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논객> 삼성전자와 주주대표소송

[편집자 주] 이 글은 한국경제신문의 원고청탁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글의 내용에 대해서는 필자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기로 사전약속을 받았으나, 결국 편집방향과 어긋남을 이유로 한국경제신문이 스스로 게재를 포기하였음을 밝힙니다. 필자의 허락을 얻어 이 글을 사이버참여연대<수요논객>에 게재합니다.

지난 11월 20일 서울 고등법원 민사21부는 삼성전자의 이사에 대한 주주 대표소송 제2심 선고공판에서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물론 아직 판결이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제2심 판결만으로도 우리 기업경영 여건에는 중대한 변화가 초래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아니 “이제 우리나라 기업경영의 지평은 절대로 옛날과 같아질 수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아마도 이번 판결이 일반 대중에게 주는 첫 인상은 “이제 큰일 날 사람들 좀 생겼네”라는 것일 것이다. 당장 재계서열 제1위의 그룹총수가 70억원을 융통해야하고, 이번 사건에 연루된 현직 장관은 배상 책임에 더해 공직자로서의 거취를 결정해야 할 상황으로 내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지켜보아 온 또 다른 사람들에 있어서 이 판결의 의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주식회사를 경영하는 모든 등기 이사들에 대해 법원이 주목할 만한 메시지를 보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가진다. 그 메시지는 앞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혹은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가 사법적으로 강제될 것이라는 점이다.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너무나도 당연한 그러나 진실로 중요한” 원칙을 천명하였다.

첫째, 제1심과 제2심이 공히 뇌물성 불법 정치자금에 대해 이사의 배상책임을 명백히 한 점이다. 이 점은 비전문가에게는 어쩌면 당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으나, 법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법조문의 자구해석에만 얽매이는 일부 사법기술자들에게는 상당한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던 논점이다. 일부 사법기술자들은 뇌물을 제공하는 것이 형사상 문제를 야기할 수는 있어도, 정치적 보복에 의한 이윤감소의 가능성을 회피하였다는 점에서 민사상 손해를 끼치는 행위가 아니라고 강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일관되게 명쾌한 것으로 보인다. 실현되지도 않은 추상적 손해의 가능성에 기대어 명시적으로 금전적 손실을 야기한 행위는 충실의무 위반이라는 것이다. 이 판결에 의해 “정치자금은 잠재적 손해의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것”이었다고 변명함으로써 대선자금에 대해 민사상 면죄부를 받고자 했던 최근 전경련의 주장은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두 번째로 삼성종합화학 주식의 평가 문제는 실제로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였지만 필자와 같은 경제학자의 눈에는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판결로 보인다. 투자자의 돈을 가지고 시가 6천원대의 주식을 1만원에 사서 2천원대에 매각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면 어떤 투자자가 그런 시장에 자기 돈을 투자할 것인가. 이것은 사리를 생각해도, 또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도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이번 판결은 이사의 의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중요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번 판결의 의미를 오해하지 않는 세심함도 필요하다. 이번 판결은 주주대표소송이 아직 우리 사회에 정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법원이 새롭게 이사의 충실의무를 발견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법원은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아무래도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 대표적인 예가 제1심 판결에 나타난 불참 이사에 대한 배상책임의 면제 논리나 제2심 판결에서 이천전기의 처리에 대해 이사의 경영상 판단을 광범위하게 인정해 준 것 등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원이 언제까지나 이사의 충실의무를 이처럼 좁게 정의할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아마도 우리 사회에 장차 이사의 충실의무 개념이 정착하게 되면, 법원은 이사가 부담해야 할 의무의 범위를 지금보다 훨씬 넓혀 잡을 수도 있다. 이런 구체적 한계는 추후의 관련 판례에 의해 시행착오를 거쳐서 확정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김대중 정부 시절에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제도를 도입하였다. 주주 대표소송은 집단소송제도와 함께 그 수많은 제도의 작동을 담보하는 최후의 보루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삼성전자 사건을 통해 비로소 그 중 하나의 보루를 향한 첫걸음을 내 디뎠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큰 첫걸음이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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