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4월 1999-04-01   1989

흑인이 꽃피운 미국 민권운동의 역사

권리를 위해 투쟁할 때 민주주의는 빛난다

미국 시민운동 역사책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교육』에 있는 민권, 노동, 여성의 권리, 소비자와 환경운동에 관한 역사에서는 공통적으로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강조는 시민활동의 전통에 대해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고 정보를 제공하려는 이해관계에 적합하도록 선택된 것이다. 이들 시민운동에서 성공과 좌절, 그리고 광범위한 전술과 다양한 전략을 조명함으로써 학생들에게 그들의 정부와 민주주의에 있어서 시민의 역할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검토하는 운동이 미국의 역사에서 광범위한 시민운동의 영역을 다 다루면서 시작한 것도 아니고 모두 다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이전에 제기되지 않았던 관심사들을 국가적인 의제로 자리잡게 하였고 각각의 단체들은 기본권을 보장하고 보호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음을 배우는 것이다.

흑인들의 지난한 인권투쟁

미국 헌법은 남북전쟁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노예제를 폐지하도록 개정되었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에도 불구하고 수백년간 뿌리깊어진 인종적인 편견은 없어지지 않았다. 흑인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는 많은 법이 통과되고, 결정이 내려졌지만 이러한 의안 제출은 대부분 흑인들의 삶에 실질적인 효과가 없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Jim Crow(인종차별, 인종 격리정책) 분리 체제 아래에서 흑인들은 남부의 백인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됐다. 남부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우물, 화장실, 철도, 도시락 판매대, 백화점의 탈의실 등 훨씬 많은 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됐다.

대공황 이후 침체된 경제 속에서 흑인 노동자들은 모든 형태의 고용에서 해고됐고 “당신이 일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사지맙시다”라는 캠페인을 벌여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흑인 노동자들은 전시경제체제에서 고용불평등을 금지하지 않으면 10만 명의 흑인 저항자들이 수도로 행진을 하겠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을 위협하기도 했다. 워싱턴으로의 행진(March on Washington)운동은 루즈벨트 대통령으로 하여금 재통합법 발표 이래 처음으로 고용차별을 금지하고 그 집행명령을 따를 것을 보장하는 공정한 고용 실행위원회(Fair Employment Practice Co- mmission: FEPC)를 설립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군인들이 돌아왔을 때 가장 늦게 고용됐던 흑인들은 가장 먼저 해고됐다.

학교에서의 차별철폐를 위한 캠페인

민권을 위해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적 경제적인 평등을 이루는 결정적인 것의 하나로 교육제도에 있어서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흑인의 진보를 위한 전국연합(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 NAACP)은 인종 때문에 메릴랜드 로스쿨에 입학을 거부당한 Donard Gaines Murray사건을 통해 1935년 휴스턴과 마샬은 법정에서 “메릴랜드에 흑인 로스쿨이 없기 때문에 Murray는 백인 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들의 주장은 승리했다. 이러한 승리는 볼티모어 흑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그가 우리에게 헌법을 가지고 온 것은 모세가 그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가지고 온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Brown사건은 Linda Brown이라는 여덟 살짜리 소녀를 포함하는 사건이었는데 그녀는 집에서 단 세 구역 거리에 백인 전용학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전용학교로 가기 위해 1마일이나 걸어다녀야 했다.

미 연방대법원은 1952년에 그 사건을 심의했고, 한 달 동안의 토론으로도 만장일치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1953년에 재논박이 열렸다. 결국 법정은 1954년에 전원합의체 판결을 발표했다. 워렌 대법원장은 “우리는 만장일치로 공공교육에서의 ‘분리하되 평등하다(separated but equal)’는 원칙이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분리된 교육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것입니다.” 마샬은 후에 그 Brown판결이 “아마 다른 어떤 것보다도 흑인들을 무관심에서 그의 평등할 권리를 요구하라고 일깨웠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판결을 실현시키는 것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몇몇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그들의 학교에서 차별을 철폐하기보다는 그들 학교의 문을 닫았다. 이 기간 동안 마샬은 Brown사건을 강화시키는 아칸소 주의 리틀 록에 있는 센트럴고등학교에서 차별 폐지를 시도했던 9명의 학생들 사건을 포함한 사건들을 맡았다. 이 사건은 폭도들이 학교에 도착하는 모든 흑인들을 공격하게 되어 국제적인 뉴스가 되었다. 비록 그 싸움은 언론과 국가가 지켜보는 가운데 끝이 났지만 학생들의 일상적인 전투는 계속되었다. 1958년 6월 리틀록의 아홉 중의 한 명인 Ernest Green은 센트럴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최초의 흑인 학생이 되었다.

몽고메리 버스 안 타기 운동

1950년대 중반, 앨러배마 주의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승객의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그러나 인종차별법은 흑인들을 입구에서 돈을 지불하고 나서 버스의 끝에 들어가야만 하고, 만약 한 사람의 백인이라도 들어와 서 있으면 좌석 한 줄 전체를 비워야 하는 모욕을 겪게 했다.

1955년 12월 1일 로자 파크는 퇴근하는 길에 버스에 올랐고, 뒷쪽에 있는 흑인 자리의 맨 앞에 앉았다. 정류장에서 버스가 멈추었을 때에는 모든 자리가 차 있었다. 한 백인이 타자 운전사는 Park이 앉은 줄에 앉아 있는 모든 흑인 승객들에게 그들의 좌석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나머지 세 명은 그들의 자리를 포기했지만 그녀는 그건 불공평한 관행을 참지 않기로 결심하고 일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저는 우리가 언제쯤, 어떻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 알고 싶었어요.” 그녀는 스스로 민권운동을 시작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운전사는 그녀를 체포했고 경찰은 그녀를 분리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이 사건으로 몽고메리의 모든 흑인 지도자들은 큰 모임을 만들고 시 전체로 버스 안 타기 운동을 확대하기 위해 공동체의 지지를 모으기로 결정했다.

몽고메리의 흑인 주민들은 일년이 넘는 기간동안 버스 타기를 거부하였다. 그들은 카풀을 조직하였고 일터까지 그냥 걸어다녔다. 결국 12월 20일 법원의 직무집행명령서가 몽고메리에 도착하였고 그 다음 날, 1년남짓 계속된 보이콧이 끝났다.

버스들은 더 이상 흑인을 차별하지 않았지만 승객들은 여전히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공격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몽고메리의 다른 측면에서의 생활은 완전하게 차별된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승리는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큰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본 많은 남부의 흑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보이콧은 버밍햄과 모빌, 앨러배마 그리고 탈라하세, 플로리다에 퍼졌다. 흑인 시민들은 보이콧 첫날 킹이 연설에서 말한 “민주주의의 가장 위대한 영광의 하나는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권리”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얻을 수 있었다.

보이콧으로 생겨난 추진력은 그 승리 이후에도 희미해지지 않았다. 3개월 후 의회는 1957년 민권법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은 민권위원회를 구성해 투표행위 차별에 대한 주장을 조사하고 재판부에 투표차별행위에 대해 연방법을 적용할 수 있도록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비록 약하기는 했지만 그 법은 재통합법 이래 흑인들의 가장 큰 입법적 승리였다.

김자영 서울대 법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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