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06월 2009-06-01   1020

아주 특별한 만남_박영희 회원




굴곡진 우리 시대 한결 같은 참여
우리들의 어머니



“민주국가의 주권자로서
 자존심을 갖는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자존심 없이 살아오는 위정자들을
 많이 보아왔기에 정치판을 믿지 않고,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많이 불편해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세상이면 좋겠어요
.


이경휴 수필가, 참여연대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해 준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회상하고,
그것에 감사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과 온전히 만날 수 있다.
–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김상봉 중에서

넝쿨장미가 무더기로 담을 넘는 계절이다. 시인들은 이를 두고 ‘현행범’ ‘탈옥수’라는 섬뜩한 표현을 쓰지만 사람들은 따라 웃을 뿐이다. 연인을 위해 겹겹이 치장한 한 송이의 장미보다 빗속에 무리지어 서있는 넝쿨장미가 더 사랑스럽고 마음이 간다.

‘꽃보다 남자’가 한동안 장안을 누비고 다녔지만 지금은 그저 꽃이다. 도심에는 장미가 주인공이요, 산천엔 찔레와 아카시아의 은은한 향기가 집단으로 몰려다닌다. 누가 말했던가, 향기는 부재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향기의 실체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비가 내리는 오후, 눅눅한 습기를 일순 제거하는 풀꽃향이 참여연대 사무실에 가득했다. 자원활동을 나오는 ㄱ선생님이 상근자들에게 뜸을 뜨고 계셨다. 당연히 그 향인 줄 알고 다가가니 가냘프지만 단아한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였다. 나무의 영혼을 꽃 피운다는 목련이랄까, 탐욕의 세상을 향해 붉은 낙관을 찍는 연꽃이랄까. 맑고 깊은 눈빛이었다.

옥가락지에 모시적삼이 제격인 박영희(70세) 회원. 세월이 비켜간 흔적이 조용히 배어있었다. 다탁에는 고운 빛깔의 전통 떡이 맛깔스럽게 담겨있다. 찰지면서도 매끄럽게 입안에서 녹는다. 손수 준비해 오신 의미 있는 떡이라 손이 자꾸 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종심從心(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 70세를 칭함)에, 1남3녀의 어머니가, 또한 참여연대 회원 가입한지 10년이 되는 분이니, 어찌 특별한 만남이 되지 않으리. 바짝 긴장 되었지만 떡 맛을 주고받으며 한 식구가 되어버렸다.



정치와 생활은 하나다

건강 문제와 근황을 여쭈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월 따라 여기저기서 신호가 오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웃음이다. 따라 웃으며 최근 수강중인 아카데미 느티나무의 ‘월요민주주의 학교’로 옮겨갔다. 강좌 선택의 이유부터 궁금했다.

“정치가 우리 생활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죠. 실제로 그것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치와 민주주의는 따로 생각할 수 없잖아요.”

50년대에 학교를 다녔기에 선생님들로부터 그 시대의 울분을 막연하나마 느꼈고, 70년대의 부동산 투기와 교육정책의 문제점이 피부로 와 닿아 자연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수줍은 소녀처럼 그 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반민특위해체는 민족의 수치라는 선생님의 말씀도 멋있었고, ‘구보다 망언’에 대하여 조목조목 설명해주시던 게 잊혀지지가 않아요. 청소년기의 감상에 불과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엔 멋있는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세대가 세대인지라 반민족특위, 구보다 망언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순간 울컥했다. 지금도 반복되는 역사가 아닌가. 뉴라이트·중도실용노선·광주사태로 폄하된 5·18 민주화운동….

1949년 반민족특별법은 정부의 비협조로 폐지되었고, 1953년 구보다의 망언은 우리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았다. ‘36년간 한반도 강제점령은 한국민에게 유리했다. 한국민족의 노예화에 대해서 언급한 카이로 선언은 연합국의 전시 히스테리의 표현이다….’ 5가지 항목을 제시하며 우리의 목을 조였고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오늘도 그들은 여전히 망언을 일삼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천황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함께 간다면서.



