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법센터 칼럼(pi) 2010-12-10   2375

민간인 불법사찰 막는 법

사찰, 바로 당신이 막을 수 있다

박경신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 고려대 법대 교수

“걔네들 불러 들여. 좋아. 좋은 방식이야. 세게 나가자구. 걔네들이 세게 나가니까 우리가 세게 나가야 한다구”

 –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백악관 집무실에서 워터게이트 수사에 대한 보고를 듣고 참모 해리 로빈스 홀더먼에게.

  여기서 ‘걔네들’은 누굴까?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아니다. 바로 연방경찰인 FBI 다.

 국내에서도 표면상으로는 워터게이트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은 아니지만 적어도 청와대 참모진 중 한 명이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을 이용해 정치인들과 민간인들을 불법적으로 사찰한 것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후속결과가 다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에서는 FBI가 수사를 진행했고 수사관들은 백악관의 연루 의혹에 대해 소신껏 수사했던 것이다. 홀더먼 보좌관이 대통령 말을 더 잘 듣던 CIA국장을 시켜 FBI국장에 전화를 해서 “이건 국가안보 문제고 당신 관할이 아니니 손 떼시오”라고 말하도록 하자고 하자 닉슨이 위와 같이 대답했던 것이다.
 
 FBI 수사는 대통령 연루설까지 밝혀내지는 못했고 닉슨은 1972년 재선에서 승리했지만 이 수사는 1973년과 1974년 언론 탐사보도로 이어져 의회청문회와 특별검사 임명을 촉발시켰고, 의회와 특검은 위 대화 내용이 담긴 테이프를 세상에 공개하게 된다. 결국 1974년 닉슨은 의회의 탄핵위협을 앞두고 하야한다. FBI는 자신의 임명권자에게로 이어질 수 있는 수사를 소신껏 진행하고 있었고 닉슨은 CIA라는 다른 사정기관을 동원하여 FBI를 견제해야 할 정도였던 것이다.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의 역할도 곱씹어볼 점이 있다. 콕스 검사는 놀랍게도 의회나 사법부가 임명한 특별검사가 아니라 계속해서 쏟아지는 언론의 폭로를 면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스스로 임명한 특별검사였다. 아치볼드 콕스와 의회청문회는 각각 백악관에 위와 같은 내용의 대화가 담긴 테이프 제출을 요구하는 소환장을 발부했는데 닉슨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콕스에게 소환장 철회를 명령했다. 콕스는 자신의 임명권자의 명령을 거부했고 닉슨은 콕스를 해고해야 했다. 콕스의 소신행동은 훗날 닉슨에 대한 비난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통령중심제? 대통령중심사회!

미국은 한국과 함께 거의 유일하게 대통령중심제를 유지하고 있는 선진국이다. 그러나 똑같은 대통령중심제이지만 대통령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지배력은 한국이 훨씬 더 크다. 한국사회에서는 검찰, 국정원, 경찰, 감사원 등의 사정기관들이 자신의 임명권자에게 악영향을 주는 사건의 독립적인 수사가 가능한지에 대해 국민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정작 헌법에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 명시된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공무원들이 더욱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다.

 사찰은 고난도의 행정행위이다.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하면서 상대방은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 국민의 프라이버시와 알권리를 동시에 제약해야만 한다. 권력이 사찰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사정기관들에 완전한 장악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장악력은 법이나 제도에서 오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복종에서 온다.

 워터게이트가 또 하나 우리와 다른 점은 바로 <워싱톤포스트>의 폭로기사를 제공한 FBI 부국장의 존재이다. 대통령이 공무원에 대해 가진 장악력은 임명권에서 온다. 하지만 해고와 인사상 불이익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무원에게는 그 장악력이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내부고발 존재 가능성은 정부조직 전체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화시킨다. 그러나 내부고발자 또는 조직에 반대하는 자를 대하는 우리 자신의 태도는 어떠한가.

 사찰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법도 아니고 제도도 아니고 대통령중심사회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사찰과 원하지 않는 사찰

‘불법사찰’을 허용하는 제도는 당연히 철폐해야 한다. 사찰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사찰을 원한다. 폐쇄회로 카메라가 우리를 지켜보기를 원한다. 경찰이 내가 사는 동네를 계속 순찰해주길 원한다. 사이버경찰대가 인터넷을 모니터링하면서 아이들을 음란물로부터 보호해주길 원한다.

