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11월 2011-11-04   2946

위대한 시민-강은식 세진인쇄 사장

세진 아저씨

 

 

강지나참여사회』시민기자

을지로에서 인쇄업을 30년 가까이 하고 있는 강은식씨는 수많은 사회단체의 상근자들 사이에서 그냥 ‘세진아저씨’로 통한다. 친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미소, 구수한 말투, 투박한 듯 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칼 같은 그는 사회단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식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재야단체 전담 인쇄소로 시작

서슬퍼렇던 유신정권기, 형님인 故강은기씨가 학교 친구였던 이해학 목사(주민교회)의 부탁으로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소책자를 찍어내면서 세진 인쇄소는 시작되었다.

  “그 당시는 기독교단체들이 유신 반대활동을 많이 했으니까 그런 인쇄물을 많이 찍었어. 그런데 다른 인쇄소에서는 안 찍어주는 유인물을 우리는 찍어주니까 자꾸 재야단체들이 계속 찾아오는 거야. 결국 반정부적인 인쇄물을 전담하게 된거지.”

  80년 5월 광주항쟁 관련 최초의 자료집, 동아·조선투위 유인물, 5·3 인천항쟁 유인물 등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인쇄물을 찍어 낸 곳이 모두 세진인쇄였다. 인쇄물을 뺏으려는 경찰과 안 뺏기고 무사히 전달하려는 세진인쇄와의 스릴 있는 전쟁이 매일같이 을지로 골목에서 이뤄졌다. 그런 과정에서 형님인 故강은기씨는 계엄법 위반으로 3년 형을 선고 받고 투옥되기도 했다. 

세진아저씨.jpg

  
  “사실 고생은 돌아가신 형님이 다했지. 경찰서를 수없이 들락날락 거렸으니까. 그래도 인쇄업이 먹고 살기 위한 생계수단이니까 두 형제를 한꺼번에 잡아가진 않더라구. 형님을 잡아가면 날 놔두고, 날 잡아가면 형님은 놔두고 그랬어.”

  사람 좋고 의기 있었던 故강은기씨는 인쇄노동자로서 투철한 민주화투쟁의 삶을 사셨지만, 영업 수완은 전혀 없었다. 외상 장부는 쌓여만 갔고, 빚은 나날이 늘었다. 따로 인쇄기술을 배워서 형님에게서 독립한 세진아저씨는 그런 형님의 사업스타일에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에 인쇄비를 들고 오지 않으면 아예 찍어주지 않는 냉정한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한 단체의 실무자가 먼저 나한테 왔다가 퇴짜를 맞았는데 위층에 형님이 계신 사무실로 올라가는 거야. 그러더니 형님한테 바로 전화가 와. 그냥 찍어주라고…(웃음)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지.”

  형님 故강은기씨는 지난 2002년, 아직 왕성히 활동할 나이에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분의 유해는 다른 민주열사들과 함께 모란공원에 모셔졌다. 故강은기씨의 딸, 즉 세진아저씨의 조카인 강신영씨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아 현재는 기획, 편집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노력에 아버지의 부채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격동과 함께하다

80년대 활동자금이 부족해 외상으로 인쇄를 해 가는 사람들은 좋은 시절이 오면 꼭 보은하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지금은 국회의원도 되고, 정부관료가 되기도 했지만 그 옛날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히려 90년대 이후에 생긴 부스러기선교회나 볼런티어21, 참여연대 같은 사회단체들은 꾸준히 거래를 하고 있지만, 재야단체들의 경우에는 없어진 단체도 많고 과거 재야인사가 정부기관에 들어가서 세진인쇄와 거래를 한번 트게 되더라도 담당자가 바뀌면 거래가 끊기기 일쑤였다.

 
  이렇게 30년간 해온 인쇄업은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사회운동의 흐름을 몸소 체험하는 과정이었다. 군부독재기에는 범민련이나 반정부단체들이 주요 고객이었고 김영삼정부가 들어서자 시민운동을 하는 사회단체들이 주요 고객이 되었다. 세진아저씨가 체감하는 사회운동은 점차 반정부운동에서 시민들의 생활세계로 들어가는 전문적인 활동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런 변화를 세진아저씨는 대안적이고 시대의 흐름에 잘 맞는 운동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주로 거래하는 대부분의 단체에 후원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이후 시민단체들이 어려워지자 세진아저씨의 영업도 뚝 끊겨버렸다. 하도 답답해서 단체들을 한번 순회했는데 단체들이 하나같이 어려운 사정을 호소했다고 한다. 아저씨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참여연대와 했던 작업 중에 세진아저씨에게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았던 일은 2000년 낙선운동이다.

  
  “그때 문혜진 간사가 전화하고 매일 새벽 4시에 인쇄를 맡기러 왔었어. 원래 작업은 밤에 많이 하는데, 그때는 새벽에 나와서 아침까지 맞춰서 인쇄해주느라 힘들었지. 그래도 낙선운동에 참여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재미있긴 했었지.”

 
  인쇄물이란 약속한 시간에 딱 맞춰서 내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세진아저씨는 시간개념에 있어서는 철저하다.

 
  “한번은 기계에 손이 껴서 검지 손 끝이 찢어졌어. 결국 응급실에 가서 7바늘이나 꿰맸는데, 다음날 아침까지 보내줘야 하는 유인물이 있어서 수술 후에 다시 인쇄소로 와서 새벽까지 찍어서 보내준 적도 있어.”

 
  2000년대 초반 까지만 해도 사회단체의 간사들과 세진아저씨는 훨씬 친밀하게 일했다. 대부분이 직접 와서 인쇄물을 맡기고 찾아갔었기 때문에, 얼굴 보고 서로 얘기도 나누고, 세진아저씨가 주문해주는 배달 다방커피도 함께 마시곤 했다. 실제로 세진아저씨는 초창기부터 일했던 참여연대 상근자들을 거의 다 알고 있다. 요즘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편화되어서 전화나 이메일로 인쇄를 부탁하기 때문에 얼굴도 모르고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다.

 

인쇄공동체에서 진보공동체로

인쇄골목으로 유명한 을지로는 소규모로 운영되는 다양한 점포들이 있는데, 그 안에는 분업체계가 확실히 자리잡고 있다. 옵셋, 제본, 필링, 마스터, 택배 등 한 종류의 기계설비만 전문적으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다른 업소와 공동으로 협력해서 작업을 하는 것이다. 세진도 함께 작업하는  업소가 5개나 있다. 세진은 마스터 기계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옵셋이나 필름인쇄 같은 요청이 들어오면 다른 업소로 일을 넘겨주는 것이다. 단체의 성격에 따른 분업도 있는데, 세진이 사회단체를 담당하면 옆방에 있는 업소는 노동단체를 담당한다. 세진아저씨는 이렇게 5명의 사장님들과 함께 가족처럼 함께 일하고 있다. 

  “매일 점심도 같이 먹고, 저녁에는 반주들도 같이 한잔씩 해. 서로 사는 처지도 비슷하고, 부인들도 서로 친하니까 가족모임도 종종 하지. 일종의 인쇄 생활협동 공동체야(웃음).”

  그 공동체를 확장하면 시민단체들도, 인쇄물을 받아보는 독자나 시민들도 모두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셈이다. 직접 마스터기계를 돌리는 세진아저씨의 손을 통해 사회단체들과 시민들은 진보 공동체로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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