깊숙히 박힌 친일 뿌리가 사회개혁 걸림돌

청소년기의 자양분이었던 문제의식은 현실 정치에 늘 안테나를 세우고 있었다. 특히 생활에 직접 연관이 되는 주택과 교육문제는 혼자의 힘으로 바꿀 수 없었다. 변화와 개혁은 정당을 통해서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2년 개혁국민당에 입당하고 종로 지구당 당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변화와 개혁보다는 권력을 향한 그들의 속내를 알아차리고 실망할 즈음 개혁당은 와해되어버렸다. 스스로 순진하고 감상적인 입당이었다고 멋쩍어 했다.

“지금은 지지하는 정당이 없어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고 평화박물관은 회비만 내는 회원입니다. 작년 촛불집회 때는 민족문제연구소 사람들과 나갔지요. 친일의 뿌리가 사회 곳곳에 너무나 깊숙이 박혀있기에 개혁이 어려운 거지요.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여 친일파를 지금 와서 사법처리를 하겠어요? 예전 반민족특위 때에는 그 자식들이 아버지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다는데 요즘은 도리어 그 자식들이 날뛰는 세상이죠.”

오늘날 교육의 궁극 목표는 계층상승의 도구로만 이용된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민주주의 의 기본 교육인 토론과 토의를 통한 의견수렴보다는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만 터득하게 된다. 그러니 그들이 날뛰는 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내가 주인이란 생각 왜 안하는지…

이번엔 시민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여쭤보았다.

“민주국가의 주권자로서 자존심을 갖는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자존심 없이 살아오는 위정자들을 많이 보아왔기에 정치판을 믿지 않고,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니 많이 불편해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세상이면 좋겠어요. 효과는 단시일에 나타나기는 어렵겠지만 내가 듣는 ‘월요민주학교’는 40여 명이 듣는데 분위기가 매우 진지해서 즐겁습니다. 이런 건 금방 나타나는 효과이겠죠? 지속적이어야 할 텐데…….”

시민교육강좌 ‘아카데미 느티나무’의 카피가 바로 ‘아는 즐거움, 모든 변화의 첫 시작입니다’가 아닌가. 배움이 즐거움으로 시작되는 시민교육,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 위주의 교육보다는 민주시민으로서의 사회적·도덕적 책임감을 배우고, 지역사회의 참여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인권을 배우는 장이 시민교육이다. 참여연대의 보폭이 한층 넓어지고 빨라졌다.



회원활동 10년, 참여연대가 내 배경

회원 가입 10년째다. 가입 동기와 애정 어린 비판을 부탁드렸다.

“99년 <한겨레신문>을 보고 선뜻 가입했어요. 한 때는 활기차 게시판에 글도 많이 올리면서 논쟁도 했었고, 총회나 송년의 밤에 참석하여 젊은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했어요. 소액주주활동으로 명성이 높았던 장하성 교수님이 있어 더욱 좋았지요. 지금 어려워도 잘 하고 있잖아요. 비판보다는 격려를 해야죠. 참여연대가 내 배경인데.”

진심이 전해지는 격려이다. 어려운 시기 이런 회원 덕에 상근자들 어깨가 처지지 않는다.

참여연대 활동 중 기억에 남는 일을 말씀해 달라고 하자 씩씩하게 운을 뗐다.

“1인 시위를 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 있었어요. 국민의 정부 시절 2번 했었죠. 한 번은 삼성 본관 앞에서였고 또 한 번은 광화문에서였어요. 삼성그룹을 상대로 삼성의 공정거래위원회의 지원행위 조사를 방해한 사건을 규탄한 것과 차세대 전투기 사업 관련, 미국의 F-15전투기를 대한민국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한 것을 반대하는 시위였어요. 삼성 본관 앞에서 할 땐 시커먼 양복을 입은 사람이 나와서 사진을 찍고 해서 내가 이리 오라고, 왜 내 사진을 함부로 찍느냐며 따졌더니 슬금슬금 들어가더라고요. 당시엔 참여하지 않고는 불편한 분위기였죠.”

