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1년 03월 2021-03-01   2550

[통인] 기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 김원영 변호사

기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김원영 변호사, 『사이보그가 되다』 저자 

 

월간참여사회 2021년 3월호 (통권 283호) 

 

김원영은 변호사이자, 작가이고 연극배우다. 그리고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기도 하다. 그는 소설가 김초엽과 함께 펴낸 『사이보그가 되다』에서 신체 장애를 치료와 제거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 사회 현실을 가리고 기술을 낙관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AI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오늘날 모습으로 소환해 감동까지 선사하는 시대. 그 속에서 곧 ‘기술이 장애를 자유케 하리라’는 우리의 낙관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지난 2월 9일 서면 인터뷰로 김 변호사를 만났다.

 

김초엽 작가와 공저 『사이보그가 되다』를 냈다. 김원영 변호사가 먼저 기획을 제안했다고 들었다. 

김초엽 작가는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SNS로 연결된 사이였지만. 그는 자연과학연구자이고, 좋은 글을 쓰면서도 장애와 소수자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 깊은 분인 것 같아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SF 작가로 발표한 글을 보고 메일을 보냈다. 2018년 말쯤이었다. 처음에는 장애와 소수자 정체성이라는 쟁점에 관해 함께 쓰면서 나이, 성별, 전공 등 각자 차이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지 궁금했다. 

 

책을 쓰면서 새롭게 알게 된 서로의 차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사실 차이보다는 과학기술과 장애에 관한 공통의 문제의식이 크다는 점에 적잖이 놀랐다. 책에도 썼지만, 우리 두 사람 모두 장애학 또는 장애인 인권운동이 가져다준 문제의식이 한국 사회에 자리 잡던 시기에 가장 예민한 10대와 20대를 보내서 그런 게 아닐까 한다. 차이도 당연히 있었다. 가시적 장애를 가진 내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의 몸, 인공보철 디자인 등에 관심이 많았다면, 김초엽 작가는 디지털 세계에서의 장애인 접근성 문제 등을 깊이 다뤘다.

 

장애인은 ‘기계와 결합한 유기체’로서 사이보그적 존재지만, 흔히 떠올리는 영화 속 사이보그와는 다르다고 했다. 책에서 말하는 ‘사이보그’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새로운 사이보그 개념을 제안했다기보다, 기존 첨단기술과 결합한 영웅적 인간에 따라붙던 상징성을 해체하는 데 중점을 뒀다. 현실 속 사이보그는 기계와 결합해 살아가면서 자주 불편하고 덜컹거리고, 수리와 수선이 필요한 평범한 삶에 가깝다는 것이다. 바로 그 삶이 장애인들의 현실과 유사하고.

 

과학기술의 ‘비장애중심주의’를 언급했다. 이 책에서 우려하는 점은 어떤 것인가?

비장애중심주의는 애이블리즘ableism의 번역어다. 사회의 모든 제도나 규범, 일상의 실천이 보통 장애가 없다고 생각되는 몸 상태만을 ‘정상’이라고 여기는 지배적 태도다. 통계적으로 평균에 가까운 사람의 몸 상태는 있다. 그러나 통계적 정상 개념을 규범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이 마땅히 바람직하다고 전제할 때 비장애중심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장애·질병과 과학기술에서 보면, 바로 교정과 치료만을 절대적 해결 목표로 삼는 태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치료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도 어린 시절 정형외과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아 내 몸을 안정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가진 많은 자원이 교정과 치료를 위한 연구나 제도에만 투여되는 것은 문제다. 당장 교정과 치료에만 모든 것을 쏟는다면 누군가의 현재 삶은 오히려 나아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 어린 시절 목발 짚는 훈련을 열심히 받으라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의료적 처치를 받은 후 휠체어를 타는 쪽을 선택했다. 목발을 짚는 훈련을 할 시간에 원하는 공부를 했다. 

 

우리 사회가 지하철역과 학교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면서 나는 휠체어를 타고도 목발을 짚는 것만큼의 이동할 자유는 얻게 됐다. 만약 목발을 짚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하는 사회가 계속됐다면, 나는 글 쓰고 공부하고 연애하고 우정을 나눌 시간의 많은 부분을 재활훈련에 쏟아야 했을 것이다.

 

월간참여사회 2021년 3월호 (통권 283호)

Ⓒ이지양

 

“내가 거울 앞에서 마주한 존재는 

‘인간+휠체어’의 결합된 모습으로 

거기에 있었다. 나는 휠체어가 되었다”

– 『사이보그가 되다』 책 속에서 

 

 

현재 코로나19로 인한 이동제한, 거리두기 등 비대면 생활의 틈새를 온라인 회의, 배달앱 등 ‘기술’이 채워주고 있다. 

