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활동✨100 1994-2014 2014-12-31   1930

[080]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 – “광장을 열어라! 민주주의를 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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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광장조례개정 서울시민캠페인단 발족 및 서명시작 기자회견을 서울광장에서 열었다.

┃ 배경과 문제의식 ┃

열린 광장은 민주주의와 소통의 상징이다. 하지만 2008년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이후 이명박 정부는 ‘광장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경찰은 도심에서 열리는 대규모 집회를 공공연히 금지했고, 촛불 1주년 기념집회에서는 참가자 수십 명을 연행하기도 했다. 급기야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슬픔에 빠진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려하자 무려 15일간 경찰버스로 서울광장을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시민들의 통행권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 집회시위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조치였다.

서울시 역시 광장에서 추모제를 열겠다는 시민추모위원회의 요구를 행정안전부로 떠넘기며 결국 허용하지 않았다. 서울시는 그동안 ‘서울특별시 서울광장의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이하 서울광장사용조례)’를 근거로 시민단체나 정당의 광장사용 신청을 선별적으로 허가해왔다. 또한 국정감사를 통해 2009년 서울광장 사용의 60% 가량을 서울시와 중앙정부가 관변 행사를 위해 사용해 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광장사용을 허가제로 운영하는 것은 집회에 대한 허가제를 금지한 헌법 21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으로, 하위법인 조례가 헌법을 위반하는 형국이었다. 이에 참여연대는 민주주의에서 광장의 역할, 특히 한국사회에서 서울광장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헌법이 보장하는 시민들의 기본권을 되찾고자 했다.

참여연대는 1인 시위, 기자회견, 손해배상소송, 헌법소원 등을 통해 경찰의 공권력 남용을 비판하고 누구라도 자유롭게 광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조례를 개정하는 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당시 제7대 서울시의회의는 90% 이상이 한나라당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어 의원발의는 불가능했고 주민발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야당과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광장조례개정캠페인단’이 꾸려졌고, 본격적인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주민발의로 제출된 개정조례안

내용

기존조례

개정조례안

사용신청

허가제(허가 신청)

신고제(신고수리접수)

사용목적

시민의 여가선용 및 문화생활

여가선용 및 문화생활은 물론 헌 법에서 보장된 집회와 다양한 공 익적 행사를 개최할 수 있도록 함

사용허용판단

시장 및 서울시 재량

시민위원회를 설치해 시민의견을 반영토록 함

사용허용변경

‘부득이한 사유’로만 명시

‘부득이한 사유’를 시민의 생명 등 에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으로 구체화, 시민위원회의 의견을 반 영하도록 함

사용자 차별금지

없음

연령, 성별, 장애, 정치적 이념, 종 교 등을 이유로 광장사용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도록 함

┃ 주요 활동 경과 ┃

주민발의로 조례를 바꾸려면 6개월 동안 19세 이상 서울특별시 시민 1/10(당시기준 8만 958명)의 서명이 필요했다. 특히 이 서명은 단순히 이름만 적는 것이 아니라 서울시 시민임을 증명할 수 있도록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까지 완벽하게 기입해야 했다. 서명캠페인도 아무나 할 수 없었다. 수임인으로 사전에 등록된 사람만이 서명을 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의 동참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선 수임인을 모집했다. 놀랍게도 일주일 만에 천 명이 넘는 시민들이 수임인으로 등록했다. 워낙 서명이 까다롭다 보니 수임인들을 위한 안내도 필요했다. 참여연대는 두 차례에 걸쳐 수임인 설명회를 개최하고, 수임인 한 명 한 명에게 수임인 등록증과 서명용지를 발송했다. 담당부서였던 행정감시센터는 대학생 인턴들과 함께 서명을 받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대규모 집회는 물론이고 대학가, 야구장, 교회, 절,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개최한 바자회,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분향소 등 가리지 않고 좌판을 깔고 서명을 받았다. 시민들은 거리서명에 동참하기도 했고, 서명용지를 우편으로 보내오기도 했다.

민주주의에서 광장의 의미와 주민참여를 통한 조례개정운동의 의미를 알리는데도 힘을 쏟았다. 참여사회연구소와 함께 ‘서울광장 조례계정의 헌법적 근거와 민주주의’ 토론회를 개최했고, 오마이뉴스와 공동으로 언론 기획을 진행하기도 했다. 온라인 서명운동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뉴스레터 ‘광장을 찾는 사람들’을 발송해 운동의 진행과정을 알렸고, 언론기고를 기획해 ‘민주적 광장’에 대한 담론을 이어나갔다.

