  원리로 하는 저자의 행위의 창조성 이론은 사회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개인’들을 출발점으로 삼는 철학적 전통을 비판한다. 저자는 하버마스의 지적처럼 언어 등과 같이 항상 이미 전제되어 있으며 암시적 또는 명시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배경지식과 집단적 질서가 ‘개인적’ 행위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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