비대면으로도 사회가 작동하는 것을 보며 우리 시대 기술과 빠른 혁신에 놀라움을 느낀다. 그러나 문제도 드러나고 있다. 가장 주목하는 것은 계층 간 격차가 더 심화한다는 점이다. 비대면으로 살아간다지만 결국 내 몸과 마음이 어딘가에 안락하게 있어야 하고, 내가 원하는 곳에 주의를 쏟을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누군가의 물리적 돌봄도 받아야 한다. 쾌적한 주거, 적절한 주의통제력, 최소한의 대면 상호작용은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게 경제·사회적 지위에 따라 너무나 많은 차이를 낳고 있다. 각자 공간에서 고립된 상태에서 비대면을 통해 넓고 다양하게 연결되는 사회는 흥미로운 면이 있지만, 결국 섭생 환경과 주의통제력, 기본적 디지털 활용 능력의 불평등이 우리 몸과 마음을 어떻게 갈라놓을지 우려가 되기도 한다.  

 

AI 챗봇 ‘이루다’ 혐오 발언과 차별이 사회적 논란이 되며 차별금지법 제정 필요성을 환기하기도 했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기본적으로 법적 규제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제정될 필요가 있다. 다만 혐오 발언이나 차별 행위에 대한 법적 규율은 필요 최소한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 원칙과 충돌도 고민할 부분이지만 그보다 혐오와 차별에 맞서는 일은 국가에 의한 금지가 아니라 일상과 문화에서의 투쟁과 협력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고 믿어서다. 그래야 궁극적으로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을 정교하게 만들어도 장애를 가진 사람들, 나이가 많거나 교육을 잘 받지 못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관계’에서 덜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혐오 발언을 금지한다고 혐오 정서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법과 규범이 금지해서가 아니라 사람들 마음에서 ‘진심으로’ 차별과 혐오가 줄어드는 사회를 원한다. 

 

물론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고용박람회에 출입도 못 한다면 애초 사회적 관계망에 진입할 여지조차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대표적인 생활영역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법제도는 필요하다. 다만 우리 생활에서 겪는 많은 종류의 배제와 거부가 부당한 차별인가 혐오인가 여부를 국가인권위원회나 법원이 최종 판단하고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는 상황이 혐오와 차별의 진정한 축소를 위해 항상 바람직한지는 의문이 있다. 차별행위나 혐오발언의 개념, 적용 영역을 넓게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일상에서 시민들이 접근성 보장 등 장애인 인권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술적 실천이나 노력이 있다면 무엇일까?

우리가 처한 기술적, 디자인적 조건에서 접근성을 완전히 보장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모든 개개인 상황이 다르기도 하다. 접근성 보장이 어렵다고 판단될 때 죄책감을 갖기 보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그것이 필요한 당사자와 이야기하면서 가능한 선택지를 넓혀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몇 달 전 책임자로 참여한 독서모임에 청각장애인 참가자가 계셨다. 서울시 지원을 받아 문자통역사를 배정해 모임을 진행해왔는데, 어느 날 사정으로 문자통역사 분이 지각을 했다. 이로 인해 그 청각장애가 있는 참여자 분은 모임 참여가 크게 제약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분과 의견을 나누고, 다른 구성원과 이야기하면서 노트북 3대를 펼쳐 단체 채팅방에 접속해 참가자 한 사람이 다른 참가자 3명 정도를 맡아 각각 그 사람들의 발언을 문자로 통역했다. 이런 방식은 불완전하고 청각 장애가 있는 참여자에게도 부담을 줄 수 있어 문자통역사가 있는 것이 여전히 바람직하지만, 당사자와 의견을 나눈다면 접근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는 실용적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다. 때로는 기지를 발휘해 대응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윤리적, 이념적 책무로서 접근성 보장을 사고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물론 접근성은 공공기관이나 고용, 교육 등 일부 공적 영역에서는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의무이므로, 그저 대강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식의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해는 말아 달라(웃음).

 

월간참여사회 2021년 3월호 (통권 283호)

Ⓒ이지양

 

영화 〈조제〉를 보면 휠체어를 탄 주인공이 구글맵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지도나 구글맵 보는 걸 즐겨 하나? 일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술’이 있다면.

