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4월 2013-04-05   2124

[만남] 이웃집, 그녀가 사는 이야기 – 김현숙 회원

이웃집, 그녀가 사는 이야기

김현숙 회원

 

 

호모아줌마데스

사진 박영록

 

 

인터뷰이는 참여연대 이웃에 있다 했다. 출발하며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도착하기 전까지 얼른 씹어 먹어야지 하며 참여연대 맞은 편의 오거리마트 옆 골목을 돌아 나오는데, 이런 낭패가……. ‘예미다정’이라 쓰인 간판이 떡하니 나타나는 게 아닌가. 이번 만남의 주인공 김현숙 회원이 운영한다는 가게는 정말이지 지척에 있었다. 순간 나의 혀는 본능적으로 드리블을 시작했고 결국 사탕은 왼쪽 볼 구석에 잽싸게 처박히고 말았다.     

 

 

체부동 4번지

 

예미다정

 

이렇게 주소를 적으면 사람들이 그 가까움을 알까? 참여연대에서 30걸음 쯤 떨어진 그곳, ‘예미다정’의 문은 거리를 향해 활짝 열려있었다. 가슴을 한껏 부풀린 유백색의 달항아리를 시작으로 선과 색이 고운 갖가지 전통 공예품들로 그득한 공간. 들어서자마자 주인장과 수인사를 나누는가 싶더니 내 눈은 연방 그 예쁜 것들을 흘끔거리느라 분주하다. 동행한 송모 간사는 나보다 한술 더 떠서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는다. 차 대접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낯선 방문객들이 던지는 온갖 질문에 다정한 목소리로 답을 하는 그녀.

 

“아, 그건 모시가 아니에요. 깨끼라 부르는 건데, 비단의 일종이죠. 그건 미싱 다리를 떼어 만든 건데요, 콘솔 대용으로 써도 멋스럽더라구요. 이건 전부 손바느질로 만든 것이구요, 그리고 그건…….”

 

손님들에게 다정하게 대하겠다는 마음으로 지었다는 가게의 이름이 새삼스러웠다.

 

“작년 8월에 문을 열었어요. 이 가게를 열기 전에는 파티플래너로 일했거든요. 그 일을 하면서 가지고 있던 소품들도 꽤 있었고 이런저런 인연으로 알게 된 작가들도 있고, 그 결과물들이 모두 모여 지금의 이 가게가 된 거죠.” 

몇 해 전 쉰을 넘기고 나서 그녀는 인생의 밭을 갈아엎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이 작은 가게를 차렸다. 흔히 말하는 인생의 이모작, 그녀는 지금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중이다.

 

“사람들 만나는 게 좋고 재밌어요. 가게 밖에서 유리창 너머로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무언가에 끌려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어찌 보면 저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인 거죠. 주로 근처에 사는 분들이 자주 들르고 그러다 단골도 되고 그렇게 친해지고 나면 한동안 안 보이면 궁금해지고 그러더라구요.” 

 

가게의 단골손님과 동네 이웃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아무 볼일도 없이 그저 안부를 묻고 전하기 위해 혹은 마당에서 딴 감 몇 알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은 예미다정의 문턱을 넘는다. 인터뷰 중에도 한 이웃이 빌려간 테이프를 돌려주러 와서는 나란히 앉아 있는 우리를 이상한 듯 기웃거리다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주인장 얼굴에 장사치의 단단함 같은 것은 없어 보인다. 혹 월세라도 밀리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 진지하게 물었다. 장사는 잘되세요?

 

“사람들 지갑 여는 거 어렵죠. 게다가 여기 있는 물건들은 필수품도 아니고 없어도 사는데 아무 지장 없는 것들이잖아요. 안 그래도 가게 시작하면서 그런 고민을 안 한 건 아니에요. 돈 버는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이 나이가 돼서까지 돈 되는 일만 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래도 월세는 꼭 버세요.^^

 

 

공부하며 파티하며

 

김현숙 회원

 

한창 두 번째 농사를 짓는 중인 그녀. 그럼 첫 번째 농사는 어땠나요?

