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참여연대 공식일정+ 더보기

참여사회연구소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소입니다

  • 시민정치시평
  • 2019.10.11
  • 1052

광장 민주주의의는 정말 지옥문을 열었나?

시민은 우민(愚民)이 아니다

 

진시원 부산대학교 교수

 

광장 민주주의를 놓고 우려와 비판이 나오고 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TV조선 뉴스에서 광장과 광장이 충돌하는 지옥문이 열리려 한다고 진단했고, 이진우 포스텍 교수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작금의 광장 민주주의가 파시즘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맞는 말인가?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이 글에서 필자는 광장 민주주의의 활성화가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위기인지, 광장 민주주의는 나쁘고 위험한 것인지, 지식인의 광장 민주주의 비판은 근거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정의, 공정, 윤리, 성찰, 내적 비판은 진보만의 가치인지를 순차적으로 살펴보고, 결론에서 지금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무엇인지 짚어본다.

 

1. 광장 민주주의의 활성화가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위기인가?

 

지금 상황은 정치의 위기이자 민주주의의 위기가 맞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위기인 것은 광장 민주주의가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세대결을 하면서 직접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정당정치와 의회정치가 실종되면서 대의 정치가 파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광장에서 진보와 보수의 세대결이 가열되면서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틀린 주장이다. 지금의 위기는 광장 민주주의 때문이 아니고 광장을 메운 시민들이 야기한 것도 아니다. 지금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대의 민주주의와 선출된 정치인들의 잘못이 야기한 것이다. 선출된 정치인들은 정치의 실종과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참회하고 책임져야 한다.

 

2. 그러면 지금의 광장 민주주의는 나쁘고 위험한 것인가?

 

시민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는 광장 민주주의는 시민주권의 표현이다. 나쁜 것이 아니다. 지금 광장 민주주의가 활성화된 것은 정치인들이 정치를 실종시키고 대의를 못하니 주권자 시민들이 광장에서 시민주권을 직접행사하며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다만 지금의 광장 민주주의는 위험한 측면이 존재한다. 광장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계몽된 시민, 즉 '좋은 시민성'을 지닌 시민들이 광장을 메워야 한다. 돈 받고, 동원되고, 정종(政宗) 분리를 못하고,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시민은 광장 민주주의를 누릴 자격이 없다.

 

진보와 보수가 서초동과 광화문 광장에서 시민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나쁜 것도 아니고 위험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차피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진보와 보수 진영이 광장 민주주의를 한동안 펼치게 된 상황이라면 서로 '좋은 시민주권'과 '좋은 시민성'을 표출하며 성숙한 광장 민주주의를 보여주면 좋겠다. 광장 민주주의와 시민주권 민주주의를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성숙한 우리 시민들은 그럴 능력과 자질이 있다고 본다.

 

3. 지식인과 선출된 정치인은 광장의 시민보다 우월한가?

 

윤평중 교수는 광장 민주주의가 보수와 진보의 세 대결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이제 광장에 대한 열정을 절제하고 대의 민주주의를 중심으로 정치를 복원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진우 교수는 작금의 광장이 보수와 진보 간의 힘의 전시 공간이 되면서 파시스트 중우정치가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주장은 맞는 말인가?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필자는 이들이 왜곡된 엘리트주의에 빠진 지식인이라고 본다. 2016~17년 촛불은 광장의 시민들이 좋은 시민성을 지닌 시민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시민들도 극단적인 사람들을 제외하고 다수가 성숙한 시민이다. 필자는 윤 교수와 이 교수에게 묻고 싶다. 2016-17년 광장의 시민들과 달리 지금의 광장 시민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을 근거로 서초동과 광화문 광장을 메운 시민 몇 백만 명을 그리 쉽게 불신할 수 있으며 이 교수는 어찌 광장 시민들을 파시스트 중우(衆愚)라고 모욕하고 있는가?

 

