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활동✨100 1994-2014 2014-12-31   15614

[013] 2000년 총선시민연대 활동 – 유권자들과 함께 만들어 낸 선거혁명

시민의신문에서 출판한 화보집 ‘4·13 유권자 혁명’의 표지

2000년 총선시민연대의 활동 사진들을 모아 시민의신문에서 출판한 화보집 ‘4·13 유권자 혁명’의 표지.

┃ 배경과 문제의식 ┃

1997년부터 시작된 IMF 경제위기로 국민들은 사상 초유의 대량실업과 소득감소, 빈부격차 심화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위기의 가장 일차적 책임이 있는 정치권은 개혁의 주체가 되기는커녕 ‘뇌사국회’니 ‘식물국회’니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당시 국회는 기소되거나 소환된 의원들의 면책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연중 개회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의안을 다룬 시간은 1999년의 경우, 8월 31일까지 모두 84시간 43분에 지나지 않았다.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과 분노는 커져만 갔고, 낡고 부패한 정치에 대한 변화의 요구는 높아갔다.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이후 선거 관련 사회운동이 본격화됐는데, 80년대까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온 민중진영은 진보정당 창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모색한 반면, 90년대 이후 활성화된 시민운동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공명선거 감시, 후보자 검증, 정책 캠페인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시민단체의 활동은 1991년과 1995년 지방선거, 1996년 총선, 1997년 대선에서 국민적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선거에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시민운동 내부에서 선거 시기의 운동이 후보자에 대한 직접적인 의사를 표시하지 않는 한 효과적일 수 없다는 평가가 확산되고 있었다.

낙천낙선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은 1999년 국정감사이다. 1999년 40개 시민단체들은 국정감사(이하 국감)를 모니터하기 위해 ‘국감시민연대’를 결성하고, 전문 분야별로 모니터팀을 구성해 14개 상임위 국감 현장에 모니터 요원을 파견하고 상위(best)-하위(worst) 의원을 선정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14개 상임위 중 9개 상임위가 “시민단체가 국회의원들의 평점을 매기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방청을 불허했고, 2개 상임위는 부분적으로만 방청을 허용했다. 당시 국민들의 95%가 국감에 대한 시민모니터의 필요성에 동의했지만 국회는 고압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고, 시민단체들의 의회 감시에 불쾌감을 표시하거나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국감 막바지로 갈수록 개별 의원 평가보다는 정치권과 시민사회간의 참정권을 둘러싼 대립의 성격이 명확해졌고, 국감모니터에 참가한 단체들 내에서 의회감시의 결과를 선거의 당락과 연결시키는 유권자운동, 즉 낙천낙선운동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 주요 활동 경과 ┃

1999년 12월 17일, 낙천낙선운동 제안을 공식화한 첫 토론회 ‘2000년 총선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를 개최한 이후 낙천낙선 운동에 대한 토론회, 시민사회단체 대표자 회의, 전국 시민사회단체 간담회 등이 열렸고, 2000년 1월 12일 2000년총선시민연대(이하 총선연대) 발족까지 무려 412개 이상의 단체들이 전국적으로 동참했다.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었다.