 

“사회 초년생 땐 평범한 회사원이었구요, 그 이후엔 전업주부 생활을 한동안 했었어요. 딸아이 둘을 키웠는데, 그러다보니 뭐랄까, 내 인생인데 내가 주인공이 아닌 느낌? 항상 부족한 것 같고, 그래서 책도 보고 인문학 강의들도 듣기 시작했죠.”

 

늘 느끼지만 전업주부 생활은 정말이지 만만치가 않다. 내가 나 자신을 무대 위로 끊임없이 밀어 올리지 않으면 심지어 나 자신조차 나에 대해 잊는다. 내 시야에서 정작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갈증도 있었어요. 전 여상을 나왔거든요. 제 밑으로 동생이 셋인데 돈 벌어서 동생들 학비 대고 그러느라 결혼도 늦게 하고 그랬어요. 예전에는 저 같은 딸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배움에 대해 항상 결핍을 느끼며 살았죠.”

 

공부를 시작했다. 독학사를 통해 학위를 따고 이어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학위까지 마쳤다. 하긴 세계의 지붕에 혼자 올라섰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 이후에는 예술가들이 모여서 만든 ‘다음아카데미’에서 문화 전반에 관한 것 그리고 예술경영과 관련된 공부를 시작했죠.”

 

칼을 간 것이라고, 세상에 나올 때 쓰기 위해 늘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준비한 것이라고, 그래서 세상에 나와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만났을 때 그렇게 겁나지만은 않았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이런 공부들이 쌓이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파티플래너 일을 10년 정도 했어요. 파티의 주제와 콘셉트가 정해지면 초대 손님 명단 작성부터 시작해서 음식, 연회장 세팅 등 파티의 모든 부분을 관장해요. 주로 관공서, 박물관, 대사관 등의 비즈니스 파티를 담당했었는데 고객 중엔 오세훈 전 서울시장 그리고 지금 박원순 시장님도 있었어요.” 

와, 그럼 수입도 무척 좋았을 텐데, 왜 그만 두셨어요?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서요. 파티 하나를 끝내고 나면 그 자리에 곧바로 쓰러질 정도예요.”

 

연회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내야 하는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과 함께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이젠 나이가 들어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일을 접었다 했지만 숨겨진 사연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요즘 파티플래너 계통은 대부분 젊은 세대가 주축이 되어 움직이고 있어요. 파티를 주최하는 쪽도 스스로를 갑이라 여기는 경향이 강하고 그래서 함께 일한다는 생각보다는 사람들을 부리려는 성향이 있죠. 그런 자리에 제가 떡하니 흰머리 섞인 얼굴을 하고 나타나니까 사람들이 긴장하고 불편해 하더라구요. 그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이 저는 불편했어요.” 

 

‘파티플래너’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시작한 일, 그리고 10년을 이어 해 왔던 일. 그런 일을 그녀는 손에서 내려놓았다. 더 이상 내가 지을 농사는 아니다 하는 순간, 그녀는 인생의 한 페이지를 단호하게 넘겨버렸다. 

 

 

딸들과 함께 세상을 누비다

 

일하고 공부하고 아이들 키우고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여행 이야기만으로도 인생의 한 챕터를 묶어내야 할 만큼 삶의 많은 순간들을 여행으로 채웠다. 

네팔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셨다구요?

 

“제가 직접 한 건 아니에요, 그곳에 여행을 갔다가 만난 현지인 가이드 한 명이 있었는데 그분이 게스트 하우스를 해보고 싶다고 해서 제가 투자를 좀 한 거죠. 큰돈은 아니었구요. 근데 잘 안됐어요.” 

 

그렇구나. 근데 네팔에는 왜 가신 거예요?

 

“아이들이 크면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고른 곳이 네팔이에요. 아이들과 떠날 미래의 여행을 위해 미리 사전답사를 다녀온 거죠.”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세상, 그 첫 번째 여행지로 그녀는 ‘세계의 지붕’을 골랐다. 20년 전, 직항노선도 없었을 때, 여행사의 관광 상품도 나오지 않는 곳을, 혼자서 갔다 온 엄마. 생각만 해도 인생의 든든한 동반자다. 

