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6-05-18   630

<경제프리즘>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전경련의 상속세 개편 주장에 대한 비판

‘경영권 신수설’과 ‘천부 경영권론’

“우리나라를 세운 선조들이 정치적 힘의 세습을 거부했듯이 오늘 우리는 경제적 힘의 세습을 거부한다” 1935년 미국의 루즈벨트(Roosevelt) 대통령이 누진 유산세 개정법과 관련하여 의회에서 행한 연설문의 한 구절이다.

만약 어느 한 사람이 권력과 재력을 갖춘 부모밑에서 태어났다는 우연이 개인적 차원의 행운으로 끝나지 않고, 그 권력을 행사하는 정당성의 유일무이한 근거로 작용한다면 그 사회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권력과 신분이 세습되던 중세시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구시대의 낡은 논리가 재벌에 의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재연되고 있다.

재벌 그룹을 경영할 수 있는 자격은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아니라 핏줄에 따라 결정되고 이는 결코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다는 ‘경영권신수설(經營權神授說)’과 ‘천부경영권론(天賦經營權論)’이 그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러한 논리를 전파하는 것은 재계의 ‘돌격부대’ 전경련의 몫이다. 지난주 말 전경련이 기자들을 상대로 과도한 상속세부담이 기업경영 의욕을 저하시킨다면서 상속세제 개편을 주장하자 일부 언론이 ‘받아쓰기’ 하듯 이에 대한 기사와 칼럼을 쏟아내고 있다.

상속세 높다고 투자 기피하면 ‘배임죄’에 해당

재계의 주장의 핵심은 경영권 상속에 대한 세율이 너무 높아 기업의욕이 감소 하고 따라서 변칙 증여에 대한 유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불행하게도 이러한 재계의 주장은 대단히 근거가 빈약하다.

어느 교수의 지적처럼 “모름지기 사람이란 장차 자기가 죽은 뒤 자식이 낼 세금보다는 당장 자기가 낼 세금을 더 염려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 할지라도 자신의 인생과 자식의 인생을 동일시하여 경제적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증여세를 걱정하여 투자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설사 재계의 주장처럼 진정으로 유망한 사업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속세를 걱정하여 투자를 소홀히 하는 최고 경영자(CEO)가 있다면 그는 자신에게 경영권한을 위탁한 주주에 대해 충실의무를 위반한 배임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율의 상속세율로 인해 기업의 투자 의욕이 감퇴되고 기업 규모 확대를 위한 노력이 부진하게 된다는 것은 상속세 인하의 논거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논리는 상속세가 아니라 고율의 소득세에 대해 고전적으로 제기되는 논점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논란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소득세 낮춰달라’고 국민에게 사정할 배포는 없나?

필자는 처음부터 재벌 2.3세들에게 ‘상속세를 폐지하겠다’는 부시 행정부에 맞서 이러한 정부 조치는 사회적 형평성을 훼손하며 자녀들을 부모 의존적으로 만드는 폐해가 있으므로 일반시민보다도 앞장서서 이 계획을 반대하는 미국의 부호들이 보여준 연대의식과 사회적 책임감을 요구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에게 전경련을 방패막이 삼아 여론의 동향을 살필 것이 아니라 국민을 상대로 ‘내가 시장에서 나의 능력으로 경영권 행사에 요구되는 지분을 매입하고 싶은데 소득세가 너무 높아 그럴 수 없다.

그러니 상속세가 아니라 소득세 최고 세율이라도 좀 내려달라’라고 설득하는 ‘배포’쯤은 기대하고 싶다. 자신의 힘으로 지분을 살 능력도, 국민들을 설득할 정치력도 없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자신들만이 기업의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필자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변칙증여의 유혹 받을 만큼 많은 세금 내본 재벌은 없다

재계가 상속제도의 개편의 동기로 꼽는 변칙증여의 유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재벌들이 언제 한번 변칙증여의 유인이라도 느껴볼 만큼 부담스러운 액수의 상속 증여세를 내본 적이 있던가. 세금없는 부의 대물림의 ‘고전적’ 사례라 할 수 있는 삼성 이재용씨의 사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다.

참여연대가 지난 4월 발표한 38개 재벌총수일가의 주식거래 보고서를 보라. 이 보고서에는 현행 상속증여세법의 허점을 이용하여 주력 계열사들이 총수 자녀들이 지분을 갖고 있는 관련 회사에게 ‘몰아주기 거래’를 통해 그 가치를 키움으로써 사실상 총수의 자녀들에게 우회 증여하는 각종 사례들이 나와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재벌들은 지금 상속세율이 높다고 불만을 토로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얼마나 법을 지켰는가를 자문하고 국민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태도를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재벌들도 이러한 여론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가 이러한 주장을 펼치는 것은 아마 삼성과 현대라는 국내 재벌그룹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형사소송에서 다소나마 정상참작의 논리를 마련해보려는 궁여지책의 소산으로 보인다.

‘재산권’과 ‘경영권’을 구별하지 못하는 전경련의 후진성

상속세제를 개편해야 한다는 전경련의 주장의 핵심은 특히 경영권 상속을 용이하게 하고 경영권 안정을 위하여 상속세제개편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재산권과 경영권을 구별하지 못하는 전경련의 후진적 시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산권은 법이 정한 세금을 내면 당연히 2ㆍ3세에게 상속할 수 있는 권리이다. 반면 경영권은 주주와 이해당사자 등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이므로, 결코 ‘상속’의 대상이 아니다.

경영능력은 대물림되지 않는다

즉 재벌의 경영권 승계는 ‘상속’의 문제가 아니라 주주의 위임 또는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지배구조의 문제인 것이다. 또한 경영능력은 특별한 제약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분의 양도와 달리 대물림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만약 재벌총수의 자식들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그 기업집단의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다(혹은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 전경련이 주장하는 것이라면, 전경련은 재벌 체제를 지키기 위해 공정경쟁을 통한 효율성의 증진이라는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질식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한국경제 못 맡겨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사회의 비판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황제경영’을 옹호하는 전경련을 보면서 이들이 진정으로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인지 아니면, 아니면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는 따로 있다’라는 전근대적 가치인지 헛갈린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지난 30년 동안 재벌들이 맹신해온 두 개의 이론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요 다른 하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믿음이다. 대마불사의 신화는 ‘IMF 외환위기’라는 큰 사회적 비용을 들이고나서야 우리 사회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관념은 살아남아 여전히 우리사회를 맴돌고 있다. 시장경제와 공정 경쟁을 거부하고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다고 믿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경영능력에 대한 검증도 없이 국가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기업집단의 경영권을 맡길 때 이것은 그 기업(집단)과 국민경제에게는 물론 재벌 3세 개인에게도 IMF 경제환란 이상의 고통을 안겨줄 수도 있다. 이것이 재벌체제 개혁이 필요한 이유이다.

최한수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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