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6-11-13   1454

<안국동窓> 은행나무의 가을인사

이른 봄, 몽롱하게 노란꽃을 피운 산수유는 가지마다 빨간 열매를 잔뜩 매달고 겨울을 맞이하려 합니다. 아직은 푸른 잎들이 무성한 모습이지만 곧 갈색으로 말라서 이윽고 모두 이울 것입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눈이 내리면 하얀 눈 사이로 산수유 열매의 빨간 색이 더욱 도드라질 것입니다. 산수유 열매는 새들의 훌륭한 겨울양식입니다. 새들은 가지마다 잔뜩 매달린 산수유 열매를 쪼아 먹으며 또 다시 추운 겨울을 힘겹게 넘길 것입니다.

참새도, 까치도, 비둘기도, 그리고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 함께 살고 있으나 내가 아직 그 이름을 모르는 또 다른 두어 종의 새들도 모두 산수유 열매를 나눠 먹을 것입니다. 충분한 양식은 아니겠지만, 그들은 골고루 나눠 먹으며 또 다시 무서운 겨울을 부지런히 넘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수유 열매를 쪼아 먹으며 그 씨앗을 여기저기 퍼트려서 산수유 나무의 번식에도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자연은 거대한 공생과 공존의 체계입니다. 나무가 많은 우리 아파트 단지에서도 이런 사실을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갑니다. 나무마다 색을 바꾸며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실 단풍은 나무가 생명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나무의 변화가 아니라 우주적 변화가 나무의 삶에 반영된 것입니다. 지구의 공전에 따라 북반구가 햇빛을 받는 시간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북반구의 나무는 광합성을 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햇빛을 충분히 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 나무는 잠시 생명활동을 멈추고 우주의 운행에 몸을 맡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몇 달이 지나면 어느 날엔가 다시 따뜻한 햇살이 나무를 어루만져서 나무는 긴 잠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 생명활동을 멈췄냐는 듯이 모든 나무의 가지마다 여린 새잎들이 움터 나오고, 조만간 나무 전체가 푸른 잎으로 뒤덮여 이 세상에는 다시 생명의 힘이 흘러 넘치게 되는 것이지요. 철마다 모습을 바꾸는 나무를 보며 우리는 우주의 운행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시간을 알고 갈 곳을 알았던 행복한 시대는 오래 전에 사라졌어도, 우리는 아직 나무를 보며 우주의 운행을 알 수 있는 행복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막한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무만 나무가 아니고 우리도 우주의 운행에서 벗어나서 살아갈 수 없는 한 그루 나무입니다. 나무는 서로 기대어 살아가야 합니다. 서로 다른 여러 나무들이 어우러져 숲을 이룹니다. 우리도 나무이니 나무처럼 어우러져 살아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일제와 독재를 거치며 막강한 힘을 기른 기득권세력은 그 막강한 힘을 이용해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진보와 개혁을 외치며 정권을 잡은 정치세력은 이러한 기득권세력과의 타협을 통해 정권재창출을 꾀하다가 자멸의 구렁텅이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투기꾼들과 개발꾼들이 설쳐대며 집이며 땅이며 가리지 않고 마구 독식하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투기로 말미암은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투기에 나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이 사회 전체가 그야말로 ‘투기사회’라고 부를 법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경제성장을 추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이러한 파괴행위를 방조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예 조장해왔습니다. 기득권세력은 이 사회를 더욱 더 승자독식의 승냥이사회로 만들면서도 ‘보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파괴행위를 미화하고 있습니다.

노랗게 물들어 겨울잠을 준비하는 은행나무에게 부끄러운 가을입니다. 은행나무는 올해도 이른 봄부터 부지런히 생명활동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겨울을 맞으려 합니다. 은행나무의 아름다운 가을인사는 우리가 우주적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우쳐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비천하고 삭막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도 깨우쳐줍니다. 부디 은행나무가 벌레를 쫓듯 투기꾼과 개발꾼을 없앨 수 있기를.

홍성태 (상지대 교수,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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