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485] 노란조끼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

노란조끼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

갈등의 새로운 제도화가 필요하다

 

정정훈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
 
대중들의 운동, 민주주의의 모순적 조건

최근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노란조끼 시위가 제2의 68혁명 혹은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민중적 봉기라는 평가를 언론지상에서 종종 접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격세지감의 평가이다. 지난 프랑스 대선 결과 대통령으로 당선된 마크롱은 전형적인 포퓰리스트이며 그나마 그의 당선은 극우파 마리 르펜의 당선은 막아야 한다는 부정적 합의의 결과라고 평가되어 왔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다음 대선에서는 르펜의 집권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 섞인, 그러나 충분히 설득력있는 전망도 나오고 있었다. 포퓰리즘이, 그것도 사실상 우파 포퓰리즘이 기성의 정치제도를 잠식하는 상황에 처한 프랑스에서 갑자기 1789년과 1968년을 잇는다고 자처하는 민중봉기가 발발한 사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것처럼 보이는 노란조끼 시위는 대중들의 운동이라는 민주주의의 근본 조건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란 그야말로 인민(people)의 지배를 의미하며,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일치가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이다. 그런데 인민은 지배자인건 피지배자이건 항상 다수로 존재한다. 그리고 인민의 다수성은 정치의 오래된 고민거리였다.

인민의 다수성이란 인민의 숫자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이해관계나 신념 혹은 욕망이 단일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하다. 다수의 인민이 지배자로서의 자신의 권한을 직접적으로 온전히 행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민의 지배권을 대표하는 직업적 정치인들과 관료들로 구성되는 정치 제도를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인민의 다양한 이해관계, 욕망, 신념의 복잡성을 제도 정치가 전부 매개하고 대표할 수도 없다. 정치적 대표자와 주권자 인민 사이에는 항상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인민은 다수성은 정치적 대표제도에 대해서 언제나 과잉일 수밖에 없다.

포퓰리즘이란 바로 인민의 다수성과 정치적 대표제 사이의 간극으로부터 발생하는 정치운동의 한 형태이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기존의 정치제도에 의해서 자신의 이해관계나 신념이 제대로 대표되지 못하고, 기성의 제도 정치는 엘리트들의 기득권 보장 체제라는 감각이 대중들 사이에서 팽배해질 때 포퓰리즘이라는 정치현상이 나타난다. 기존 제도정치권에 맞서는 인민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다고 대중들이 믿는 인물이나 세력이 등장하면 정치적 포퓰리즘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들의 운동이 항상 포퓰리즘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어떤 정치적 대표나 매개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인 요구로 나타나거나 심지어 기존의 제도 자체를 파괴하는 폭동이나 혁명과 같은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정당과 같은 제도 정치에 편입되지 않지만 제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운동의 방식으로 대중들의 운동은 전개되기도 한다.

최근 중요한 관심사가 된 정치적 포퓰리즘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야 한다. 인민, 혹은 대중들에 기초한 정치체제에서 대중들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상수이고, 포퓰리즘은 그 운동이 취할 수 있는 여러 형태들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대중들의 운동을 부정하고 오로지 대표제의 합리성만을 강조하는 입장은 그래서 엘리트주의적 정치관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대중들의 운동이 갖는 즉각성/직접성(immediacy)의 힘에 대한 열광은 대중들의 자신에 의한 민주주의의 파괴 가능성을 제어할 수 없는 위험성을 배태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대중들의 운동에 기초를 두어야 하지만, 대중들의 운동만으로 민주주의의 안정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작은 포퓰리즘들의 시대

