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사회연구소 칼럼(ip) 2011-01-18   5558

[칼럼] 장하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➁

장하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 기업 ,소유, 권력 그리고 시민경제

1. 주주 자본주의론, “그들” 대 장하준


나에게 thing1에 이어 23가지를 엮고 있는 또 하나의 중심생각이 뭐냐고 묻는다면 서슴치 않고 thing2를 골라 잡겠다. 장하준은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를 <23가지>의 우두머리로 내세운 데 이어 thing 2에서 그 못지 않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꺼집어 내고 있다. thing 2는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 thing2 또한  thing1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와 한 패가 되어 자유시장주의를 화들짝 놀라게 할 주장이며 “그들”과의 공방에서 진검 승부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좋은 기업”이 될 수 있나, GM에 좋은 것이 미국에도 좋은가, 삼성에 좋은 것이 한국에도 좋은가, 삼성에 좋은 것이 한국이라는 나라경제와 한국인 다수대중에도 좋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는 참으로 중요한, 경제의 기본 문제다. 동시에 앞 글에서 말했듯이 순수한 경제는 없고 경제 안에 정치가 있는 만큼 thing2 경제 문제는 동시에 정치문제이기도 하다. thing2 및 관련 things에서 장하준은 기세등등해 보이던 미국 자본주의가 망가졌고, 이를 따라가던 세계 다른 나라들도 길을 잃게 된 근본 이유를 소유론의 각도에서 해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대안 자본주의의 소유론적, 경영론적 기초도 제시한다.


“그들”은 말한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들이다. 기업은 주주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어야 한다. 주주는 고정수입이 없고 다른 이해당사자들이 부담하지 않는 위험을 진다. 그래서 주주는 기업실적을 극대화하는 동기가 강하다. 또 그래서 주주를 위한 경영을 하면 기업이윤도 극대화되고 기업의 사회적 기여도 극대화된다.


참 환상적인 이야기다. 주주가치 경영을 하면 만사형통이다. 사익을 추구하면 저절로 공익이 실현된다는 저 “보이지 않는 손” 의 마법을 소유론의 측면에서 바꾸어 풀어놓은 것과 같다. 정말 이렇게만 된다면 경제 유토피아가 따로 없겠다. 그런데 장하준은 이 환상적인 주주자본주의 유토피아론, 신성한 주주 주권론을 잭 웰치의 말을 빌어 ‘세상에서 가장 바보같은 아이디어’로 시궁창에 쳐박는다. 사실 확인부터 하는데, 주주들의 압박과 이에 부화뇌동한 전문경영자의 ‘비신성동맹’의 결과 미국은 분배, 복지는 물론 지속적 성장에도 실패했다. 그래서 거품 띄우기와 부채 키우기로 이를 만회할 수작을 하다가 2008년 대실패를 자초한 것이다. 세계경제 패권국의 위상이 기울게 된 것도 이 “바보같은 아이디어”탓이 아주 크다. 그러면 왜 주주주권론의 장미빛 유토피아가 음울한 디스토피아로 변했을까.


장하준은 말한다:  주주가 위험부담을 가장 많이 지고, 그래서 기업의 장기적 실적에 제일 관심이 높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주주들이야말로 기업의 이해당사자들중에서 가장 쉽게 손을 뗄 수 있고 ,기업의 장기전망에 가장 관심이 없는 집단이다. 그래서 주주가치극대화는 해당기업의 장기적 성장 잠재력을 훼손하고 경제전체도 망치는 것이다. 유한책임이라는 제도혁신 자체가 유례없는 물질적 진보를 가능케 한 이면에 그만큼 주주가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제공했다.


