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활동✨100 1994-2014 2014-12-31   1456

[093] 시민과 대통령을 잇는 핫라인 «개혁통신»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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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개혁통신>을 모아 2000년 1월에는 단행본으로 펴냈다.

┃ 배경과 문제의식 ┃

1998년 2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수개월 전에 닥친 IMF경제위기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이 경제위기는 정치, 사회 등 국가 전반을 개혁할 절호의 시기이기도 했다. 새 정부의 출범초기가 개혁조치를 취할 적절한 시기이기 때문에 개혁에 대한 국민의 기대도 높은 편이었다.

그런데 집권 첫해부터 김대중 정부의 개혁정책은 희미해지거나 지체되었다. 1960년대 이후 권력을 장악했던 독재정권, 그들과 손잡은 김영삼 정부와 대척점에 있었던 김대중 정부였기에 개혁을 바라던 국민들은 조금씩 실망하고 있었다. 참여연대도 마찬가지였다. 참여연대는 개혁이 지체되는 원인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대통령에게 국민들의 요구가 전달되지 못하고 비서실, 측근 등에 의해 어디선가 막혀있어서 그런 것일 수 있다고 보고, ‘시민과 대통령을 잇는 핫라인’을 만들어 보겠다고 계획했다.

언론매체를 통해 국민의 생각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요구를 전달할 수도 있지만, 간접적으로 전달되는 데서 오는 한계가 있었다. ‘하이텔’이니 ‘천리안’같은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던 PC통신시대였고, 다양한 언론매체가 존재하지 않아서, 여론은 몇 개 신문이나 공영방송사를 통하지 않으면 전달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만큼 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여론과 구체적인 주장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기회가 부족했다. 운좋게 몇 줄 정도로 짧게 요약되어 언론기사로 전해져도 부족함과 갈증은 여전했다. 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참여연대는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상대방이 있는 만큼 메시지도 더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말처럼 대통령에게 시민의 쓴소리가 전달된다면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물론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고, 또 전달되더라도 수용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직접 대통령에게 국민의 목소리를 전하려는 우리의 생각까지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 주요 활동 경과 ┃

‘시민과 대통령을 잇는 핫라인’을 표방한 대통령에게 공개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이 편지형식의 글모음에 <개혁통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새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가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를 개혁하기를 바라는 당시 사회의 열망을 반영한 이름이었다. 이 공개편지는 팩스를 통해 매번 청와대로 보냈다.

<개혁통신>은 기본적으로 매 호의 발행사 격에 해당하는 ‘권두언’과 ‘개혁정론’ 꼭지와 ‘쓴소리’ 꼭지, ‘파헤쳐봅시다’라는 네 가지 꼭지로 구성되었다. 네 꼭지에 해당하는 글을 한 편씩은 실었지만, 사정에 따라 한 두 꼭지는 빠질 때도 있었다. 물론 권두언을 제외하고는 각 꼭지별로 두 편 이상의 글을 싣기도 했다. 그만큼 할 말이 많은 때였다.

첫 번째 <개혁통신>은 1998년 9월 17일에 나왔다. 제1호에는 “‘시민과 대통령을 잇는 핫라인’ 개통!”을 권두언으로 실었고, “청와대와 내각을 개혁의 진용으로 개편해야 합니다”를 개혁정론 꼭지에, “대통령님, (대통령의 장남인) 홍업 씨의 강남 ’쉼터‘가 마음에 걸립니다”, “또 공약(公約)이 공약(空約)되는가?”를 제목의 글을 쓴소리 꼭지에 실었다. ‘파헤쳐봅시다‘ 꼭지에는 “언론에 절대로 보도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그 주에 발표되었던 참여연대의 활동이 소개되었다. 1주일이 지난 9월 24일에 발행한 2호에는 “이 한없는 의심(권두언)”, “삼성이 기아를 인수해서는 안 되는 5가지 이유(개혁정론)”, “특벌검사제와 대통령의 결단(쓴소리)”을 실었다. 그리고 그 후 <개혁통신>은 1주일마다 발행되었다.

2호 이후 ‘개혁정론’ 꼭지에 실린 글의 제목을 몇 가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 2건국의 팡파르에 묻혀서는 안 될 몇 가지’(3호), ‘특검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5호), ‘개혁성공을 위한 절박한 호소’(6호), ‘의약품 비리의 뿌리는 이것입니다’(9호), ‘IMF 1년, 한국의 사회복지는 낙제를 면했는가?’(10호), ‘5대재벌 개혁에 관한 12.7 합의 어떻게 볼 것인가’(13호), ‘경제청문회는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15호), ‘전면적인 검찰개혁만이 대안입니다’(17호), ‘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시급합니다’(22호), ‘김태정 법무장관 임용 철회를 촉구합니다’(33호). 제목만 보아도 그 시기에 참여연대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거의 매주 꾸준히 발행하던 <개혁통신>은 1999년 6월 4일, 제34호에서 멈추었다. 이 34호 권두언의 제목은 러시아 속담에서 빌려온 “신은 너무 높이 있고 황제는 너무 멀리 있다”였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줄기차게 개혁해야 할 것과 해법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지만 대통령은 귀담아 듣지 않고 있음을 비유한 제목이었다. 스스로 발행 중단 조치를 내린 직접적인 계기는, 김대중 정부의 권력형 비리의 상징이 되었던 김태정 법무부장관 부인이 연루된 옷로비 의혹 사건이었다. 옷로비가 있었던 시기에 검찰총장이었다가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직전에 법무부장관이 된 김태정 장관을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참여연대도 그 점을 강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 김 장관의 임명철회 글을 담은 33호, 그리고 사흘 후에 <개혁통신> 호외까지 발행하면서 옷로비 사건의 엄정한 해결을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감이 발행중단으로 이어진 것이다.

