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소리]”삼성공화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2005-08-08]

“삼성공화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민중의소리] 삼성의 설립에서 “삼성공화국”까지

2005/8/8
민중의소리
국내 최고의 기업. 외국 투자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기업. 대학생이 가장 일하고 싶어하는 기업. 바로 ‘삼성’에 대한 보편적인 국민들의 인식이다.

국내 총생산의 17%, 수출액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국내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삼성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이번 X파일 보도로 드러난 ‘삼성의 검은 실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실.

‘삼성공화국’이란 신조어가 생기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일부의 시민들은 “그래도 삼성을 처벌해선 안된다”, “경제도 어려운데 삼성이 처벌되면 어떻게 되겠냐”며 삼성을 감싸려는 모습마져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삼성은 과연 국내 최고의 기업이고, 국민들에게 보호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선 삼성의 역사와 ‘현재의 명성’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영웅시대’의 조기종영은 ‘삼성의 실체’ 바로볼 수 있는 계기

삼성의 역사를 확인하기 앞서 에서 올해 초 방송됐던 드라마 ‘영웅시대’가 결국 역사왜곡 논란 끝에 애초 계획보다 굉장히 일찍 종영된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삼성과 현대 등 재벌가의 일대기를 통해 한국 경제 발전사를 조망하려 했던 드라마 ‘영웅시대’는 시작 전부터 ‘정치권의 외압’ 논란이 일었고, 결국 방영내내 따라 다녔던 ‘근현대사 왜곡’과 ‘인물 미화’라는 한계를 넘지 못하고 조기종영 됐다.

영웅시대의 조기종영 사건은 국민들이 보편적으로 바라보는 ‘삼성’에 대한 이미지가 ‘실제와는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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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8월 16일 한국경제인협회는 초대 회장에 이병철 씨를 선임했다.

전반전, ‘삼성공화국’이라는 명성을 얻기까지

<삼성의 역사는 87년 타계한 고 이병철 전 회장의 인생과 궤를 같이 한다. 이병철 회장은 일제 하인 1936년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차리며 사업을 시작,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연다. 해방 이후 부산에서 무역업체인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생산업체인 제일제당을 설립하며 본격적 사업 확장을 시도. 제당과 모직에서 대성공을 거둔 이 회장은 시중은행, 비료업체, 타이어 등의 사업에서 대주주가 되어 재벌의 상징으로 부상하기 시작. 전자 엔지니어링 무역 금융 등에 진출 거대재벌기업을 탄생시킨다>

이상이 보통 국민들이 인식하고 있는 ‘삼성이 재벌로 성장하는 역사의 큰 줄기’일 것이다. 역사적 배경에 위와 같은 사실을 도입해 본다면 국민들이 생각하는 ‘삼성의 보편적 이미지’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는 원인들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삼성이 재벌로 발돋움하던 해방 이후, 이병철 회장이 유지하던 정권과의 관계는 X파일로 밝혀진 정-재-언-검의 검은유착과 별반 달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하에 있던 1936년 이병철 회장이 첫 사업 후보지로 마산을 선택한 이유는 수탈된 쌀의 집결지가 마산이라는 점이었다. 이 회장은 정미업과 함께 운송업을 시작했고 이는 ‘수탈된 쌀을 일본으로 보내는 과정을 원활히 해 발생하는 이윤을 추구하는 행위’였다.

이 회장은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통해 “독립을 위해 투신하는 것 못지 않게 국민을 빈곤에서 구하는 일이 또한 시급하다”며 사업에 뛰어든 배경을 밝혔지만, 일제의 수탈을 원활히 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는 듯 하다.

해방 이후 전쟁 인플레로 물자가 부족하던 1953년 이 회장은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 무역업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긴 후 “국민의 일상적인 필수품을 언제까지나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면 해외의존의 국민생활이나 경제체질을 영원히 탈피할 수 없다”며 설탕, 밀가루, 면화 등의 소비재 산업에 진출한다.

