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정의 생활칼럼] 우리를 조롱하는 것들

얼마 전, 모 대학 총장 취임식 풍경을 전해 들었다. “여느 대학 취임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런 저런 내용으로 식이 진행되고 끝으로 내빈들을 소개하는 순서가 되었다. 당연히 나이가 지긋하고 그에 걸맞게 사회적 지위가 높아 보이는 분들의 순서이려니 했는데 웬걸, 가장 먼저 소개되는 이들은 내빈석 중앙에 앉아 있던 아이들이 아닌가. 강화도의 어느 정신지체아 학교에서 온 학생들이었다. 새로 총장으로 오신 분이 최근까지 맡아 보살피던 학교의 아이들로 자기네 교장선생님이 대학총장이 되는 취임식에 초대받아 왔다는 것이다. 그 때서야 식이 진행되는 동안 다소 시선을 끌게 만들었던 아이들의 행동이 이해되면서 마음이 더없이 흡족해지더라”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이 전해 주었다. 그는 그런 자리에 함께 한 것이 참으로 고맙고 자랑스럽더라는 말도 덧붙였다.

장애아들을 그런 중요한 자리에 오라고 하는 마음, 그리고 그들을 누구보다 맨 앞에 앉히고 소개할 줄 아는 마음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무엇보다 그 대학의 교육정신이 썩 마음에 들었다. 요즈음 우리나라 대학이란 게 무엇인가. 무슨 변명을 붙여도, 철저하게 성적위주로 평가되고 모든 것이 대학입학의 서열로 획일화되는 게 아닌가. 좋든 싫든 떠밀리다시피해서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은 여전히 우열을 매기는 잣대에서 벗어나기 힘들 뿐 아니라 스스로도 쉽게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지는 게 사실이다. 다른 사람, 나보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옆이나 뒤를’ 돌아보고 그들을 보살피는 것은, 전혀 자기 일이 아닌 걸로 여겨지는 풍토이다. 취임식에 참석했던 그 대학의 학생들에게 그 날의 풍경은 최소한 약간의 생각거리를 남겨주는 여운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자연스레 내 머리속에 조지와 스티븐이 떠올랐다. 런던 교외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던 쌍둥이 형제였는데 태어날 때부터 지체장애였다. 휠체어나 보조기구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보조기구를 딛고 걸어도 옆에서 보면 번쩍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어설프고 서툴렀다. 두 아이의 학교생활을 도와주는 보조교사가 늘 옆에 붙어 다녔다. 보조교사는 두 아이를 따로 교육시키는 게 아니라 다른 비장애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고 노는 동안 보살펴주는 것이 임무였다. 전체 학생수가 200명이 조금 넘는 그 학교의 아이들은 모두 이 형제를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놀리는 경우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모두들 그 아이들이 특별한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저건 체육시간에 스티븐이 타고 다니는 자전건데 다른 것과는 좀 다르게 생겼지요?” 학교 강당 안에 있는 두 대의 특수 자전거를 가리키며 한 아이가 말해 주었다. 그리고 전체 조회시간이나 학예회, 크리스마스 축제 등 여러 행사 때마다 형제는 언제나 맨 앞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조지와 스티븐을 위해 차례를 양보하고 줄지어 움직일 때 그들의 느린 속도를 앞지르지 않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 알았다.

난 요즘 관공서나 은행을 다닐 때마다 나도 모르게 계단의 턱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이렇게 경사가 지면 휠체어가 올라가기에 너무 힘들지 않을까? 애써 밀고 올라갔는데 다시 미끄러지진 않을까? 장애인을 위해 만들어 둔 경사로를 따라 오르내려 보지만 그다지 효율성 있어 보이는 시설을 만난 적이 없었다. 너무 턱이 높거나 이음새가 벌어져 있어 다니기 어려워 보였다. 말도 안 되게 흉내만 내어놓은 듯한 시설을 보면서 하릴없이 혼자서 분노하곤 한다. 눈 가리고 아옹하는 그런 시설물이 우리 모두를 조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시민으로서의 자격은 동등한 것이지 않은가.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도와주고 배려해 주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베푸는 것이 아니다. 비장애인에게도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다. 장애인이 대우받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비장애인도 더불어 대우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 런던통신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영국과 유럽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 특별한 사람,

유명한 사람, 덜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저서로 <젠틀맨 만들기>, 번역서로

줄리언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조아나 트롤로프의 <타인의 아이들>이 있다.

권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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