내가 읽기에 thing2는 thing1에 비해 훨씬 명쾌하고 설득력이 높다. 물론 주주자본주의론에 대한 장하준의 비판은 그의 독창물이라고는 할수 없다. 장교수도 언급한 라조닉 등, 이미 많은 선행 연구들이 축적돼 있다. 그러나 장하준이 이를 <23가지>를 엮는 머리 생각으로 올려 놓고 설득력있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이후라는 시점도 중요하다. 그러나 thing1에 이어 thing2에 대해서도 나는 불만이 있다. 장하준이 논의를 끝까지 밀고 가지 않고 중도반절에 그칠 뿐 아니라, 소유문제의 중요한 대목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thing2에서 제기된 기본문제, 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2.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것(1) :  다시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장하준은 무엇을 말하지 않았나. 그가 제기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결판을 짓지 않고 끝냈다. 장하준은 “주주들이 법적으로는 기업의 주인일지는 몰라도”라든가,“ 주주들이 기업의 법적 소유주이기는 하지만”이라고 말한다. 법적으로는 주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니라는 이야기같기도 하다. 또 thing2의 결론부분에서는 “ 부동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불공평할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라는 말도 한다. 그래서 장하준은 주주주권론의 문제점을 효율성만은 아니고 공평성 관점에서 보고 있기는 하다. 노동자나 납품업체 등 주주이외의 다른 이해당사자들의 이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걸 보면 이해당사자 기업론을 갖고 있는 것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중도반절로 멈쳐 있다. 또 법적이라고 하지만, 주주가 소유자임을 너무 쉽게 인정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장하준은 “기업의 주인은 주주다“라는 ”그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논박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대로라면 “그들”은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면 효율성- 이 개념도 여전히 문제다- 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한발 물러서면서도 여전히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 주인이 자기 소유물(기업)을 잘못 사용한다 해도 극단적으로는 남이 참견하고 간섭할 일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장하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시장자유주의는 여전히 기업에 대한 주주의 소유권, 나아가 사적 소유권을 ‘하늘이 내린’ 자연권으로 주장할 것이다. thing1에서처럼 thing2에서도 “그들”과 장하준의 공방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렇다면 주주자본주의론을 넘어서는 대안 기업론은 무엇인가. 장하준에 따르면 기업의 이해당사자들중에는 주주처럼 가장 쉽게 빠져나가 기업의 장기적 가치 생산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집단이 있는가하면, 노동자나 납품업체처럼 기업의 장기적 생존과 성장에 헌신하는 집단이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을 장하준처럼 중도반절 논의로 그칠게 아니라 소유론의 문제로 밀고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소득과 부에 대한 권리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적 기여 또는 기능에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 기여에서 유리된 ‘기능없는 소유’(functionless property)에 우선권을 주어서는 안된다. 이는 홉하우스, 토오니(R.H.Tawney), 크로스랜드 등의 영국 진보주의자에서 유래하는 기능적 소유론으로서 나는 이를 이어받아 시민경제 소유론 또는 이해당사자 소유론으로 바꾸어 부르고 싶다. 그 핵심은 소유와 가치생산에 대한 헌신(commitment)간의 상호성(reciprocity) 원리에 있다. 참여하고 위험을 공유하고 헌신해야 소유에 대한 권리도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전 글에서 정치란 참여하고 구성하는 것이며 시민경제란 이 정치를 내장한 경제라는 말을 한바 있는데, 기능적 소유론은 시민경제론의 소유론적 번역이라 해도 좋다. 이처럼 상호성 원리에 입각한  기능적 소유론에 설 때 비로소 경영자, 투자자만이 아니라 노동자, 납품업자 들도 이해당사자로서 실질적 권리지분(stake)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영국 진보주의자들의 기능적 소유론은 스웨덴 사민주의자들의 기능사회주의론과 매우 친화적이며, 이들이 소유권을 배타적,독점적인 것이 아니라 ‘권리의 다발’로 보는 생각과도 친화적이다.(필자의 다음 글 참조, “양극화의 함정과 민주화의 깨어진 약속”, <시민과 세계>,7호,2005, p.49 ).


3.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것(2) :  기업권력, 재벌권력


그런데 기업을 둘러싼 소유 문제는 결코 주주자본주의론을 비판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Thing2에서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된다”는 말은 소유문제의 절반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형식적, 법적 소유권과 실질적 소유권 또는 통제권을 구분하게 되면 기업의 이해당사자와 동시에 “기업 그 자체”를 만나게 된다. 이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경우든(미국) 그렇지 않든(한국), 법인기업 그 자체가 거대권력으로 출현한 ‘법인자본주의’, ‘법인자유주의'( corporate liberalism), 또는 “코포크라시”(corpocracy)( 찰스 더버, <히든파워>,두리미디어)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강도귀족’(Robber Baron)으로 불리기도 했던 미국의 록펠러, 카네기나 한국의 삼성, 현대과 같은 재벌집단은 뛰어난 조직능력을 갖고 높은 성장 성과를 내는 기업”제도“일뿐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거대자본 ”권력“체다. 그런데 장하준은 thing2에서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단지 유한책임제도와 경영자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거대한 물질적 진보가 성취될수 있었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thing1의 후반부에서 “시장은 1달러당 1표원칙에 따라 작동“한다고 말해 시장에서 돈이 지배함을 지적하긴 했지만, 이는 소유문제를 매우 단순화시킨 것이다.