 

구글맵은 가장 많이 사용하는 앱 중 하나다. PC에 구글어스를 그냥 켜놓을 때도 많다. 카카오맵의 휠체어 이용자용 지하철 환승 지도, 해외에서는 구글맵이 제공해주는 휠체어 이동 동선 서비스도 무척 유용하게 이용하는 기술이다. 사실 책 ‘사이보그가 되다’를 펴낸 사람으로서 민망하지만 나는 온라인게임을 하지 않는다. 새 디지털 디바이스에도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쉽게 주의를 빼앗기는 편이라 아예 거리를 두는 편이다. 책도 종이책만 고집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전자책을 구매하고, VR기기 구매를 알아보는 중이다.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미디어에 자주 소개되고 있다. “성공한 장애인”, “역경을 극복한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과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것 사이에서 어떻게 타협하고 있나. 기준점이나 경계선을 두고 있는지? 

초기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사회인식을 개선하는 것과 관련해 내 이미지를 생각하지는 않는 편이다. 최근에는 유튜브나 각종 방송에 다양한 장애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이 여러 채널을 통해 역경을 극복한 장애인 이미지를 비판하고 관련한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2010년대와는 또 다른 세상이 됐다. 

 

사회적 노출이나 장애 재현과 관련해 2021년 내가 갖는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장애가 다양성이나 소수자라는 정치적으로 좋은 말들의 상징으로‘만’ 소비되지 않을 것인가에 있다. 정치와 문화예술 영역 등에서 활동하는 장애인들은 이제 자신이 역경을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성숙한 언론도 이제 그런 식으로만 보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회적 다양성을 확장하느냐, 또 소수자로서 그 무대에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 등을 강조한다.

 

물론 이 방향은 바람직하지만, 자칫 나를 이루는 복잡한 정체성 가운데서 나라는 개인을 ‘장애인’으로만 환원하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세련되고 그 자체로 도덕적 상품처럼 취급하고 싶은 욕망에 빠질 수 있는 듯하다. 개인 이야기와 정체성이 모두 브랜딩이 될 수 있는 시대에 장애 정체성을 단순히 소비하지 않으면서도, 이 정체성이 가진 소중하고 고유한 요소들을 어떻게 나의 사회적 활동과 글쓰기, 창작 작업에 효과적으로 반영할 것인가 늘 고민한다. 

 

김원영 삶에 글쓰기와 예술(연극)은 어떤 의미인가? 평소 글쓰기 습관이나 글감이 잘 안 떠오를 때 영감을 얻는 방법이 있나. 

글쓰기는 시작부터 내 경험을 객관화하고 기록하고 싶은 욕망에서 출발했다. 그 외의 무엇은 아니었다. 지금도 꽤 그렇다. 물론 이제는 좀 더 전문인 연구자로서 글을 쓰고 싶다. 나 또는 나와 관련이 적은 타자에 대해 더 많이 쓰고 싶다. 여전히 쉽지 않다. 글감을 의도적으로 떠올려야 하는 글은 잘 쓰지 않는다. 하루에 얼마씩 써야만 한다는 생각도 없다. 글감이 이미 있는 글만 쓰는 편이다. 다만 그 글을 진행하는 데 자주 막히고, 오래 걸리는 편이다. 그럴 때는 관련 분야와 관계없는 책을 읽고, 그러다 지금 쓰는 주제와 연결되는 순간 큰 기쁨을 느낀다.

 

연극은 어떤 의미인가?

연극을 포함한 공연예술은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과거에는 단순히 나의 ‘관종’ 기질,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것은 부담스러운 성향으로서 적당히 주의를 끌고, 사람들 앞에서 내가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된다는 느낌을 즐겼던 거 같다. 그러다 공연예술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충격을 주는 기회라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지금은 주목받고 싶다는 욕망이나 사회적 의미, 그런 것보다는 비대면이 일상화한 사회에서 내 몸에 집중하고, 신체를 가진 존재로서 하나의 공간에서 관객과 만난다는 점이 무척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내밀하게는, 내가 언어·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을 정당화하면서, 몸에 대해 지속적으로 부정했던 성장기의 시간을, 연극이나 무용 같은 공연예술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몸을 내 자아에 통합하는 과정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다. 민망하다.

 

김원영의 다음 욕망은 어디로 향하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모든 것이 매끄럽게 디지털화, 자동화하는 사회에서 나이 들고, 병들고, 부자유한 몸의 의미와 가치에 주목하는 일을 하고 싶다. 관련된 글을 쓰고, 법과 제도를 고민하고, 흥미롭고 인식에 충격을 주는 공연을 만들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참여사회」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춤을 한번 배워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또 ‘움직임’ 워크숍이라는 것을 하는 자리에 나가보시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나이가 몇 살이든, 장애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 복잡하고 긴 법조문의 세계, 또는 인스타그램이나 클럽하우스에만 남아있지 말고, 하나의 공간에서 우리가 어설프게라도 물리적으로 공존하면서 몸을 움직일 때만 얻게 되는 감각과 지혜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 김도연 〈미디어오늘〉 기자

사진. 이지양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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