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연대이야기 기타(od) 2007-12-31   2087

<통인동窓> 자기기인(自欺欺人)의 해를 보내며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자기기인(自欺欺人)’을 선정했다. ‘스스로 속이고 남을 속인다’는 뜻이니, 한마디로 ‘거짓이 넘쳐흐르는 세상’을 개탄하는 말이다. 작년에는 ‘밀운불우(密雲不雨)’, 즉 ‘구름이 잔뜩 끼었으나 비는 내리지 않는다’를 선정했는데, 결국 자기기인의 비가 쏟아진 셈이다. 어쩌다가 우리는 자기기인의 세상에서 살게 되었을까?

도둑놈이 도둑질한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렸을 뿐이라고 거짓말하고, 투기꾼이 투기가 아니라 투자를 했을 뿐이라고 거짓말하고, 탈세범이 탈세가 아니라 절세를 했을 뿐이라고 거짓말한다. 어찌나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는지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신문의 인터뷰에서도 거짓말하고, 텔레비전에 나와서도 거짓말한다. 재벌과 정치인은 당연히 거짓말하는 존재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재벌과 정치의 결합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국회(18%), 행정부(33%)는 말할 것도 없고 법원에 대한 신뢰도 겨우 48% 수준이다. ‘대한민국 거짓말 상’이라도 만들어서 시상식을 해야 할 것 같다.

자기기인의 세상은 속이는 자가 판치는 세상이지만 속는 자의 문제도 사실 결코 적지 않다. ‘스스로 속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신을 속이는 것뿐만 아니라 뻔히 속이는 줄 알면서 속아주는 것이기도 하다. ‘남을 속인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남을 속이는 것뿐만 아니라 뻔히 속이는 것에 속아줘서 남들도 속아주도록 부추기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자기기인의 세상은 ‘거대한 거짓말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세상이다.

자기기인의 세상은 오랜 독재를 통해 강력히 형성된 ‘이중질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사실 ‘이중질서’ 자체는 어느 사회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한편에는 겉으로 드러난 공식 질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속으로 감추어진 비공식 질서가 있다. 사회의 발전 정도는 두 질서 사이의 거리로 살펴볼 수 있다. 두 질서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예컨대 법이 있어도 올바로 작동하지 않을수록, 그 사회는 후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재체제는 단순한 무법체제가 아니라 합법을 가장한 무법체제이다. 독재체제에서는 독재자의 권력이 법보다 우선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독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경쟁을 벌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 법보다 연줄이 더 중요하다는 지혜를 체득하게 된다. 그리고 체득한 지혜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이승만에서 노태우까지 이어진 44년 독재체제를 통해 굳혀진 ‘이중질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중질서’의 문제를 고치기 어려운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세력이 ‘이중질서’의 문제를 주도하는 세력이기 때문이다. 재벌과 권력이 그것이다. 이들은 온갖 거짓말로 ‘이중질서’를 계속 유지하며 시민들을 자신들에게 굴복시키고자 한다. 둘째, 대다수 사람이 ‘이중질서’를 개혁하기보다는 그것에 적응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 실리를 최대화하기 위해 경제적 행위양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두가지 이유는 사회의 합리적 구성과 운영을 추구하는 시민운동의 근원적 제약요인을 이룬다.

법을 잘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지키도록 하는 것은 더욱더 중요하다. 애써서 법을 만들었어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결국 법을 우습게 여기게 될 것이며, 나아가 아예 법을 믿지 않게 될 것이다. 국회, 행정부, 법원에 대한 낙제점에도 한참 못 미치는 낮은 신뢰도는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우리는 후진적 ‘이중질서’ 사회의 상태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잃어버린 10년’을 목놓아 외치는 부패세력의 발호와 함께 이 문제는 더욱 더 악화되고 말 것이다.

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서 ‘악법’을 법이라고 우기며 지키도록 강요하는 것은 그 자체로 법의 필요 자체를 부정하게 하는 잘못이다. 엉터리 법을 시민들에게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것이다. ‘독재보안법’인 ‘국가보안법’은 그 대표적인 예이지만, 반인권적 ‘악법’의 문제는 여러 곳에서 쉽게 확인된다. 법을 잘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법을 잘 만들어야 하며, 재벌과 권력부터 철저히 법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자기기인의 세상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속이는 것이 뻔할 때는 속아주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혁보다는 적응이 확실히 경제적이다. 그러나 비가 새는 집 안에서 언제까지나 비가 새지 않는 곳을 찾아다니며 살 수는 없다. 결국 속아주지 않고 속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새해는 바야흐로 ‘토건망국’을 향해 치달리는 위기의 한 해가 될 판이다. ‘토건망국’을 막기 위해서도 안타까운 자기기인의 세상을 직시하자.
 

홍성태 (상지대 교수, 참여연대 부집행위원장)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