2001년 당시 삼성의 재벌변칙증여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이 고조되던 때였고, 2002년 국민의 정부 시절 F-15K 전투기 선정은 한반도에 전쟁을 확대시키는 행위라고 여러 시민단체들이 한 목소리를 내던 때였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린 사건이 되었으니 세월을 탓하랴, 망각의 명수인 민심을 탓하랴.

이상적인 정치는 어떤 것이며 존경하는 지도자가 있는지 교과서적인 질문을 드렸다.

“앞서 말했듯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국민들이 믿으면 이상적인 정치죠. 정책을 일일이 따지고 묻고 이해하려면 피곤하고 불편하잖아요. 그리고 기회를 균등하게 하고 약자들을 위한 안전망을 촘촘히 짜고,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한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존경했습니다. 71년 대선 때 대단했죠. 내가 박정희보다 못 한 게 뭐가 있냐며 투사적인 어투로 ‘한반도 3단계 통일론’ ‘이중곡가제’를 제시하며 대중을 열광케 했지요. 그런 분이 대통령이 되어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국고를 지원하는 걸 보고 마음을 접었죠.”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김대중 선생이라고 부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결과적으론 ‘한반도 3단계 통일론’이 햇볕정책의 기조가 되어 북의 빗장을 열게 한 셈이지만, 실용정부라고 하는 이 정권은 개성공단에 대못을 박고 있다. 부자를 위한 감세는 있지만 농촌은 그들 사전에 없는 양 말이다.



안심하고 아이들 맡길 탁아소 원영해봤으면

‘사회의 어머니’를 떠나 ‘개인의 엄마’로 삶이 어떠한지 엿보고 싶었다.

“딸 둘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친구같이 지내죠. 같이 영화도 보러 다니고 시장도 가고, 정치·사회 이야기도 하지만 결혼은 강요하지는 않아요. 자연스럽게 때가 되면 하는 거고. 애들은 나를 참 용감하게 살아온 엄마라고 하지요.”

정확한 표현이요 바른 평가다. 혹 자제분 중 운동권이 있었냐고 여쭈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참으로 열정적이었어요. 통일운동가인 ㅂ선생님이 큰스승이었죠. 그 분의 한마디 한마디를 삶의 좌표로 삼으니 좀 걱정 되더라고요. 맹종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추종해서. 그런데 전 이 분의 언행에 적잖게 실망했어요. 그 때 대선은 민주세력이냐 쿠데타세력이냐를 심판하는 선거였어요. 그런데 왜 출마했으며 후보사퇴 할 때도 민주세력을 하나로 엮는 역할을 못해 원망스러워 했습니다. 당시  그를 따랐던 젊은 애들은 공황상태였고, 결국은 쿠데타세력이 정권을 잡았잖아요.”

그런 시절이 있었지. 국민들은 그렇게 후보단일화를 원했건만 끝끝내 갈라섰고 어부지리로 쿠데타 세력은 정권을 잡았고. 결국 야합으로 두 사람 모두 권좌에 앉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 우리는 민주적인 절차로 선출한 청렴한 대통령 한 사람을 잃었다. 자살自殺이 아닌 자결自決로. 우리 국민이 참 박복하다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장맛비처럼 비는 계속 내리고 어둠은 창 밖에서 서성였다. 마지막 질문을 건네며 자리를 정리했다. 후회되는 일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냐고. 즉답이 바로 나왔다.

“사는게 바빠 애들과 시간 활용을 많이 못한게 아쉽죠. 하고 싶은 일? 손자를 봐주니까 제대로 된 탁아소(어린이집) 같은 것 한번 운영해 봤으면 해요. 안심하고 맡길 곳이 없어요. 먹을거리부터 놀이기구, 선생님들의 심성까지 걱정스럽더라고요.”

고해바다라는 인생사. 주인공인 ‘불행’이 잠시 자리를 뜬 사이 ‘행복’이 다녀가는 게 인생이라면 너무 비관적인가. 그 불행마저 감사하게 껴안고 행복을 기다리는 게 성숙한 삶일까.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