서울시와 경찰의 위헌적인 행태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대응했다. 2009년 7월 20일 민변(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함께 서울시장의 서울광장 사용불허처분과 경찰의 서울광장 차벽봉쇄에 대해 헌법소원과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는 동안 서울에 또 하나의 광장이 태어났다. 미 대사관 앞에 만들어진 광화문광장은 서울광장 조례에 대한 시민들의 문제제기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와 서울지방경찰청의 이중허가를 받아야 사용할 수 있었다. 참여연대는 문화연대 등과 함께 광화문광장 개장일에 맞춰 광장에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기자회견을 진행했고, 그 과정에서 10여 명이 강제 연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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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참여연대 상근자들이 서울시민의 발 지하철에서 서울광장조례개정 청원서명을 받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추모제까지 많은 시민들이 참여했지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서명운동의 동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한여름 무더위도 더해갔고, 시간이 갈수록 언론과 시민들의 관심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서명마감이 100일 앞으로 다가온 9월 10일, 2만 8천여 명이 서명한 상황이었다. 수임인들을 비롯해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시민들은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서명운동을 펼치기도 했고, 지역별로 모여 어떻게 하면 서명을 더 많이 받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서명 마감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목표치의 반밖에 차지 않았다. 참여연대 상근자 전원은 나머지 기간 동안 다른 업무를 접고 지하철, 대학가 등에서 서명운동을 진행하기로 결의했다. 한편으로는 서울에 사는 회원 전원에게 서명용지 5장과 반송봉투를 함께 보내고 서명 요청 전화를 드리기로 했다.

그 외에도 서울시의원들에게 조례개정에 대한 찬반입장 여부와 의원발의를 요청하는 질의서를 발송하고, 12월 11일부터 13일까지 스노보드 대회가 열린 광화문광장에서 거리서명을 진행하기도 했다. 시민들에겐 1인 시위도 허용되지 않는 광장에서 기업이 주최하는 스노보드 대회가 열린다는 것에 분노한 시민들은 서명에 적극 동참했다. 마감 하루 전인 12월 18일, 서명이 담긴 우편물이 쏟아졌고, 서명을 직접 전달하려는 시민들로 참여연대는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기적처럼 목표치를 훌쩍 넘어선 10만 명의 서명이 모였다. (※ 서울시가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을 일일이 검토해 발표한 유효서명은 85,072명이다.)

그런데 10만 장이 넘는 서명용지를 주소별로 분류해 상자에 담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모여든 수많은 회원, 자원활동가들이 3일에 걸쳐 서명용지를 구와 동별로 분류해 상자에 담았고, 시민들은 서명용지가 담긴 상자를 이고 지고 서울시청을 향했다.

그러나 주민발의만 성공하면 끝날 줄 알았던 서울광장 조례개정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서울시의회는 주민발의로 제출된 개정안을 상정하지 않았고, 캠페인단은 주민발의를 무시한 서울시장, 구청장, 서울시의원 출마자 6인에 대한 명단공개와 낙선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야당 의원들이 대거 당선됐고, 자동 폐기되었던 개정안은 당선된 79명의 민주당 의원 전원 발의로 되살아나 본회의를 통과한다. 하지만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오세훈은 본회의를 통과한 조례안이 시장의 권한을 침범했다며 재의를 요구했고, 서울시의회에서 재가결된 개정안에 대해서도 공포를 거부했다. 2010년 9월 27일 허광태 제8대 서울시의회 의장이 개정안을 공포했지만 오 시장은 끝내 무효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또 한 해를 넘긴 2011년 6월 30일, 헌법재판소는 참여연대가 제기한 경찰의 서울광장 차벽봉쇄에 대한 헌법소원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다. 또한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에 참패한 오 시장이 사퇴하면서 새 시장이 된 박원순이 12월 21일 대법원에 계류중이던 조례 무효 소송을 취하하면서 광장을 진짜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한 서울광장 조례개정운동의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 성과와 의미 ┃

광장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시작한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은 시민참여의 강력한 힘을 확인시켜주었다. 1천여 명이 넘는 서명운동원(수임인)들은 지역에서, 모임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 등에서 서명운동을 펼쳤다.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인 정보를 기꺼이 적어준 10만 명의 서울 시민들이 있었다. 서명용지 분류작업부터 서울시의회를 대상으로 한 공익로비활동까지 시민들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서울시장, 서울시의회 선거에서 광장을 열자는 호소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주민발의를 무시한 후보자들을 표로 심판한 유권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시민들의 참여가 없었다면 서울광장은 여전히 관변광장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또한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은 정당과 시민단체간의 협력을 통해 성공을 이끌어낸 모범적인 사례로 평가받을만하다. 캠페인단의 일원으로 최선을 다한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의 지역 조직들의 분투는 정말 높이 살만한 일이다. 참여연대는 그동안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현실가능한 방법론을 제시했고 시들해져가는 서명운동에 다시 불을 지폈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서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지하철 서명 같은 헌신적인 방식을 강구하여 막판 서명운동 열기를 고조시켜낸 것, 곳곳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시민네트워크와 협력해 바닥에서 서명운동을 확산해낸 것 등은 분명 참여연대의 공로다.

한편, 주민발의제도가 갖고 있는 문제점들이 그대로 드러난 계기가 되었다. 주민발의제도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핵심제도라 불리는 ‘주민참여제도’의 하나로, 주민들의 의사를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도입됐다. 그러나 까다로운 시행요건, 지자체의 비협조적인 태도, 주민을 무시하는 지역의회의 태도 등은 개선되지 않고 이번에도 반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은 광장이 권력자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것이며, 닫힌 광장은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광장의 주인들이 직접 나서서 되찾아 왔다는 점에서 단순히 조례를 바꾸는 운동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후퇴를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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