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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년 04월
  • 2015.04.02
  • 1692

긴 호흡, 강한 걸음

정강자 참여연대 공동대표


정리   이선희
인터뷰   박정은
사진   박영록

 

참여사회 2015년 4월호 (통권 221호)

 

“많이 부족하지만 참여연대와 함께하는 분들을 믿고 기쁜 마음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지난 3월 7일 총회에서 정강자 신임 공동대표는 쑥스러운 듯 회원들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고발연대’, ‘참견연대’, ‘불독’…. 별명도 사나운 참여연대는 부드러운 인상과 성정을 가진 또 한 분의 대표를 모시게 되었다. ‘편안한 어머니’ 같은 인상이라는 말에 정강자 대표는 함께 일했던 동료, 후배들이 들으면 웃을 거라며 손을 가로저었다.
실제 정강자 대표는 학생운동을 거쳐 도시산업선교회 활동가,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등 오랫동안 시민사회와 국가기관에서 활동한 이력을 가진 강단 있는 분이다. 역시 사람은 외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될 일이다. 봄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3월의 어느날 오후, 카페통인에서 정강자 대표를 만났다.

 

참여연대 대표가 된 지 보름 정도 됐는데, 어떠셨어요?
“제가 한국여성민우회 대표였을 때보다 현재 참여연대가 훨씬 다양하고 깊게 연대활동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두 가지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하나는 참여연대 활동 방향에 변화가 있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시민단체가 처해있는 조건이 나빠졌기 때문이겠죠. 이전에는 단소리든 쓴소리든 어느 정도 소통이 됐고,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소통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다시 초기 자세로 돌아와서 애써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아요. 시민사회에 던져지는 정치, 경제, 사회를 비롯한 모든 이슈들에 대응하고 담론을 개발하고 실행해야 하는 한편, 더 어려워진 시민의 삶에 구체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참여연대에게 요구되고 있다는 거죠. 총회와 두 번의 상임집행위원회 회의를 거치면서 참여연대가 해야 할 몫이 더 늘어났구나, 훨씬 더 힘들어졌구나 생각했어요.”

 

요즘은 성명이나 논평 같은 활동만으로는 언론이나 정부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습니다. 문제가 발생하는 현장으로 더 가까이 가야한다고 느끼고 있어요.
“그런 경향이 읽혔어요. 때로는 한정된 인적·물적 자원을 어떻게 나눠쓸 것인지의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겠지만, 그것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 모두가 내린 결론인 것 같아요. 그래서 어깨가 무겁다는 생각이 들죠.”

 

정말 어깨가 무거우실 거 같아요.
“저보다는 실무자들이 힘들죠. 대표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적은 조직이 참여연대잖아요.(웃음)”

 

참여연대가 연대사업도 많고 회원행사도 많기 때문에 대표님들도 수고가 참 많으세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표들보다는 실무자들이 어깨가 무거울 것 같아요. (웃음)”

 