특히 윤 교수의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오해와 일관성의 부재에 다름 아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는 이명박 정부가 한미 FTA를 위해 미국이 요구한 안전성에 문제가 있는 미국산 쇠고기 시장개방을 급작스럽고 일방적으로 수용하면서 야기되었고, 촛불집회가 활성화된 이유는 이명박 정부가 경찰버스로 차벽을 치면서 소위 말하는 명박산성을 광화문에 구축했기 때문이었다. 즉 2008년 촛불집회는 국민과 불통하고 한미 FTA를 국민의 건강보다 우선시하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정당한 저항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윤 교수는 촛불집회가 광우병에 대한 과도한 공포감 때문에 야기된 것이라며 사실과 합리성에 근거하지 않은 촛불집회라고 폄하했다. 그러던 윤 교수는 2016~2017년 촛불집회는 국민이 주체이고 국가가 객체임을 선포한 경이로운 평화축제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번 2019년 서초동 촛불에 대해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조국 수'호라는 점을 들어 비판적 의지를 드러내며 감성적 진성성은 있으나 객관적 사실성과 규범적 정당성이 없어 보편적 타당성은 결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제는 급기야 광장과 광장이 충돌하고 지옥문이 열리려 하니 촛불을 자제하고 대의 민주주의를 복원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윤 교수의 2019년 서초동 촛불집회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이고 옳은가? 그렇지 않다. 우선 서초동 촛불집회는 2016-17년 촛불집회처럼 평화롭고 축제 분위기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서초동 광장에는 조국 수호 시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검찰개혁 시민도 존재한다. 단순한 예로, 7천여 명의 교수와 연구자들은 조국수호가 아니라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서명을 벌였다.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수많은 서초동 광장 시민들이 윤 교수의 눈에는 그냥 유령으로 보인다는 말인가?

 

이렇듯 윤 교수의 촛불과 광장 민주주의에 대한 평가는 일관성이 부재하며 자의적이다. 시류와 대세에 편승하여 객관적이지 않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본 결과물이다. 필자는 윤 교수의 이러한 태도는 자신의 판단만이 옳고 맞다는 근거 없는 지적 우월주의의 표출이자 대중의 집단지성에 대한 무시와 불신과 폄하가 야기한 왜곡된 엘리트주의의 산물이라고 본다.

 

필자는 21세기 한국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와 참여 민주주의, 엘리트 민주주의와 시민주권 민주주의가 서로 보완과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좋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상황의 핵심 문제는 광장 민주주의의 과잉이 아니라 대의 민주주의의 실종이라고 본다. 그래서 시급한 과제는 광장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 민주주의를 꽃피게 만들고 대의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윤 교수와 이 교수의 주장은 근거 없고 균형감을 상실한 엘리트 중심주의에 다름 아니다. 윤 교수와 이 교수가 광장에 모인 수백만 시민들을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며 파시스트적 행태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쉽게 낙인을 찍을 자격은 도대체 어디서 생긴다는 말인가? 두 교수는 진정 플라톤이 청년기에 주장한 우월한 철인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작금의 시민들은 우민(愚民)이 아니다. 좋은 시민성을 상당 부분 지닌 성숙한 시민이다. 2017-18년 촛불은 이런 시민을 만든 것이다. 윤 교수와 이 교수는 더 이상 시민과 시민주권 민주주의를 모욕하지 말기 바란다.

 

4. 정의, 공정, 윤리, 성찰, 내적 비판은 진보만의 가치인가?

 

지금 보수 진영에는 비판적 보수, 성찰하는 보수가 없다. 반면, 진보 진영에는 진중권, 금태섭, 우석훈, 박용진 등이 존재한다. 진보 진영에서 이들을 배신자라고 비판하는 것은 그래서 좋은 태도는 아니다. 그런데 이렇듯 진보 진영에는 내부 비판세력과 성찰 세력이 있는데 반해 보수 진영에는 이런 세력이 없다. 이건 좋은 상태가 아니다. 정의, 공정, 윤리, 성찰, 내적 비판은 진보 진영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지금 보수는 극우보수와 수구 보수가 주류이고 합리적 보수, 대안 보수, 개혁 보수는 사라졌다. 바른미래당 소속 바른정당계는 개혁 보수를 상실한지 오래되었다. 한국당 내에서도 수구와 극우 보수 세력을 빼고 나머지 세력들은 모두 침묵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결국 보수 세력에게 좋은 일이 아니다. 보수도 정의, 공정, 윤리, 성찰, 내적 비판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자유민주주의 정당이다. 합리적 보수, 대안 보수, 개혁 보수가 살아야 보수정당 한국당이 살고, 보수 정당이 살아야 한국 정치가 산다. 대의 민주주의를 파산하게 만든 한국당 의원들은 반성하고, 동원과 폭력과 금품이 오간 광화문 광장 민주주의를 성찰하기 바란다.

 

5. 그럼 누구 책임이고 누가 먼저 양보해야 하는가?

 

한국당은 20여 차례의 국회 보이콧 그리고 여러 번의 장외 투쟁를 벌여왔다. 국회를 무력화하고 정치를 실종하게 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치가 실종되었고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광장정치가 판을 치고 있으니 대통령과 여당이 국정운영의 책임을 갖고 먼저 양보하고 대책을 내놓으라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원인과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해야 답안이 나온다. 원인과 결과의 선후관계를 모르면 그건 정답이 아니다. 정치의 실종은 한국당이 주도했는데 정치 실종과 정치 위기의 책임은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과 민주당이 먼저 지라고? 이건 적반하장이다. 대의 정치를 복원하고 여야가 공동 책임을 져야한다.

