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다양한 깃발 사이에서  춤추며 천천히 함께 나아가기

특집 4 _ 대한민국 새로고침

 

 

다양한 깃발 사이에서 
춤추며 천천히 함께 나아가기

 

 

글. 박예지 청년참여연대 성평등분과장

 

‘암탉의 목을 비틀어버려라’, ‘아녀자’, ‘XX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서 나온 말들이다.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성 자체를 비꼬고 조롱하는 혐오발언들이 광장에 쏟아졌다. 이에 많은 여성들이 불편함을 호소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돌아온 것은 ‘그게 왜 불편하냐’는 반응이었다. 이런 반응은 DJ DOC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풍자 노래에 대한 논란에서 극에 달했다. ‘미스박’이란 가사가 여성혐오가 될 수 있냐는 게 논란의 쟁점이었다.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미스박’이 여성혐오냐 아니냐 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다. 이전 같으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었을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공존하는 사회 
지난주 새물결아카데미에서 강남순 교수의 데리다 강의를 들었다. 데리다는 탈구조주의를 이야기할 때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탈구조주의 철학자들은 다양한 것들의 차이를 무시하고 억압한 근대 거대담론의 폭력성에 저항하고 경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근대의 담론은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 존엄성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그때 말하던 ‘인간의 범주’에는 백인, 중산층, 남성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자, 유색인종, 성소수자, 장애인 등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은 근대가 말하던 인권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데리다는 해체의 방법론을 통해 ‘권리의 원’의 경계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어떻게 확장시켜 나갈지를 고민한다.

강의가 끝난 후 한 참석자가 이번 DJ DOC 사건을 예시로 들면서 질문을 했다. 데리다는 해체를 주장하지만 그것이 우리나라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도 유효한 방식일까? 우리나라는 근대성이 체화되는 과정을 제대로 밟아나가지도 못했는데, 이 상황에서 해체를 말하는 건 너무 복잡하다. 이번 촛불 집회 때도 대통령 퇴진이라는 더 급하고 거대한 일이 있는데 DJ DOC 사건과 같이 사소한 것들도 함께 끌어안고 가니 논점이 옅어지고 변화의 길이 더 멀어지는 느낌이다. 사회의 거대한 구조를 바꾸려는 운동의 효율성을 생각한다면 소수자의 불편함같이 사소한 문제를 다 끌어안기는 힘든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그렇다. 우리나라는 전근대, 근대, 탈근대가 모두 공존하는 특이한 사회다.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은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읽기와 삶읽기』에서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이 공존하고 있는 것’을 식민지의 특성으로 든다. 우리나라는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서구문물을 식민적으로 받아들였다.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사회의 제도와 관행이 탈근대적인 기술 및 감수성과 만나 함께 공존하는 사회. 샤먼이 대통령 뒤에서 나라를 조종하고 그 사실의 결정적인 증거가 태블릿 PC로 인해 밝혀지는 나라.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을 성추행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미스박’이란 단어에도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개념은 어울릴 수 없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우리나라의 현주소를 적확하게 묘사한다.

 

큰 연대와 구체적인 권리에 대한 예민함이 공존해야 
때문에 단순히 근대적 방법론 대 탈근대적 방법론, 거대담론 대 미시담론 같은 해결 방법을 양극단으로 생각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근대의 거대담론이 지닌 폭력성에 반대하면서도 그 안에서 가치 있는 부분들을 상속하며 확대해 나가야 한다. 근대성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지만 완전히 배척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근대성의 핵심은 한 인간을 개별인으로 보는 시선이다. 개인(Individual)은 더 이상 나눠지지 않는 한 개체로서의 인간을 가리킨다. 이런 시선으로부터 개별적인 인간에 대한 존중과 권리의 개념이 싹튼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런 근대적 사유들을 구체화하고 제도로서 실현해내는 과정을 못 거쳤다.

영국에서 여성참정권은 1865년 런던에서 ‘여성참정권위원회’가 결성된 뒤로 63년 동안 투쟁함으로써 얻어진 결과다. 이렇게 오랜 투쟁 기간을 거쳤을 때에는 전국민의 의식화가 아주 다층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지금의 촛불정국이 63년 동안 이어진다면,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해 온갖 섬세하고 정치한 논의들이 이뤄질 것이다. 단순히 대통령을 퇴진시킨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사회 전반의 문제들에 대해 다양한 개인들이 가진 의견을 공유하고 좀 더 섬세한 논의들을 지속해야 한다.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권리에 대한 예민성이 자란다. 사회의 큰 변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을 함께 연대시킬 수 있는 커다란 깃발과 그 커다란 깃발이 세세한 권리들을 배제시킬 때마다 그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작은 깃발이 동시에 필요하다. 우리는 한쪽 방법론에만 매몰되지 않고 큰 깃발과 작은 깃발 사이를 춤추듯이 왔다 갔다 해야 한다. 현실구조 속에서 끝없는 타협점을 만들어가며 저항해야 한다. 서양의 이론을 그대로 가져와서 주장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 우리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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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끈질김과 인내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 감수성은 조금씩이나마 진화해 왔다. 2002년 ‘퍼킹 아메리카(Fucking America)’를 당당하게 외치던 장갑차 시위와 2016년 ‘미스박’이란 가사에 대한 비판이 사회적으로 공론화되는 촛불 시위 사이의 간극은 작지 않다. 이 14년의 세월이 가져온 변화에는 지금까지 주류에서 소외되어 왔던 여성들을 광장의 주체로 기입하기 위한 투쟁의 흔적과 그에 대한 사회의 응답이 담겨있다. DJ DOC의 노래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 차별에 대한 예민성과 권리에 대한 관심이 비약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가운 사건이다.

이번 광장에선 유달리 다양한 문구의 깃발이 휘날렸다. 그 중에서도 다른 표기 없이 ‘몇몇 여성단체’, ‘일부 여성단체’라는 문구만을 글자 그대로 새겼던 한국민우회 간사들의 하얀 깃발은 전복적이었다. DJ DOC의 노래에 비판을 제기한 사람들을 ‘몇몇 여성단체’로 지칭하며 특수한 집단으로 축소시키고 비하하는 반응에 맞서 그들은 ‘몇몇 여성단체’가 한 명, 한 명의 개인으로 실재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는 것, 살아있는 얼굴과 움직이는 육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외에도 ‘장수풍뎅이 연구회’, ‘민주묘총’ 등 웃음을 자아내는 패러디 깃발들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만큼 하나의 거대한 틀에 묶이지 않는 개성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 데리다로. 그는 말한다. ‘해체는 정의다.’ 그가 말하는 정의는 끈질김과 인내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해체는 동일성이라는 끈으로 묶인 보자기의 매듭을 찾아내어 풀어헤진 뒤, 그 안에 억압되어 있던 개별적인 것들 각각에게 생명을 되돌려주는 작업이다.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고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우리는 무수한 ‘소의’의 다양한 깃발들 사이에서 춤을 추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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