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1월 2007-01-01   546

정희의 세상살이

엊그제 강화도를 다녀오는데 전화가 왔다. 전화기 화면에 정희 이름이 떴다. 앗, 이 녀석이 웬일이야.

“아저씨이!”

“정희야! 웬일이야?”

“아저씨이, 보구 싶어요.”

정희는 내가 강화도를 벗어날 때까지 한 20분 동안 전화로 온갖 이야기를 다 한다.

정희는 올해 스물 한 살이다. 내가 정희를 만난 것은 정희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부모 없이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정희는 만화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정희는 시큰둥했다. 늘 나같이 도와준다는 사람이 찾아오지만 얼마 못 가 발길을 끊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한참을 이야기 한 뒤 나중에 연락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는데 쭈뼛쭈뼛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었다. ‘진작 알려 주지’하는 내 물음에 정희는 “어렵게 산다는 애가 무슨 핸드폰까지 있냐”고 물을까봐 그랬다는 것이다. 정희가 가진 핸드폰은 지금은 발길을 끊은 어느 독지가한테 선물을 받은 것이었다. 정희는 다른 어른들과 달리 핸드폰이 있어도 아무 소리 않는 사람은 처음 봤다며 조심스레 말을 했다.

첫 만남을 가진 뒤로 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정희네는 동사무소에서 영세민한테 주는 생활비는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겨우 쌀을 살 수 있을 뿐 학교를 다니는 차비나 용돈까지는 할 수 없었다. 나는 정희에게 많은 도움은 주지 못했지만 다달이 소액의 후원을 했고 고등학교 들어갈 때는 교복을 사 주기도 했다. 또 할머니를 찾아가 쌀을 사다 드렸고, 겨울에는 김장을 해서 갖다 주기도 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할머니와 살던 전셋집에서 기한도 안 되어 쫓겨 나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사 비용을 받아 주고 이사를 도와주었다. 정희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담배도 피우고 술을 먹기도 했지만 흔히 염려하는 길로 빠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정희는 만화가게나 덕이동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고등학교를 겨우 마쳤다.

그리고 정희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취업을 하게 됐다. 들으면 알만한 그 기업은 파주에 새로 공장을 세우고 고양시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온 아이들을 무더기로 받았다. 그 공장은 3교대로 아이들을 기숙사에 몰아넣고 일을 시켰다. 거기서 정희 같은 아이들은 일하는 기계였다. 무게가 꽤 나가는 엘시디 같은 것들을 들고 날라야 하고 약품 냄새가 너무 독해서 참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한 달에 겨우 한두 번 외출을 나올까말까 할 정도로 쉬는 날 없이 일을 했다. 정희는 참기 힘들었지만 여든 여섯인 할머니를 위해서 견뎌야 했다. 그런 정희를 보면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이 제공한 값 싼 노동력을 먹고 상대적으로 비대해지는 기업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나의 이런 기분을 아는건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들려 주려하는 정희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저씨, 힘들지만 그래두 할머니 때문에 꾹 참으려고 해요. 그리구요 아저씨이, 지금 생각해보니까요. 아저씨 같은 사람은 없었어요. 꼭 아빠 같았어요. 참, 이번에 나가면 아저씨한테 꼭 갈게요. 그리구요, 저 나중에 결혼할 때요. 아저씨가 아빠처럼 손잡아 줘야 해요. 꼭이요.”

운전중이던 나는 정희가 하는 말을 듣고 가슴이 꽉 막혀 달리던 차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안건모 월간 「작은책」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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