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6-12-01   688

[로스쿨 지지자의 편지⑨] “12년 동안 우리는 멈추어 있었습니다”

열린우리당 유기홍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

법률가 양성 및 선발제도의 개혁을 위해 지난 10년간 논의되었으며, 2003년부터 운영된 사법개혁위원회에서 마침내 도입하기로 결정했던 로스쿨 제도임에도, 현재 국회에서 관련 법률안의 심의가 완전히 중단된 상태입니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국회의원들에게 로스쿨 제도 도입에 필요한 법안을 조속히 심의하여 법률가 양성 및 선발제도를 개혁하는데 동참할 것을 설득하기로 하여 15일부터 ‘로스쿨 지지자의 편지’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아홉 번째 편지는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교수의 “12년 동안 우리는 멈추어 있었습니다” 입니다.

열린우리당 유기홍 의원께,

안녕하세요? 경상북도 포항의 한동대학교 법학부에서 헌법과 법사회학을 가르치는 이국운 교수입니다.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수고가 많으시다 들었습니다.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하단 말씀 먼저 드립니다.

오늘 저는 시급한 현안인 로스쿨 문제에 관하여 몇 가지 당부를 드리고자 합니다.

얼마 전 수업시간에 저는 화들짝 놀라는 경험을 했습니다. ‘전(前)근대와 근대의 구분하는 역사적 사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많은 학생들이 ‘인터넷의 출현’이라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구태의연하게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들먹이려던 저의 수업계획은 완전히 뒤틀려 버렸습니다. 저의 근대(近代)가 학생들에겐 고대(古代)로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수업시간 내내 불편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속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때로는 받아들이기 싫고 인정하기 어렵지만, 지금 이 시대를 이끌고 있는 화두는 ‘변화’요 또 ‘그 변화의 속도’입니다. 인터넷과 IMF 구제금융이 동시에 날아들었던 1997년 이후 한국사회가 변화해 온 과정을 되짚어 보면 이것처럼 명백한 진실은 없습니다.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는 개인이나 집단은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은 몰락하는 것이 엄정한 현실의 법칙입니다. 재야통일운동의 이론가에서 집권여당의 국회의원으로 입신한 유 의원의 정치적 성장도 시대의 속도를 따라잡은 성공사례가 아니겠습니까?

로스쿨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제가 가슴이 아픈 건 바로 ‘속도’라는 화두 때문입니다. 처음 이 이야기가 시작된 1995년 이후 우리 사회는 12년 가깝도록 제자리 뛰기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정권이 세 번 교체되도록 바뀐 것은 ‘세계화추진위원회’(1995)-‘새교육공동체위원회’(1998)-‘사법개혁추진위원회’(2000)-‘사법개혁위원회’(2003)-‘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2005)로 이어져 온 추진 주체의 간판들 뿐 입니다. 사법시험합격자수가 천 명으로 증가한 것 이외에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명문대학들은 여전히 극심한 고시열풍에 휩싸여 있고, 최근에는 사법연수원마저 그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로스쿨 문제에 관한 한, 우리 사회는 아직도 ‘속도’라는 화두에서 저만치 비껴나 있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우리는 ‘정지’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남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까지 들기도 합니다. 1995년 이후 미국의 주요 로스쿨들은 외국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하여 이들을 미국변호사로 변신시키는 작업을 경쟁적으로 추진해 왔습니다. 그 때문에 오늘날 서울 한 복판에서도 다양한 국적의 미국변호사들을 흔히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미국식 글로벌 자본주의의 첨병을 양성하는 이 프로젝트에 맞서서 같은 기간 일본과 중국이 법률가집단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실제적인 개혁을 진행시켜 온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특히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출범한 일본의 로스쿨체제가 실상 우리의 로스쿨 개혁논의에서 자극받은 것이란 점에 이르면, 그저 허탈하고 안타까운 생각만 들 뿐 입니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저는 지난 12년 동안 로스쿨 논의를 이끌어 온 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로스쿨 문제를 포함한 사법개혁 전체가 근본적으로 정치문제요 입법문제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사법서비스의 공급자들인 법률가들에게 개혁논의의 주도권을 맡겼던 것이 패착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애초부터 이 일은 대법원이나 법무부에 미룰 것이 아니라 국회와 정당들이 중심이 되어 ‘정치적’으로 토론하고 ‘입법적’으로 추진했어야 옳았습니다.

사개위와 사개추위의 논의가 진행되는 중에라도 국회의원들 스스로 사법의 백년대계를 짜고 로스쿨의 득실을 따져 보았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아무런 권한도 없는 제가 유 의원을 설득하는 모습이 아니라, 유 의원께서 로스쿨 문제에 관한 총대를 메고 저를 설득하는 모습이 연출되었어야만 했습니다. 그랬다면 얼마나 번듯하고 멋졌겠습니까?