그런데 당시 선거법은 시민단체가 선거에서 후보자에 대해 지지, 반대의 의사표시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를 근거로 정치권과 보수언론은 낙천낙선운동이 불법이라는 공격을 해왔다. 심지어 일부 정치권에서는 낙천낙선운동이 정치권에 대한 테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총선연대가 국민여론조사를 통해 확인한 낙천낙선운동 지지율은 79.8%. 현행 선거법상 불법이라 할지라도 감행해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이 운동을 불법행위로 매도하려던 정치권의 시도가 무색해지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렇듯 낙천낙선운동은 총선연대가 발족하기도 전부터 이미 쟁점이 되어 있었다. 발족을 준비하는 단계부터 총선연대의 주요 임원들은 ‘불복종 운동 전개’, ‘구속 불사’의 입장을 피력했는데 사실 당시 총선연대에겐 불복종 운동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국회는 국민여론에 밀려 선거법을 개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하지만 여야는 표면적으로는 시민단체의 선거참여를 허용하지만 기자회견, 회원에 대한 홍보, 유권자 1대 1인 전화, 단체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이용한 의견제시 이외에 집회, 피켓이나 플래카드 게시, 유인물 배포, 서명이나 광고 등 시민단체가 주로 사용하는 캠페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모두 금지하는 개정 선거법을 통과시켰다. 결국 총선연대는 개정 선거법 조항에 대해서 최소한의 불복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낙천낙선 운동 이후 총선연대 지도부 7명 등 다수의 활동가가 최대 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총선연대 활동은 크게 세 개의 국면으로 진행되었다. 총선연대가 발족한 1월 12일부터 2월 2일 낙천명단 발표 때까지 쟁점을 형성해나가는 국면이었고, 2월 2일부터 낙선명단을 발표하는 4월 3일까지 정치개혁캠페인 기간, 마지막으로 4월 13일 투표일까지가 집중 낙선운동 기간이었다.

먼저 총선연대는 공천반대자 선정 기준을 확정하기 위한 과정에 돌입했다. ‘공천반대자 기준’에 대한 국민여론조사를 진행했고, 수차례의 내부 토론을 거쳐 부패, 선거법 위반 전력, 민주헌정질서 파괴 및 반인권 전력을 우선 적용하되, 의정활동의 성실성, 법안 및 정책에 대한 태도, 정치인의 기본자질을 의심할 만한 반의회적·반유권자적 행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기로 했다. 이들 선정기준은 2000년 당시 정치부패와 변하지 않은 낡은 정치에 대한 강력한 비판여론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 2000총선시민연대와 한길리서치가 2000년 1월 8일~9일에 걸쳐 실시한 낙선운동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민단체가 부패 무능 정치인에 대해 공천반대 및 낙선운동을 펼치는 것에 응답자의 79.8% 찬성, 지역구의 지지후보가 부패 무능 정치인이라고 발표할 때 49.6%가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의사를 밝힘.)

낙천낙선 대상자 선정을 위해 3개월여 간 총 1500명에 달하는 인사자료를 조사했는데, 국회 의정활동 기록부터 개별 정치인에 대한 언론자료, 판례 등 법률문헌, 단행본, 시민사회단체 의정활동 모니터 보고서 일체, 정치인 소명자료, 수 백 건의 제보 자료 등을 수집·검토했다. 총선연대는 명단 선정의 절차적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한 시도로 명단 발표 직전에 ‘유권자 100인위원회’를 열었다. 지역과 세대, 계층을 고려해 구성한 위원들은 낙천대상자를 결정할 권한은 없었지만, 주요한 인물들의 선정여부를 토론해 대표자회의에 권고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받아 균형감을 더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00년 1월 24일, 1차로 15대 국회 전현직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한 66명의 공천반대자 명단을 발표하고, 2월 2일 2차로 원외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46명의 공천반대자 명단을 발표했다. 낙천명단 발표 후 각 정당에 민주적 공천을 위한 10가지 제안을 보내고, 이들의 상당수가 공천을 받은 상황에서 부적격 인사에 대한 공천철회 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총선연대는 낙천운동을 위해 공천무효확인소송과 공천효력정지가처분신청(정당의 당원 및 대의원을 대상으로 소송원고인단 모집)을 고안해냈는데, 소송의 근거는 정당법 상 “정당공천은 지역당부 대의기관의 민주적 추천절차를 거칠 것”이라는 규정을 위배한 것이므로 위법적인 밀실 낙하산 공천이라는 논리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소송을 제기하기로 한 뒤 시민들에게 밀실공천철회 서명을 받고, 소송을 위한 원고인단 모집을 위한 가두 캠페인 등을 벌였지만, 끝내 원고로 참여할 지역구 당원을 모집하는데 실패해 소송까지 가지는 못했다.