 워터게이트에 대해 국민 모두가 분노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야당사무실에 불법 침입했다는 것과 국민이 낸 선거기부금을 사유화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불법사찰을 싫어하고 세금을 권력 연장에 동원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불법사찰인가. 헌법에 반하는 사찰 역시 불법사찰이다. 네티즌이 모두에게 보라고 공개한 내용을 국가기관이 보는 것 자체는 불법사찰이라고 볼 수 없다. 불법이 발생하는 것은 통신자료제공을 통해서 신원 정보와 같이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국가가 취득할 때 발생한다. 법관이 발부한 영장도 없이 취득을 정당화하는 사유도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상시적인 민간인 사찰’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 시행하고 있는 위헌적인 두 제도 인터넷실명제와 ‘통신자료제공’을 통해 이루어진다. 실명제는 모든 주요 사이트의 게시자 신원 정보를 해당 사이트 운영자가 취득하도록 의무화하고 있고 ‘통신자료제공’제도는 사이트 운영자가 그 신원 정보를 수사기관에 자유롭게 제공하도록 허용하고 있다. 김종익 씨 사건도 동영상 작성자는 실명제가 적용되지 않는 유튜브에 올려서 그 신원 확정이 어려웠겠지만 실명제가 적용되는 다음 블로그에 올린 동영상 게시자가 김종익 씨였음을 확정하는 것은 아주 쉬웠을 것이다.

 이렇게 연동되는 두 제도를 통해 수사기관들은 매년 10만 건 이상의 온라인 게시물의 게시자 신원을 확인하고 있다. 수많은 ‘불온게시물’들 중에서 ‘요주의’ 인물들을 솎아내는 데 이 두 제도는 필수적이다. 위 숫자는 같은 기간 한국에서 발부되는 모든 압수수색 영장 수를 넘어선다. 헌법의 영장주의가 무색하게도 우리나라는 법관에 의하지 않은 압수수색이 법관에 의한 압수수색 만큼 많다.

 
실명제와 ‘통신자료제공’제도, 민간인 사찰의 주무기

많은 인터넷 카페나 웹사이트가 이용자들 사이의 자발적인 약속에 따라 실명제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시행하는 실명제는 강제적이라서 문제이다.

 국민은 자신의 개인정보를 국가에게 공개하지 않을 사생활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국가는 ‘범죄수사에의 필요성’과 같은 특별한 공익이 있는 경우에만 사생활 및 사적인 정보의 공개를 강제할 수 있다. 신원 공개도 마찬가지다. 불심검문은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떳떳하면 왜 실명 등록을 못하는가’라고 다그치는 실명제 찬성자들도 길거리를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신원 공개를 요구당하면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불쾌해할 것이다. 실명제 반대자들의 심정이 바로 그런 것이다.

 물론 강제적 실명제가 필요할 때도 있다. 부동산실명제와 금융실명제는 사기 및 탈세의 위험성 때문에 필요하다. 자동차에 번호판을 달도록 하는 것은 자동차의 파괴성과 이동성 때문에 필요하다. 청소년 유해물을 보는 사람에게 성인 인증을 위해 주민번호를 강제하는 것도 이를 청소년이 보았을 때에 유해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익명 글쓰기가 자동차 운전, 금융거래처럼 위험한 행위인가.

 ‘힘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익명을 필요로 한다. 이런 광범위한 모니터링 속에서는 아직 취직을 못하고 있는 소비자들은 기업들이 생산하는 제품에 대한 사용 후기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실명제로 소통의 총량이 줄었다면 ‘힘없는’ 사람들 말이 줄었을 것이지 필자 같은 사람들의 말이 줄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책적 고려의 저울 반대쪽에는 익명의 표현의 자유는 이번 민간인 사찰 사태가 보여주듯이 민주주의를 보호한다. 익명표현의 자유는 다른 개인적 자유와 달리 육중한 무게가 있다. 민주주의와의 불가분의 관계 때문이다. 볼테르나 해밀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서도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시절에 많은 이들이 가명으로 조국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미국 독립의 최초주장을 ‘영국인’이 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를 요구한 많은 저자들이 ‘편집부’였다.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으로 소수자이다. 대다수가 압제에 숨죽이고 있을 때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소수자’가 된다. 이들의 목소리 없이 민주주의가 완성될 수 없다. 민주주의를 만들 때 필요한 것은 지킬 때도 필요하다.

 실명제와 통신자료제공이 언어순화 효과를 가질지는 모르나 문제는 국민에 대한 대대적이고 상시적이며 반민주적인 사찰을 가능케 한다는 사실이다.