발행 중단에 대해 참여연대는 34호에서 이렇게 말했다. “애당초 누가 발행하라고 한 것도, 그래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어서 그 발행 중단에 대해 누가 안타까워할 일도 없을런지 모릅니다. (중략) 그러나 이제는 그런 우리의 의도가 대통령의 귓전에 들리지 않는 터에 우리의 노력을 더 이상 계속할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대통령님을 둘러싼 인의 장막 때문에 우리의 <개혁통신>은 불통되고 있음을 이번 법무장관 유임조치를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처럼 천심인 민심이 메아리 없는 소리가 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참여연대는 발행 중단을 선언하면서 김 장관의 해임, 대통령 비서실장과 법무비서관의 경질, 특별검사제 도입 조치가 없으면 <개혁통신>이 다시 발행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 6개월 후 이 같은 조치가 대부분 이루어졌다. 그래서 1999년 12월 2일, <개혁통신>은 다시 발행되었다. 그리고 그 즈음인 2000년 1월에는 34호까지의 글들을 엮어 <개혁통신>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출판사 문예당을 통해 출판하였다. 발행이 중단된 6개월 탓에 1999년 연말까지 <개혁통신>은 호외 한 편을 제외하고 39차례 발행되었다. 2000년 한 해 동안 50회 발행했고, 2001년 7월 26일까지 115호를 발행했다. 115호까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주 1회씩 발행하였다. 그만큼 많은 노력과 정성을 투입하였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중반을 넘어가면서 대통령을 향해 개혁을 촉구한다는 의미도 줄었다. 또 3년 가량 <개혁통신>을 발행하면서 내부의 피로감도 많이 쌓였다. 그래서 115호 다음부터는 부정기적 발행으로 전환하였고, 2001년 9월 29일에 발행된 122호 이후 호수를 달지 않았지만 4번 더 발행했다. 2002년 3월 21일 126번째로 <분식회계를 근절하려면 증권집단소송제도를 도입해야 합니다>라는 당시 이승희 사회경제국장의 글을 끝으로 <개혁통신>은 더 발행하지 않았다.

총 126회 발행된 <개혁통신>에 실린 글은 권두언을 포함해 모두 353편이다. 매번 2.8편의 글이 실린 셈이다. 이 글들의 대부분은 참여연대 상근활동가나 임원이 작성했다. 일부는 외부 단체 활동가나 사회 저명인사들에게 원고를 청탁해 실었다. 영화배우 안성기, 훗날 정치인이 된 유시민도 그 중 한명이다. <개혁통신> 발행을 담당한 참여연대 실무자들이 1주일 정도 여유를 두고 청탁해 받은 글도 꽤 있지만, 시의성 때문에 발행 하루 이틀을 앞두고서 급하게 기획된 글도 많았다.

┃ 성과와 의미 ┃

개혁을 바라는 시민과 시민사회단체들의 메시지를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개혁통신>은 상징적인 수단이었다. <개혁통신>은 언론사가 제공할 수 있는 한정된 지면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 보급이 확대되고, 인터넷언론 매체도 많아지면서 ‘언로(言路)’는 넓어졌지만, 그렇지 못했던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상황에서 언로를 넓히기 위한 참여연대의 노력이었다.

2001년 4월 12일 발행한 100호 권두언에서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이렇게 말했다. “<개혁통신>에 실렸던 많은 의견들과 대안들 가운데 받아들여진 것이 적지는 않습니다. 국가배상심의제도 개선요구, 약값의 합리적 인하요구,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요구, 자동차 면허세 폐지 요구,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 구속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가진 의미는 크다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요구들이 받아들여진 것은 <개혁통신> 때문만은 아니다. 같은 글에서 “사실 저희들이 대통령께 드린 대부분의 제안과 권고는 거부되고 무시되었습니다.”라고 한 것처럼 <개혁통신>에 실린 주장 중에 많은 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개혁통신>이 정말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청와대 비서실 관계자들이 대통령에게 전했을 수도 있고 깡그리 무시했을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박원순 당시 사무처장이 쓴 다음과 같은 말은 <개혁통신> 발행의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저희들은 국정 전반에 걸쳐 나름대로 여과없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저희들이 생각하는 정책적 대안들을 꾸준하게 대통령께 전달해왔다고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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