각 당의 공천이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선거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대표단은 1주일간 마산, 대구, 부산, 광주, 전주, 청주, 대전 등 주요 지역 버스투어를 하면서 정치개혁의 의지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총선연대가 선정한 부패정치인, 지역감정 선동 정치인을 찍지 않겠다”는 내용의 ‘유권자약속 227만표 모으기’ 서명운동을 제안했다. 227만명은 당시 총선 유권자의 10%에 해당하는 인원이다. 총선연대가 ‘리스트 발표’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질적인 낙선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드디어 4월 3일, 총선연대는 낙선대상자 86명의 명단(낙천 대상자 중 공천된 64명에 22명 추가)을 발표하고, 이 중 다선중진 현역의원 22명을 집중낙선대상자로 선정해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을 비롯한 총선연대 지도부들이 지역구로 내려가 일대일 낙선운동을 벌일 것을 천명했다. 중앙 총선연대와 광역·기초 협의체가 입체적으로 낙선운동을 진행하자는 구상이었다. 또 젊은 층의 투표를 낙선운동의 관건으로 보아 대학로 청년 페스티벌과 연예인 사인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했고, 정치개혁과 사법개혁의 과제 등 시민사회단체 공동의 과제를 수록한 정책자료집을 발간·배포했다. 총선연대 발족 이후에도 지역과 부문단체, 종교계가 지속적으로 결합하여 최종적으로는 총선시민연대 중앙 및 지역조직에 총 971개의 단체(총선연대 백서)가 함께했다.

┃ 성과와 의미 ┃

낙천낙선운동 결과 총 112명의 공천반대자중 58명이 공천에서 탈락했고 공천철회 운동 과정에서 박준규 국회의장 등 전,현직 의원 10명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공천된 인사를 포함한 86명의 낙선대상자 중 68.6%(59명)가 낙선했다. 특히 수도권 낙선대상자 20명중 19명을 낙선시켰고, 집중낙선대상자 22명중 15명을 낙선시켰다(중부권 : 78.3%(23명 중 18명), 호남권 : 75.0%(8명 중 6명), 영남권 : 45.7%(35명 중 16명)). 수도권 낙선율이 95%에 달했고, 집중 낙선대상자가 대폭 낙마한 것은 놀라운 결과였다.

낙천낙선운동 제안서가 준비되던 때만 해도, 국민들의 지지가 있을 것은 예상했지만 낙선낙천운동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선거법 87조가 시민단체의 선거참여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낙천낙선운동을 추진하는 단체의 대표는 형사처벌을 각오해야 했고, ‘법대로!’를 외쳐온 시민단체가 앞장서서 불법을 저지른다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낙천낙선운동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12월 초에 헌법재판소는 선거법 87조를 ‘합헌’이라고 판결한 터였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해 시민단체들과 재야 법조인들은 전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위헌적·반인권적 조항이라고 반박했지만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시민사회단체들이 낙천낙선운동을 강행하고 결과적으로도 성공하게 된 이유는 비록 불법 운동으로 매도당하고 구속까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변화를 모르는 정치권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가장 주목할 것은 이 운동으로 유권자들이 자신의 힘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시민의 힘으로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와 희망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총선연대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힘이 되었다. 특히 유권자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정치권에 대해 시민사회가 개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계 또한 분명했다. 가장 근본적인 한계는 낙선운동의 불가피한 특성상 개별 후보자의 낙선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보다 구조적인 정치개혁은 낙천낙선운동으로 변화된 환경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다. 낙선운동과 정치개혁에 대한 압도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57.2%로 역대 최저수준을 기록한 것은 낡고 부패한 정치권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있겠지만 젊은 유권자 층이 ‘대안부재’ 상황에서 선거에 불참한 결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이다. 영남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낙선운동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영남 지역에서는 오히려 지역감정이 강화되어 주요 낙선대상이 된 한나라당 후보가 단 한 사람도 탈락하지 않았다. 이 역시 사실상 영남당과 호남당이 확연히 구분된 정치지형에서 대안적 정당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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