 
인터넷소비자운동을 본격적으로

실명제는 이미 법으로 의무화하고 있다. 하지만 사찰은 실명제로 축적된 신상정보가 ‘통신자료제공’이라는 절차를 통해 국가기관이 취득할 때 이루어진다. 통신자료제공은 의무화되어 있지 않다.

 네티즌은 포털에게 고객이다. 보통 돈을 지불하지는 않지만 포털은 네티즌들이 발생시킨 웹트래픽을 광고주에게 팔아서 돈을 번다. 고객으로서 포털에게 통신자료제공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일 수 있다. 참여연대 공익법센터는 신상정보를 제공한 포털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그리고 통신자료제공제도와 실명제에 대해 각각 헌법소원을 제기해놓은 상태이다.

 지금도 천안함, 연평도, G20에 관한 발언을 올린 네티즌들이 계속해서 수사를 받고 있다. 이 수사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포털의 ‘통신자료제공’이다. 따라서 이에 대해 반기를 드는 인터넷소비자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영장만 있으면 훔쳐가도 되는가?

인터넷 사찰의 또 다른 문제는 신상정보를 근거 없이 가져가는 것 외에도 가져간다는 것을 통보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에게 형벌을 내릴 때는 기소 및 재판을 통해 그 이유와 범위를 피고인에게 알려준다. 압수수색도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한다는 의미에서 형벌과 비슷하다. 그러므로 일반 압수수색의 경우 그 대상자에게 그 범위와 이유를 알려주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집이나 자동차에 대한 압수수색 모두 영장을 제시하고 이루어진다. 그런데 통신자료제공 외에도 사찰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통보 제도가 매우 부실하다.

 메일 수색 통보는 현재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감청은 감청 개시와 동시에 통보하면 감청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므로 추후 통지를 하는 것이 옳지만, 메일 압수수색은 다른 압수수색과 다르게 볼 것이 없다. 메일 취득과 동시에 대상자에게 알려주도록 되어 있다. 어차피 압수수색은 과거 기록을 취득하는 것이므로 취득과 동시에 알려준다고 해서 수사 기밀성이 훼손되지 않는다.

 
‘몰래 이메일 압수수색’ 손해배상소송 제기해야

사찰은 알려지지 않을 때 극악한 효과를 발생한다. 사찰은 알고자 하는 것을 넘어 상대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알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려지지 않은 사찰은 그 위헌성을 넘어서서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

 감청과 메일 수색 통보의 필요성은 단지 ‘이유나 알고 맞자’는 호소를 넘어선다. 감청과 메일 해독 모두 상당한 시간을 소요하기 때문에 국가는 ‘가능성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대상을 한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우선 감청이나 메일수색을 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결국 감청과 메일 해독이 가진 물리적 한계가 발생시키는 이 딜레마 때문에 개인에 대한 국가 감시는 자연스럽게 한정된다.

 그런데 감청과 메일 수색을 대상자에게 통보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할 수 있게 되면 이 딜레마를 깰 수가 있다. 국가가 수많은 사람들을 감청해보고 ‘가능성 있어 보이는’ 사람을 골라서 그 사람을 집중적으로 감청과 메일 수색을 할 수 있다. 즉 모든 국민이 국가에 의한 완전 감시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통보하지 않는 감청과 압수수색 문제가 그런 것이다.

 또 메일 압수수색이 현재 ‘몰래’ 이루어지고 있어 판사들이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YTN 노조, <PD수첩> PD에 대한 압수수색 등 우연히 밝혀졌을 때에만 사회적 우려와 저항이 간헐적으로 비등했을 뿐 훨씬 더 많은 메일 압수수색은 계정 소유자 몰래 이루어지고 있다.

 판사가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할 때는 수사대상자 프라이버시권과 수사 필요성을 저울질하여 적정선을 긋는 수밖에 없다. 권리침해의 심각성을 느끼려면 수사대상자들의 피해상황과 그로 인한 고통을 판사들이 접해봐야 하는데 피수색자들도 자신이 압수수색당하는 걸 모르고 있으니 그런 신음소리 자체가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 판사는 아무래도 수사 필요성을 더욱 인정하는 선에서 압수수색 대상을 정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메일 서비스제공자인 포털에게 메일을 보내보자. ‘혹시 내 이메일이나 신원 정보를 국가기관에게 제공한 적이 있는지.’ 알려주면 사찰을 해놓고 즉시 통보하지 않은 국가기관(검찰)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자. 만약 알려주지 않으면 인터넷소비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자. 즉 개인정보유출 여부를 알려주지 않는 업체에 대해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는 것이다.

*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12월호에 게시한 글입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