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6월 1999-06-01   765

시민운동강좌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교육』

살인과 테러 뚫고 성장한 흑인 민권운동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1961년, 미국에서는 흑인들의 투표참여를 법으로 보장하고 있었지만, 정작 흑인들은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없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유권자 등록 시도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의 협박때문에 겨우 250명의 흑인만이 1965년 3월에서 8월까지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있었다. 1965년에 투표권리법이 통과되면서 설립된 연방등록처는 제도적으로는 더 많은 흑인유권자가 등록할 수 있게 했으나, 이 조치에 화가 난 백인들의 테러는 날로 증가했다.

1965년 8월 14일, SNCC에 소속돼 있는 활동가들은 유권자 등록 장벽에 저항했다. 이에 분노한 백인 폭도들이 학생들을 위협했고 흑인들의 체포와 투옥이 되풀이되었다. 이 과정에서 흑인들을 옹호하던 백인 신학도와 성직자가 살해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들을 살해한 보안관 대리는 백인 배심원들로부터 무죄 평결을 받았다. SNCC 활동가들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정치 정당을 조직해나갔다.

LCFO(Lowndes County Freedom Organization)는 이렇게 결성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징으로 흑표범을 내세웠다. 흑표범은 먼저 공격을 받아야만 싸움에 나서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폭력적 봉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SNCC 지역지도자로 킹 목사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존 휼렛(John Hulett)은 “우리는 폭력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개인적으로 공격당했을 때 우리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람들일 뿐이다”라고 설명했다. LCFO는 재건된 민주당의 지방조직과 합병하였다. 흑표범의 이미지는 공격을 당한 뒤에야 싸우는 흑인들의 상징으로 서서히 전미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FBI의 파괴공작

그러나 LCFO는 다양한 활동가들의 각기 다른 철학과 운동전략 등으로 혼란을 겪다가 결국은 분열되었다. 새 지도자들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장하는 비폭력 운동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스토클리 카미첼(Stokely Carmichael)은 1966년 5월에 SNCC의 새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좀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조직을 운영했다. 그들은 지나치게 비폭력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어떤 면에서는 좀더 흑인적인 사람을 원하고 있었다. 1966년 여름에는 여러 흑인 지도자들이 미시시피대학에 다니던 첫 번째 흑인 학생이 저격당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미시시피로 행진을 시작했다. 스토클리 카미첼과 다른 SNCC구성원들은 그 행진에서 ‘블랙파워’라는 슬로건을 사용하며 자신들의 운동에 좀 더 투쟁적인 이미지를 도입하기 위해 이 슬로건을 활용했다.

블랙파워라는 슬로건은 SNCC가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개념이 언론을 통해 전국에 폭력적인 이미지로 전파된 것은 SNCC의 행진이 계기가 되었다. SCLC의 멤버인 앤드류 영은 당시 킹 목사가 했던 연설을 이렇게 회상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권력을 갖기 위해서 여러분은 그것(폭력적인 이미지로 비쳐진 블랙파워라는 슬로건)을 부정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진정한 권력을 갖기 원한다면 슬로건은 필요치 않다. ” 이것으로 미뤄보아 킹 목사가 반대했던 것은 블랙파워가 아니라 블랙파워라는 슬로건이었던 것 같다.

1966년 10월, 흑인들은 확산되고 있는 경찰들의 야만적인 폭력에 대항해 그들 자신을 방어하고 흑표범의 정의를 실행하기 위해 정당을 창설했다. 정당창설이 경찰의 야만성을 저지하기 위한 첫 번째 행동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이미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왔다. ‘The 10point Black Panther Party program’은 ‘경찰의 야만행위와 흑인에 대한 살인을 즉각적으로 끝내야 한다’는 것 외에도 고용촉진, 주택문제 해결, 흑인 역사교육, 감옥에 있는 흑인의 석방, 흑인피고를 위한 흑인 배심원 도입, 국민투표 개최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흑표범당’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너무 위협적이어서 주나 연방정부는 그들의 존재를 계속 용인할 수 없었다. FBI는 흑표범당에 ‘국가안전에 가장 위협적’이라는 라벨을 붙여 파괴공작을 벌였다. 이것이 이른바 “COINTELPRO (Counter-Intelligence Program)”였다. FBI 특수요원들은 거짓 루머로 당원들과 당 지도부를 분리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당원들에게 지도자들이 기금을 훔치고, 스위스은행에 비밀계좌를 갖고 있다는 등의 루머를 퍼뜨렸다.

COINTELPRO의 일환으로 FBI는 습격과 암살을 준비했고, 이 음모는 흑표범운동을 무력화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1965년에서 1968년까지 수백 건의 인종소요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흑인들은 불균형적 빈곤과 실업, 열악한 주택, 부당한 행정서비스, 교육차별, 물가고, 높은 사망률과 질병, 경찰의 야만적 행위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킹 목사는 미국의 경제가 점점 더 위협받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미국사회가 더 잘되기 위해서는 부의 분배구조를 변화시키는 대규모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베트남에서 전쟁이 확대되고 있는 것에 빈곤문제를 연결시켰다. 이 반국가적 시각때문에 킹 목사는 FBI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킹 목사는 국제적으로 미국내 흑인들의 빈곤문제를 부각시킬 목적으로 1968년 여름에 “가난한 사람들의 야영지”를 개설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던 중 하수도 설비업자들의 파업지지를 위해 멤피스에 갔다가 1968년 4월 4일, 암살되었다.

제도적 장치 마련돼도 비참한 흑인의 삶

흑인 민권운동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그 기반을 잃고 침체해 있었다. 전체적으로 사회비용이 삭감되면서 복지와 식량보조프로그램이 축소되었고 민권위원회가 약화되는 등 열악해진 사회적 조건 속에서 1970년대와 198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상당히 후퇴했지만 정치적 행사에 참여하는 흑인들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 정치적 권리의 획득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1990년대까지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 수확들이 있었지만 1980년대에는 오히려 분위기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구체적으로 흑인 영아사망률이 증가했으며, Medicaid(65세 미만의 저소득자, 신체장애자를 위한 국민의료보장제도)에 의해 보호받던 빈민가구의 비율이 65%에서 46%로 떨어졌던 점에 비추어보면 흑인들은 여전히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흑인 민권운동의 후퇴에도 불구하고 민권조직들은 민권법 제정을 위해 계속 노력했고, 흑인들의 경제적 지위향상과 법원 판결을 보호하는 일도 계속하였다. 그 중 ‘PUSH작전’은 흑인 소비자들이 자신들이 주요 고객인 회사들과 협상하여 흑인 종업원들을 고용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고 인종차별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회사에 대해서는 전국적으로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대표적 예가 전국적인 ‘나이키’ 불매운동이다. 뿐만 아니라 많은 흑인 시민단체들은 인종, 성, 경제문제 보다 구체적으로는, 건강을 지킬 수 있는 여유, 주거 차별의 문제, 약물과 AIDS 전염병 등등 다양한 이슈를 제기하고 있다.

The National Urban League의 The State of Black America(1989)는 오늘날 흑인 민권운동에 대해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흑백분리를 공시했던 Jim Crow Laws도 폐기되었는데…중략…30년 전, 버스 뒷좌석에서의 투쟁은 이제 교육, 일, 가치와 돈이라는 더 강력하고 많은 이슈로 집중되었다.” 흑인들이 오늘날과 같이 한 표의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이 바쳐져야 했는지 모른다. 그 투쟁의 성과 위에서 빼앗긴 권리를 찾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김미란 참여사회아카데미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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