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사무처 2000-02-20   745

KBO 앞에서… 어느 책장수의 독백

“선수협의회가 결성되면 프로야구 안 하겠다!”

아무래도 낯선 말이 아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 같다.

“노조가 결성되면 회사도 망해!”

그래 이 말이었어! 어쩜! 이리 똑 같을 수가!

“나 역사책을 들고 나왔어요”

노조가 결성되면 기업 문을 닫겠다던 저 산업화시대, 개발연도의 고색창연한 기업주의 말이 오늘, 화려한 팡파레 속에 개막된 21세기 새 천년의 벽두부터 우리의 귀를 느닷없이 간지럽힌다. 지난 세기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제 레퍼토리는 뻔하다. 협박과 회유, 선수간의 이간질, 흑색선전, 양비론, 공동운명체론, …. 노조를 만들려고 했던 노동자들이 결국 노동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듯이, 이제 적지 않은 야구선수들이 운동장을 떠나게 될 것이다. 아니 저들은 반드시 떠나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두고 보라. 내 장담한다. 이런 걸 두고 ‘시대착오’라고 하면 지나치게 점잖은 표현일까?

시합개시 직전 권투선수가 애국가를 봉창해야 만 되는 나라, IMF 위기를 건져낸 게 골프선수로 칭송되는 나라, 한국인 메이저리거 찬호박이 외환위기의 암울함 속에서 국민적 희망과 영웅으로 간주되는 나라, 이런 나라에서 프로야구 선수는 하나의 공인公人으로 간주된다. 누가 공인의 진퇴를 결정할 권한이 있는가? KBO인가? 아니, 국민이 결정한다. 야구팬만이 그라운드로부터 선수의 퇴장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럼 KBO가 야구팬의 이익을 도모하는 단체인가? 아니다. 오히려 구단주들의, 재벌들 편에 선 단체이다. 그러니 KBO는 당연히 선수의 진퇴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 KBO는 선수협 결성하는 야구선수들을 자르지 마라! 절대 자를 수 없으니 자중하라!

“나 헌법, 대법전을 들고 나왔어요!”

더욱 가관인 것은 미국과 일본의 예를 들면서 선수협 결성을 시기상조로 비난하는 KBO의 태도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이 모양인가 보다. KBO에 의하면 민주주의의 역사가 50년밖에 되질 않아 국민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주기에는 시기상조이다.

아! 어쩜 지난 세기 군사독재자들의 논리와 이리도 똑같은지! 배울걸 배워야지. 무덤 속의 박정희가 벌떡 일어날 일이다. 시대가 변했으니 이젠 좀 세련되게 하면 안되나? 이런 이들에게 ‘결사의 자유’라는 헌법 조문을 들이대는 게 가당키나 할지. 우리의 선량을 보면서 느꼈던 절망감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나 국어사전을 들고 나왔어요!”

이젠 절망을 넘어서 웃어보자. 이른바 ‘불순세력의 배후조종’론. 아니 음모론이 프로야구계까지 잠식했다니! 정말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자기에게 불리하면 음모와 배후조종으로 몰아 부치는 능란함이란. 인터넷과 멀티미디어가 발전했다고 하더니 정말 사회통합을 이뤄내는가 보다. 정치권과 프로야구계가 이렇게 유착되어 있는지 몰랐다. 하긴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하니까. 선수협의회와 시민단체간의 유착설이야 이미 나왔으니까 그렇다 치고, 그렇다면 왜 지역감정을 악질적으로 격화시키고 있는 일부 정치권과 KBO의 유착설은 안나오나? 하긴 시민운동단체도 ‘운동’하는 단체고 프로야구 선수도 ‘운동’선수니까 전부 운동권이랄 수 있지. 맞아! 쟤들은 다 한 통속이야!

“나 퀴즈책, 상식백과사전을 들고 나왔어요!”

KBO에 의하면, 선수협의회 결성으로 프로야구의 혼란이, 이는 나아가 전체 스포츠의 혼란으로, 종국에는 한국 스포츠 전체의 공멸로 가고야 말 이 엄중한 사태는 기업과 구단으로서는 반드시 막아야할 일이다. 이 역사적 사명의식은 단지 스포츠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막아야 할 일이다. 그런데 협의회는 커녕, 노조마저 굳건한 미국 스포츠, 일본 스포츠는 왜 아직도 살아 남아 있는 걸까? 아니 그런 나라 왜 체제붕괴가 없는 거지? 정말로 이상하다, 이상해! 시민들의 낙천, 낙선운동을 ‘음모론’으로, 선수협의회를 ‘시기상조’로 바라보는 한 정치인과 구단주들은 영원히 풀지 못할 ‘퀴즈책’을 들고 다녀야 하는 건 아닐까?

이재명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