 

6. 시급히 대의 정치를 복원하고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성숙한 시민주권이 표출되게 하라

 

한국당은 국회로 돌아오고, 여야는 정쟁이 아니라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하라. 광장 민주주의가 위험하다느니 그만두라느니 하는 거짓되고 오만한 주장은 그만두라. 대의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시민주권 민주주의와 광장 민주주의를 폄하하지 말라. 서초동과 광화문에서 성숙한 시민주권이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표출되게 하라. 그리고 광장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극소수의 시민들은 성찰하기 바란다. 알바와 막말과 폭력과 가짜뉴스로 자신의 주권을 헐값에 팔아먹는 사람들은 시민주권 민주주의의 주인이 아니다. 이게 필자의 주장이다.

 

 

참여사회연구소는 2011년 10월 13일부터 '시민정치시평'이란 제목으로 <프레시안> 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참여사회연구소는 1996년 "시민사회 현장이 우리의 연구실입니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참여연대 부설 연구소입니다. 지난 19년 동안 참여민주사회의 비전과 모델, 전략을 진지하게 모색해 온 참여사회연구소는 한국 사회의 현안과 쟁점을 다룬 칼럼을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과 만나고자 합니다. 참여사회연구소의 시민정치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책임지는 정치를 말합니다. 시민정치가 이루어지는 곳은 우리 삶의 결이 담긴 모든 곳이며, 공동체의 운명에 관한 진지한 숙의와 실천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입니다. '시민정치시평'은 그 모든 곳에서 울려 퍼지는 혹은 솟아 움트는 목소리를 담아 소통하고 공론을 하는 마당이 될 것입니다. 많은 독자들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같은 내용이 프레시안에도 게시됩니다. 목록 바로가기(클릭)

 

* 본 내용은 참여연대나 참여사회연구소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참여와 행동에 동참해주세요
참여연대 회원가입·후원하기
목록
제목 날짜
[수상공고][논문공모전] 2019민주주의 논문공모전 new 2019.11.13
[시민과세계 34호] 포퓰리즘과 민주주의 2019.07.15
[원고모집] 《시민과 세계》35호(2019년 하반기호)(~11/15) 2019.03.21
[알림] <시민과 세계> 등재후보지 선정 2018.10.16
《시민과 세계》 소개 및 보기 2013.04.01
[소개] 참여사회연구소를 소개합니다 2019.02.23
[시평 523] 기업이 내 동의 없이 내 정보를 가져다 쓴다?   2019.11.13
[시평 522] 전쟁무기 박람회, 한번 망쳐보자   2019.11.07
[시평 521] 정시 확대, 사교육 폭증은 어떻게 막나   2019.11.02
[시평 520] 조국 사태, 그리고 '진보 정치'가 사는 길: 도덕 정치의 덫에 갇힌 진보정...   2019.10.21
[시평 519] '도덕 정치'의 덫: 도덕 정치의 덫에 갇힌 진보정치는 미래가 없다·上   2019.10.19
[시평 518] 광장 민주주의의는 정말 지옥문을 열었나?   2019.10.11
[시평 517] 조국의 정치와 조국의 도덕성   2019.10.07
[시평 516] 더 비싸고 더 복잡하더라도 더 동등한   2019.09.20
[시평 515] 인천공항의 젊은이들은 일과 삶에 만족할까요?   2019.09.06
[시평 514] 매년 2400명의 故김용균...특조위 권고 제대로 이행돼야   2019.09.02
[시평 513] 관제 민족주의? 반일 종족주의?   2019.08.17
[논문발표회]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적인가?   2019.08.12
[시평 512] 일본 전범 기업들의 반격 카드, ISDS   2019.08.12
[시평 511] 샌프란시스코 조약 뒤에 숨은 일본   2019.07.30
[시평 510] 최저임금 '참사'를 되짚다   2019.07.17
[참여사회포럼]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가능성 - 쟁점과 과제(07/17)   2019.07.08
[시평 509] 새로운 민주주의, 뭉쳐야 산다   2019.07.08
[시평 508] 서울의료원의 죽음들을 돌이켜보며: 누구를 위한 인권인가?   2019.06.27
[논문공모전] 2019민주주의 논문공모전(종료)   2019.06.24
[시평 507]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는 청계천 복원 복제품?   2019.06.19
[시평 506] 플랫폼의 약탈, 그렇다면 플랫폼 협동조합은 어떨까?   2019.06.13
[참여사회포럼] 한국 복지국가, 무엇이 문제인가?   2019.06.11
[시평 505] '태극기'와 '촛불'은 함께 존재하고 있다   2019.06.10
© k2s0o1d4e0s2i1g5n. Some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