거의 12년 동안 시간을 끌다가 우리 법률가집단이 로스쿨 문제에 관해 겨우 내놓은 결론을 유 의원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로스쿨 전체의 총 입학정원을 규제함으로써 정원제사법시험제도의 틀을 유지하겠다는 일종의 ‘관제특혜분양 로스쿨체제’가 그 내용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의 기득권은 내놓지 않은 채 사법개혁의 외양만 덮어쓰겠다는 제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부가 제출한 로스쿨 법안이 국회에서 1년 넘게 방치되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사법서비스의 소비자들을 대변하는 국회의 관점에서 정부의 로스쿨 법안은 사법개혁의 이름으로 포장하기엔 너무도 부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 드리건대, 정부의 로스쿨 법안이 불만스럽다고 해서, 국회까지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와 ‘그 변화의 속도’가 화두인 세상에서 12년이면 이미 너무 오래 ‘정지’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팔을 걷어 부치고 국회가 로스쿨 문제의 전면에 나서야만 합니다. 각 정치세력들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라고 하고, ‘정치적’이고 ‘입법적’으로 문제를 결말지을 때입니다. 정부를 통해 법률가집단이 내놓은 법안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법안일 뿐입니다. 사법서비스의 소비자들, 즉 평범한 일반 시민들을 대변하는 국회로서는 보다 전향적이고 창의적으로 합당한 수정안들을 만들어가는 것이 당연한 권한이자 책무입니다. 헌법이 선언하듯이(제40조) 입법의 주도권은 국회와 국회의원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잘 아시듯이, 정부의 로스쿨 법안에 대해서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된 반대의견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로스쿨체제는 우리의 법체계에 맞지 않으니 시행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로스쿨체제는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방식으로 법조기득권을 강화할 뿐이니 그 시행에 신중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이하에서는 이에 관해 제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두서없는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우선 첫 번째 견해에 관하여는 주로 법률가-국회의원들에 의하여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솔직히 그 주장은 지난 12년 동안 법률가집단 내부의 토론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여정부에서도 사개위와 사개추위를 통해 충분히 제기되고 반박되고 절충되고 수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똑같은 논의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말 그대로 허송세월이 될 뿐 입니다. 불쾌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그야말로 법률가집단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시간 끌기거나 반대를 위한 반대로 비쳐질 수 있을 따름 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히려 두 번째 견해입니다. 로스쿨 체제가 법률가집단 전체의 기득권층화를 부추겨 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사법접근권(司法接近權)을 침해하게 된다면, 민주적 법치국가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로스쿨법안에 담긴 총입학정원의 규제를 폐지하고 처음부터 완전한 변호사자격시험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총입학정원이 규제되는 한, 현재의 법률가양성제도가 양산하는 각종 병폐들은 그대로 로스쿨체제에 전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법률가들의 특권의식은 여전하고, 명문대학의 고시학원화도 계속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폐습을 끊고 진정으로 사법을 개혁하기 원한다면, 법률가양성은 기본적으로 시장에 맡긴다는 원칙에서 흔들리면 안 됩니다.

물론 총입학정원의 규제를 폐지한다고 해서, 곧바로 위와 같은 우려가 불식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취약계층, 소외계층의 법학도에 대한 장학지원제도가 마련되어야 하고, 상대적으로 어려운 지방의 로스쿨에 대한 배려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국제법무에 특화하여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미국변호사들과 맞서겠다는 로스쿨이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공익법학과정으로 메이저로스쿨들과 경쟁하겠다는 로스쿨 등에 대해서는 합리적 지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난한 집 출신의 법학도도 실력 있는 변호사가 되어 신자유주의의 첨병들과 맞짱을 뜰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그런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여기서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12년동안 사법시험-사법연수원 제도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끼며 로스쿨 제도의 도입이 검토되어 왔고, 이제 그것이 법률가집단의 논의를 넘어 국회의 책임이 되었는데, 국회마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현 사법시험-사법연수원 제도의 문제점을 극복하는데는 스스로 부족함을 안고 있는 정부제출 로스쿨 법률안이 그대로 통과되는 것도 염려됩니다. 법률가의 입장이 아닌 국민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아니 바라보아야 할 국회가 정부제출 법률안의 문제점과 미흡한 점을 최대한 수정해서, 기왕이면 더욱 바람직한 로스쿨 제도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국회와 국회의원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 최악의 시나리오는 정반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미 12년을 허비한 까닭에 ‘시간’이 없다는 점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 강건하시길 빌겠습니다.

11월 30일

이국운 드림

⑧ “로스쿨은 바로 우리 교육의 문제입니다”

⑦ “국회, ‘변호사기득권보호위원회’의 악명을 씻어주십시오”

⑥ “로스쿨에서의 교육, 그 변화를 상상해 보십시오”

⑤ “로스쿨 반대 이유, 이의있습니다”

④ “획일적인 사법연수원 교육, 이제 수명을 다했습니다”

③ “전태일이라면 로스쿨 도입에 동의했을 것”

② “세상은 왜 로스쿨을 원할까요”

① “일본 로스쿨,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이국운(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한동대 법학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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