이는 당시 민중들이 생활필수품과 의약품 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던 상황에 비춰본다면 ‘독점재벌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회장은 제일제당 사업과 관련 호암자전에서 “사업 취지에 대한 상공부 등 관계당국의 이해와 지지로 18만불, 그리고 내자의 부족분은 상공은행의 이상실 행장이 선뜻 2천만환의 융자를 허락해 가능했다”고 밝혀 정권과의 검은 거래를 유추케 한다.

실제로 4.19혁명을 촉발시킨 계기가 됐던 1960년 자유당 정부의 3.15부정선거 관련 검찰수사에서 이 같은 의혹은 사실로 확인된다. 315부정선거와 관련 삼성물산이 정치자금으로 3억원을 제공한 것.

또한 삼성그룹 계열의 한국비료가 사카린 원료 OTSA 60톤을 건축자재로 가장해 일본으로부터 들여와 판매한 사건이 언론에 의해 발각됐고, 이 사건으로 이 회장은 라디오 서울과 동양 텔레비전 방송, 그리고 ‘중앙일보’를 세우며 언론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해방 이후 고 이병철 회장은 주요은행의 지분을 50% 이상 잠식하며 설탕 등의 독점 소비재 사업에서 발생하는 이익 중 많은 부분을 부동산에 투기한다. 결국 거대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었고 이에 기반한 문어발식 확장을 시도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 시절 정부의 전폭전 지원으로 삼성전자를 설립하며 호텔 신라,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 등을 연이어 설립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취임하며 재벌의 문어발식 사업확장을 금지하는 9·27조치에도 불구 결국 삼성은 삼성반도체, 삼성정밀, 삼성시계, 동립산업, 조선호텔 등 10여 개 기업을 설립하거나 인수하며 현대를 추월 재계 1위의 자리를 점령해 ‘삼성공화국’을 완성하게 된다.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이어진 독재정권과 삼성의 검은 유착은 삼성이 거대재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고, 삼성은 ‘삼성공화국’의 완성과 더불어 인맥과 혼맥을 이용한 ‘삼성공화국 굳히기’를 시도하기에 이른다.

후반전, ‘삼성공화국’ 대물림을 위한 삼성 일가의 정략적 결혼

참여사회연구소
재벌들의 인맥 혼맥.

유력집안과의 혼인으로 그들의 성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얘기에서 삼성도 예외가 될 순 없다. 삼성공화국의 대물림을 위한 ‘1촌 맺기’는 고 이병철 회장의 직계후손과 이건희 회장 세대로 나뉘어 진행되고 무너질 수 없어 보이는 ‘족벌체제’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고 이병철 회장은 슬하에 4남 6녀를 뒀고, 장남 맹희씨는 1958년 손영기 농림부 양정국장의 딸 복남씨와 결혼, 차남 창희씨는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만난 일본인 나카네 히로미씨와 결혼, 3남 건희씨는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쳐 중앙일보 회장을 지낸 홍진기씨의 장녀 나희씨와 결혼, 큰딸인 인희씨는 고려병원(현 삼성강북병원) 고문을 지낸 조운해씨와 결혼, 차녀 숙희씨는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결혼, 넷째딸 덕희씨는 이정재씨의 아들 종기씨와 결혼, 다섯째딸 명희씨는 국회의원과 삼호방직 및 삼호무역 회장을 지낸 정상희씨의 차남 재은씨와 결혼했다

삼성이라는 ‘족벌가문’의 혼사치고 조촐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혼사를 통한 혼맥보다는 사돈과 사돈의 사돈으로 이어지는 혼맥을 따져보면 삼성을 중심으로 ‘한다하는’ 집안들의 연결이 집중돼 있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실제로 몇 다리 건너면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과도 사돈으로 연결된다.

이병철 회장이 타개한 뒤 4남 6녀중 삼남인 이건희 회장이 삼성그룹 회장으로 등극하며 본격적 분가작업을 시작, 보광, 한솔, 신세계, 제일제당, 새한 등이 계열을 분리하지만 혈맥과 혼맥을 중심, 삼성으로 집중되고 있다.

민중의 소리 박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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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8일 오전 10시 13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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