그래서 대중들의 운동은 민주주의 ‘모순적’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대중들의 운동은 포퓰리즘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매우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지역주의가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한국정치에서 포퓰리즘은 변수라기보다는 상수였고, 정상적 정치로부터의 탈궤라기보다는 한국적 정치의 상궤였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정치가 포퓰리즘에 의해 완전히 압도되거나 포퓰리즘적 운동이 결정적으로 한국의 정치지형을 규정해온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포퓰리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부상하고 있는 지금에도 한국사회의 향로에 관건적 역할을 행사하는 거대한 포률리즘적 운동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극기부대 등의 우파 포퓰리즘적 현상이 존재하는가 하면, 소위 개혁진영의 달빛기사단 등과 같은 문재인 팬덤 혹은 노무현주의 대중운동이 포퓰리즘적 정치운동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포퓰리즘적 운동도 한국 정치지형에 결정력을 행사할 만큼 큰 영향력을 확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다양한 상징들에 의해 결집되는 작은 포퓰리즘들이 각축하는 시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태극기부대나 보수기독교 우익 대중운동, 노무현주의 대중운동들 그리고 여러 정치인 팬덤들과 같은 작은 포퓰리즘들이 제도 정치의 영역에서 각축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 정치의 영역만이 아니라 또 다른 사회적 갈등의 영역에서도 작은 포퓰리즘적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페미니즘의 대중적 실천에 반대하여 남성의 권리와 반페니즘의 명분하에 집결하는 남성 대중운동, 동성애 및 성소수자에 대한 증오에 기초하여 결집하는 기독교 대중운동, 한국남성들만이 아니라 성소수자와 난민들에 대한 증오를 분출하며 결집하는 생물학적 여성 대중운동과 같은 현상들이 현재 한국사회를 역동을 구성하는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대중운동’들은 제도정치에 의해 충분히 매개되지 못하거나 매개될 수 없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도 정치의 절차를 우회하거나 그것을 부정하며 직접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제도 안에 직접적으로 기입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그 어떤 운동도 아직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 온오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이 운동들은 분명 한국사회의 중요한 쟁점들을 놓고 격돌하고 있는 중이다. 그 격돌이 어떻게 결론 나는가에 따라 한국사회의 성격 역시 재규정되겠지만, 그렇다고 대중들의 거대한 집결을 이끌어낼 만한 큰 포퓰리즘은 아직 등장하지는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제도 정치의 기능 부전 내지는 무능력으로 인하여 포퓰리즘적 현상은 사회적 갈등의 영역에서 확산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도 정치 영역을 잠식할 수 있는 거대한 포퓰리즘 운동은 등장하지 않은 상태. 바로 작은 포퓰리즘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닐까?

갈등의 새로운 제도화

대표제 정치의 핵심은 사회적으로 갈등하는 당사자들이 직접적으로 충돌하여 그 갈등을 해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대표자들의 매개를 통해서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절차에 있다. 즉 갈등의 제도화야말로 대표제의 핵심이고 대표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갈등들이 매개될 수 있어야 한다. 반드시 꼭 그러한 것만은 아니지만, 포퓰리즘은 갈등들이 제도의 영역에서 자신 매개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경우에 활성화된다고 할 수 있다.

작은 포퓰리즘들의 시대라는 현재 국면에서 대중들의 운동에 기초하면서도 대중적 행동의 직접성/즉각성(im-mediacy)으로 복귀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기예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결국 대중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다시 정치 제도 안에 매개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즉 갈등을 어떻게 다시 제도화할 것인가가 현재의 국면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를 버전업하기 위한 중요한 물음이라는 말이다. 나는 물음에 답변하기 위한 중요한 방향 가운데 하나가 선거 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승자독식형 소선거구제가 아니라 연동형 비례대표제와 같은 선거제도는 대중들의 자발적 운동이 갖는 에너지를 일정하게 제도 정치의 회로 안으로 끌어들이고,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다양하게 매개하여 제도적으로 해결해가는 하나의 방안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들의 역량과 역동에 기대면서도 대중들의 정념을 어떻게 순치해갈 것인가라는 민주 정치의 오래되고, 복잡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또한 지난한 고민과 복잡한 사고 그리고 치밀한 실천을 통해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그러한 답변을 모색해 가기 위한 하나의 가능한 길이다. 하지만 지금의 국면에서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도입도 대중들의 운동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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