너나 할 것 없이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하는 시간 속에 있다. 국가기관이 대통령 선거에 불법개입하고, 정당이 강제 해산됐다. 어느 날 갑자기 북한 간첩으로 몰리는 시민이 있는가 하면, 북한과 무관한 말을 해도 ‘종북’이라 딱지 붙인다.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는 건 이제 일상이 되었다.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해고되고, 자신의 ‘열정’을 담보로 임금을 마다해야 겨우 일할 수 있는 세상이다. 팍팍해진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활동가들에게 나이, 성별, 역할의 구분은 무의미해졌다. 모두가 일당백 이상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70년대 학번인데, 60년대 학번을 보면서 ‘선배들이 활동했을 때는 (활동하기) 좋았던 것 같아. 심지어 요순시절 아니었나?’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후배들이 저희들 시절을 보면서 그렇게 느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과거와 비교해 어려워진 측면이 있긴 하다. 정치권력, 경제권력이 기득권을 지키고 확장하는 방식이 더 노련해졌다. 자본과 이윤 앞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한 다수는 더 노골적으로 자발적인 복종을 강요당한다. 그리고 각자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놓고 더 처절하게 대립하는 양극화 사회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독재 정권에 의한 폭력이 일상을 지배했던 과거를 살아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 시절이 ‘더 좋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학교 다닐 당시가 유신정국이었는데 학내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고 72년도에 서울에 올라왔어요. 입학하면서 유학도 가고, 계속 학문의 길을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대학 들어가자마자 접었어요. 당시 이화여대에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들로 구성된 서클이 있었어요. 거기에서 사회과학 서적으로 공부를 하기도 했지만 사회과학적 인식이 넓어졌다기보다 대학의 현실을 많이 보게 됐어요. 시위하다 군대나 감옥에 끌려간 사람들을 만나게 됐죠. 대학이 내가 생각하는 상아탑과는 거리가 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많은 일들이 터졌었죠. 전에도 학생시위를 하다가 구속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3학년 때 민청학련 사건(1974년 4월에 박정희 정부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공산주의적 인민혁명을 시도한다며 긴급조치 제 4호를 발동하여 대학생과 사회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구속, 기소한 용공조작사건)이 일어났어요. 주변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졌고, 동아일보 지면에 이름이 오르내리더니 사형부터 15년까지 구형을 받는 상황이 있었죠. 이런 상황을 문제제기하는 유인물을 만들어서 대강당에서 낭독하고 뿌리고 그랬었어요.
그 해 연말부터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지원활동을 했어요. 당시는 꼬마부터 어른까지 동아일보가 정말 버텨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힘내라는 광고를 했던 시절이죠. 동아일보는 당시만 해도 시민교육의 장이었거든요. 그래서 도봉산 입구에서 커피를 팔아 성금을 모으기도 했어요.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하고, 해직된 이후) 기독교 방송에서 다 떨어진 이불 덮고 농성하던 분들이 이부영, 정연주, 성유보 선생님 같은 분들이었어요.”

 

참여사회 2015년 4월호 (통권 221호)

대학 졸업 후인 1977년부터는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도시산업선교회는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도시빈민이나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노동조건 개선과 민주노조 건설을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탄압받던 당시, 학생운동 출신들은 도시산업선교회를 기반으로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민주화운동의 중대 기점인 1987년 이후 시민사회운동이 본격화되자, 정강자 대표는 그 해 시민단체 중 하나인 한국여성민우회 창립발기인으로 상담부장을 맡았다. 한국여성민우회는 가정과 직장, 지역사회에서 여성들이 차별받고 소외되는 문제가 비민주적인 사회구조에서 기인한다고 보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중적 여성운동을 주창하고 나선 단체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실제 1989년 생활소비자협동조합 결성과 서울·수도권 지역조직 건설 이외에도 창립초기부터 남녀고용평등, 여성노동권 확보 운동에 집중해왔다.

 

참여연대는 1994년 창립 당시 기존의 민중운동 진영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차별성 있는 활동방식을 취하면서 주목받았는데, 한국여성민우회는 훨씬 일찍부터 생활밀착형 운동 방식을 택한 것 같아요.
“여성민우회가 행보가 빨랐던 거 같기는 해요. 처음에 여성민우회 준비할 때는 빈민, 농촌, 노동 등 각 부문을 다 아우르는 여성연맹 같은 성격의 구조였어요. 그러다가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부조직과 노동조직이 남았죠. 노원, 일산 지역에 지부를 만들어 지역운동을 했는데, 시민에게 다가가는 운동으로 가장 빨리 전환했던 조직이 여성민우회였던 거 같아요. 출범하고 곧 생협을 만들었고, 보통 주부들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가 됐죠. 제가 핵심적으로 활동했던 분야는 노동 쪽이었어요.”

 

참여연대는 시민·회원들의 참여를 높이고 회원들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하고 있지만 전문적인 이슈를 다루는 딱딱한 조직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요.
“얼마 전 총회에서 회원토론 시간이 있었지요? 본질적으로 회원 의견 수렴이나 총회 의결권을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스러운 부분이 있을 텐데, 한국여성민우회의 경우에 대의원제를 두고 있거든요. 조직의 의사결정구조에 회원이 권한을 가지려면 전원총회를 하거나 대의원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 방식을 취한다고 해도 내부 민주주의가 우리가 얘기했던 것만큼 잘 정착되는 것 같지는 않아요. 총회는 축제 분위기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난해 평가와 향후 계획에 대해서 회원 의견을 수렴하는데 한계가 있어요. 현실을 인정하고,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했을 때 저는 축제 방식이 좋다고 생각하거든요.”