사실 이런 결함은 단지 장하준에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광의의 케인지언 흐름에 속하는 멘큐는 물론이고 심지어 스티글리츠 같은 석학에도 나타난다. 필자는 스티글리cm의 경제학원론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그의 경제학에서 기업 권력,자본 권력의 형체는 매우 흐릿하다. (필자의 글, “스티글리츠의 제도경제학과 포스트워싱턴 컨센서스”,<경제와 사회>, 58,2003 참조). 케인지언과는  또 다른 흐름으로 슘페터, 챈들러, 암스덴(그녀는 한국을 주제로 한 ‘아시아의 다음 거인‘이라는 명저로 유명하다)같은 학자들의 경우에도 재벌권력, 대기업 집단이 얼마나 골치아픈 문제의 덩어리인지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이들 케인지언, 슘페터리언들은 기업권력, 자본권력, 계급구조 문제를 이론의 핵심 구조에서 주제화하지 않으며, 그것이 경제시스템과 나라정책 전반을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하고 대기업과 부자들에 유리하게 파당적으로 만드는지 잘 보지 않는다.
그러나 소수 경영자가 무책임하게 통제권을 행사하는 대기업과 재벌 집단은 1달러당 1표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1달러 1표는 오히려 양반이라 할 정도다. 나아가 재벌 권력의 문제는 미시적인 ‘기업지배구조’(  영어로는 governance structutre로 ‘통치구조’가 적절한 번역어인데 이상하게 ‘지배구조’라는 번역어가 통용되고 있다)의 문제를 넘어 나라경제 전체의 거시적 지배구조, 심지어 ‘정치지배구조‘를 쥐락펴락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업권력 자체”에 시선을 돌리면, 장하준이 멋들어지게 이름부친 ‘비신성동맹‘이란 것도 단지 주주와 경영자라는 “인격적” 주체간의 동맹이상으로 구조화된 익명적 권력체제의 동맹, 금융권력체제와 산업권력체제가 얽히고 설킨 지배권력 “체제”들로 나타날 것이다.시장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와 유연화를 극도로 보장하는 과두제적 계급지배“체제“로 파악되어야 한다.(유철규,”신자유주의“,<현대마르크스 경제학의 쟁점들>, 서울대출판부).


재벌 권력, 기업권력이 역사적으로 보여왔고 지금도 나라안팎에서 부리고 있는 횡포와 무책임성, 비민주성에 대해서는 굳이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김용철 변호사가 쓴,2010년 또 하나의 베스트 셀러 <삼성을 말한다>로 미룬다. 공교롭게 <23가지>와 <삼성을 말한다>가 나란히 베스트셀러가 되어 ’경제시민’이 공부하기 딱 좋게 됐다. 이와 함께 <한국사회 삼성을 묻는다>(조돈문 이병천 송원근편) , <히든 파워>(찰스 더버), <기업권력의 시대>(마이클 페렐먼)등을 읽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는 말한다. 소유와 소유주의 문제는 단지 주주 무책임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선출되지 않은 소수 경영자의 특권과 그 실질적 통제권하에 놓인 기업권력, 재벌권력 자체의 무책임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 고삐풀린 무책임 특권권력의 ”사적 소유권“에 어떻게 이해당사자에 대한 책임과 사회적 책임 규율을 부과할 것인가.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개발독재 유산이 중첩된 삼성공화국이라는 고도의 무책임특권 권력체제에 민주적, 시민적 규율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삼성에 좋은 것이 민주공화국과 시민 대중에도 좋게 할 것인가. 이에 응답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유시장주의적 공사이분론을 깨트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기업을 단지 사적인,사인들간의 계약물이 아니라 공적 제도, 사회공동체안의 시민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애당초 법인기업에 대해 자연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인기업을 공동체안의 시민적 구성원,즉 ”시민기업“으로 자리잡게 하여 민주적 자기통치권이  그 ‘사유재산권’에 우선되게 해야 한다.( 로버트 다알, <경제민주주의>, 인간사랑; 필자의 글, ” 삼성과 한국 민주주의“, <한국사회 삼성을 묻는다>, 후마니타스 수록 ).그리하여 공장의 입구에서 멈춰 반신불수가 된 인민주권이 공장안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기능적 소유론에 이어,시장자유주의 공사이분론을 넘어서는 시민경제 소유론의 제 2원리다.(이후 우리는 다시 복지국가와 관련하여, 복지국가의 시민정치원리, 즉 ”복지와 참여의 상호성 윈리“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장하준은 기업권력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주주권론을 “세상에서 가장 바보같은 아이디어”로 내동댕이쳤고 나아가 복지국가에 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말을 하다 말았고 중요한 대목을 빠트렸다. 복지국가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몸부림이 압축성장기 이래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괴물”같은 재벌 권력과 그들의 ‘자본 파업’( 새뮤얼 보울스외,< 자본주의 이해하기>, 후마니타스, 2009,p. 653)에 의해 얼마나 심각하게 상처입고 봉쇄당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thing2는 물론 <23가지> 전체에서도, 나아가 그의 경제학 전체를 통해서도 좀처럼 읽기 어렵다. 이는 그의 경제학 전체의 무게가 걸려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경제학에는 단지 제도만이 아니라 지배권력의 실존, 이 권력을 민주적,시민적 구성원으로 자리잡게 할 소유론의 원리 문제, 그리고 대자본의 권력에 발전 규율 및 민주적 규율을 부과함으로써 어떻게 경제성장과 사회경제적 진보가 동행할수 있을지의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빈곤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멀리갈 것없이 <23가지>가 대기업권력, 재벌권력과 복지국가를 정합적으로 설명해야 할 과제를 갖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병천|강원대 교수·경제학/<시민과 세계> 공동 편집인


* 이 글은 프레시안 1월 17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이병천 교수는 참여사회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시민과 세계>의 공동편집인을 맡고 있습니다.

첨부파일: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