 

“아이들 크고 나선 함께 다녔죠. 인류 문명이 탄생했던 이집트와 그리스를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제가 번 돈은 거의 여비로 다 쓴 것 같아요. 50살이 되던 해엔 큰딸과 스페인으로 기념 여행을 다녀왔구요.”

 

미국 여행 중엔 아이들과 함께 24시간 동안 기차를 탄 적도 있단다. 아이들에겐 진짜 잊을 수 없는 추억이겠다. 

 

“여행을 다니면서 제일 좋은 건, 싸울 일이 없다는 거예요. 집에 있을 땐 바깥일과 가사 노동에 치여서 아이들에게 이유 없이 소리도 지르게 되고 그러는데, 여행을 가면 회사일, 밥, 청소 그런 일에서 모두 해방되니까 우린 재밌게 놀 궁리만 하면 되니까요.”

 

한 달이 넘는 방학이라도 돌아올 때면 이들은 싼 비행기 표를 구하느라 방학 숙제 따윈 기억해내지도 못했다. 인생의 진짜 숙제가 있는 곳으로 떠나기 위해 짐을 싸고 준비를 하느라 정작 이곳의 일들은 잊기 일쑤였다.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보다 ‘내가 과연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가 제겐 더 중요한 문제였어요. 고민을 해보니 제가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며 나눌 수 있는 건 여행이더라구요. 추억이라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니까요.”

 

터키에서 크루즈 여행을 했을 때 일이다. 이란에서 딸 둘을 데리고 온 한 엄마와 나란히 가게 되었다. 서로의 언어는 완전히 달랐고 그래서 많은 것들을 나눌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아이들은 몰려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웃고 떠들고 게임하고……. 각자가 서로에게 먼 이국에서 온 이방인임에도 아이들은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아랍의 땅에서 자란 두 명의 소녀와 동쪽 끝에서 건너온 또 다른 두 명의 소녀. 그 누구도 이 아이들에게 낯선 세상을 만나는 법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같이 어울렸고 함께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그려낸 인생과 배움과 성장은 이런 풍경이었다.

 

 

우리들의 이웃

 

김현숙 회원

 

참여연대 회원이면서 환경운동연합 국제위원회에서 꾸준히 자원활동을 해온 그녀. 어울려 사는 삶을 꿈꾸고 일상에서 실천하는 그녀에게 혹시 요즘 가장 마음이 쓰이는 사회문제가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한참이나 대답을 못한다. 시간을 들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잠기기만 하는 목소리를 돋우며 그녀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본 기사가 있어요. ‘배고픈 청춘’이라고 쓰여 있었어요. 아이들이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고 어떨 때는 굶기도 하고……. 마음이 너무 아파요. 요즘 계속 이 문제가 숙제로 제 맘속에 있어요. 5명만 모여도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젊은이들에게 좋은 식사를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는 밥집 같은 것을 주위 사람들과 함께 운영해 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어요.”

 

이 대답을 들으며 질문지 마지막에 적혀있던 ‘이모작이 끝나면 어떤 농사를 새로 시작할 것인가’라는 항목 위에 길게 가로줄을 그었다.   

 

 

“참여연대가 이 근처로 온다고 했을 때 정말 반가웠어요.”

가까운 곳으로 옮겨오는 참여연대를 보며 와락 반가운 마음부터 앞섰던 것은 참여연대가 이제 이 동네의 새로운 이웃으로, 동네 사람들의 삶 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설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참여연대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더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참여연대 앞에서 벼룩시장 같은 것도 하고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바자회도 열고 그러면서 말이죠.”

 

인터뷰가 끝나고서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한쪽 볼에 박힌 사탕을 꺼내 입에 다시 물고는 함께 수다를 떤다. 61년생, 73년생, 85년생 띠동갑 여자 셋. 꼭 12살씩 차이나는 여자들이 꿈꾸는 세상은 그러나 서로 너무도 닮아있다. 나이의 많고 적음 혹은 사는 곳의 멀고 가까움 같은 물리적 거리의 원근이 반드시 사회적 거리의 원근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날 나는 그렇게 체부동에 사는 여인들과 이웃이 되었다.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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