 

함께 걷는 한 걸음도 중요하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적 가치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성과에 목 맬 필요는 없지만, 성과 없이 지난한 논의만 반복되는 것은 종종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정강자 대표는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했던 국가인권위원회 활동 과정에서 그런 어려움을 숱하게 겪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하실 때 어떠셨어요?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위한 공대위에서 3년, 비상임 위원으로 3년, 상임위원으로 3년 활동했는데 저로서는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었죠. 국가인권위원회는 한국사회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이에요. 인권을 전담하는 국가기구를 만든 것이고, 그 동력은 온전히 시민들, 운동가들의 힘이었다고 생각해요. 1,2기 때는 크고 작은 갈등이 있긴 했지만 비교적 잘했다고 평가를 받았는데,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인권위의 성격이 많이 바뀌어서 마음이 아프죠. 아직 남아서 버티고 있는 직원들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지켜보는 시민사회 활동가들도 힘들고….”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평등권 침해, 차별 행위를 다루는 차별위원회 활동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그 중에 상당히 많은 기간을 차별금지법안을 준비하는데 보냈어요. 회의만 100번 이상 한 거 같아요. 그 과정에서 정말 많은 힘을 보태준 사람이 이찬진 변호사(현재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님이에요. 어렵게 차별금지법안이 만들어졌는데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에 법안을 직접 제출할 수 없어서 정부 입법안으로 제출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어요. 결국 17대 국회에 제출되었지만, 바로 회기가 끝나면서 처리가 안됐죠.”

 

현재 19대 국회에서도 처리가 안 되고 있잖아요?
“이 법을 가장 불편해 하는 곳이 종교계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재계에요. 차별의 60%가 고용이거든요. 취업부터 퇴직까지 장애·여성·성소수자·인종을 이유로 차별받는데 차별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기 때문에 법안을 마련한 거죠”.

 

참여사회 2015년 4월호 (통권 221호)

국가인권위원회 활동을 마무리하고 오랜만에 다시 시민사회로 돌아온 대표님에게 참여연대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점이 아닐까요?
“처음에는 진짜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어요. 총회장에서 얘기한 그대로에요. 짧은 시간에 많은 고민을 하면서 친한 선후배 몇 사람에게 상의를 했는데, 단 한 명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다시 자세를 가다듬어 보라고 하더라고요. 엉덩이를 계속 빼고 있는 저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얘기들이었죠. 얼마 전 삼성전자 백혈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위원을 맡은 것도 반성적 의미였거든요. (참여연대 대표직도) 그래서 하겠다고 결정했고, 주로 배우고 작으나마 역할을 하겠다고 얘기했죠.(웃음)”

 

어느 회원이 참여사회 내용은 참 좋은데 절망적인 얘기를 많이 다룬다고 아쉬워하더라고요. 회원들에게 희망적인 얘기를 해주신다면요?
“참여연대의 변화 중 하나가 회원이 많이 확대됐다는 거예요. 5천 명, 1만 명을 넘어서는 고비가 얼마나 힘든지 알거든요. 그 수치를 넘는 과정도 힘들고, 다양한 회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도 힘들죠. 하지만 회원이 뿌리로 버티는 조직의 건강함을 알고 있으니까 그 자체가 희망이에요.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90년대 초반 국내에서는 운동의 에너지가 분출되던 시기였지만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이 큰 사건이었는데, 당시 내가 어떻게 흔들리지 않고 계속 이런 활동을 하고 있나 생각했어요. 그건 활동하고 있는 조합원들과의 관계가 버티게 하는 힘이었던 것 같아요.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회원들이 함께하는 튼튼한 조직, 거기에 희망이 있어요.”

 

정강자 대표는 2000년 총선시민연대 당시 함께 활동했던 참여연대를 ‘자기 할 일을 다 하는 조직’으로 기억했다. 일은 잘 하지만 인간적인 따뜻함은 없는 조직, 그동안 참여연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상을 받았을 것 같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참여연대의 2015년 슬로건은 ‘행복한 참여, 따뜻한 연대’다. 다른 조직과의 연대나 시민들의 참여 없이는 어떤 예리한 문제의식도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성찰이 반영된 것이리라.
느려서 별명이 ‘늘낙지’고, 인생의 키워드는 ‘평등’이라는 정강자 대표. ‘행복한 참여, 따뜻한 연대’라는 슬로건에 맞춤한 분이 아닐까. 든든하고 따뜻한 동행자와 함께 올해의 힘찬 걸음을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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