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명분으로도 산업자본의 은행지배 허용은 안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산업-금융분리 공약, 공수표로 전락할 위기

1. 어제(6일) 재경부는 사모투자전문회사(Private Equity Fund; PEF) 활성화 방안을 담은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개정안을 발표하였다. 한마디로, 산업자본이 유한책임파트너(Limited Partner)로 참여하는 PEF에 대해서는 금융지주회사법, 공정거래법, 은행법 등의 각종 규제를 완화함으로써 사실상 재벌이 은행을 소유할 수 있는 길을 터주겠다는 것이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소장: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어떠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산업자본의 은행지배를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한다. 이는 외국자본에 대항할 토종자본의 육성이라는 명분 하에 산업과 금융의 분리라는 보다 더 근본적인 원칙을 허무는 조치이며,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재벌개혁·금융개혁 공약은 공수표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2. 비록 재경부는 재벌이 유한책임파트너로서 10%미만의 비율로 참여하는 경우에만 그 PEF의 은행 인수를 허용하며 그 경우에도 금감위의 자격심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재벌의 은행소유를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이러한 제한만으로 재벌의 은행지배를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발상이다.

나아가 일단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후퇴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단적인 예로, 재벌이 그 영향력 하에 있는 우호적 투자자들을 동원하거나, 또는 개별 재벌별로는 10%미만이지만 다수의 재벌들이 명시적, 암묵적 담합 하에 PEF와 그 산하의 은행을 사실상 지배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의 금융지주회사법은, 법인이든 조합이든 또는 이들간의 어떠한 형태의 연합체이든 간에, 은행을 지배하는 자 또는 은행을 지배하는 자를 지배하는 자는 모두 금융지주회사로 규정하고 있으며, 금융지주회사는 반드시 총수입의 85%이상이 금융업무에서 발생하도록 즉 금융업무에 주력할(predominantly financial) 것을 요구하고 있고, 나아가 그 15%미만의 비금융업무 수익도 2010년 이전에 완전히 제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금융지주회사법 Section 1843(n)).

이에 비추어 본다면, 우리나라의 현행 금융지주회사법과 은행법상의 산업-금융 분리 규제는 너무나 느슨한 것이다. 하물며 여기에 유한책임성과 10%미만이라는 허술한 그물망만을 씌운 채 금융지주회사법과 은행법상의 규제를 모두 면제받는 PEF를 허용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산업자본의 은행 지배 금지 원칙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한책임성은 산업자본의 은행지배권 남용으로 인한 법적인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이에 대한 책임을 묻기 어렵게 하기 때문에, 지배권 남용을 막기보다 오히려 부추기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또한 10%미만 조항은 이를 우회하여 사실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다양한 탈법적 수단이 존재한다는 문제뿐만 아니라, 산업자본이 적은 자금으로 큰 은행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결국 현금흐름권(cash flow right)과 의결권(voting right) 사이의 괴리도를 확대하는 유인구조의 왜곡효과를 낳는다. 나아가 산업자본의 PEF 투자지분에 대해 공정거래법상의 출자총액제한 규제까지 예외로 인정해준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정체성인가. 이것이 입각 직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붙인 PEF를 추진했던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진면목인가.

3. 재경부가 이토록 위험천만한 발상을 하게 된 배경은 물론 분명하다. 뉴브리지캐피탈의 제일은행 인수,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등의 예에서 보듯이, 외국 투자펀드가 국내은행산업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외자유치를 위해 은행업을 본업으로 하지 않는 투자펀드의 국내은행 인수를 허용했던 장본인이 바로 이헌재 부총리 아니었던가. 결국 이헌재 부총리는 자신이 추진했던 무분별한 외자유치 정책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은행을 재벌에게 넘기는 또다른 정책실패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업을 본업으로 하지 않는 외국 투자펀드의 국내은행산업 지배가 진정 문제라고 인식된다면,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현행 금융지주회사법과 은행법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즉 외국 투자펀드에 대한 규제와 감독의 실효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재경부는 거꾸로 가고 있다. 하나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재경부의 이러한 태도를 볼 때, 참여정부의 재벌개혁·금융개혁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4. 외국 투자펀드의 국내은행산업 지배 문제가 아무리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과연 재벌의 은행지배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는가. 깊게 고민할 것도 없이, 작년 초 이후 한국경제를 뒤흔들었던 카드사의 부실 문제, 특히 삼성카드와 LG카드의 부실문제는 재벌의 금융기관 경영능력이 얼마나 취약하며, 산업과 금융 사이의 방화벽(firewall)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다. 재벌의 은행지배는 결코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카드사의 부실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시스템 리스크를 불러올 가능성이 농후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아가 새로운 소유주체를 찾아 민영화해야 할 국내은행은 이제 우리금융지주회사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서 참여연대는 이미 우리금융 회장 및 우리은행장에 새로 선임된 전 삼성증권 사장 황영기 씨에 대한 우려를 강력하게 제기한 바 있다. 이번 PEF 활성화 조치 및 그 단초가 되었던 이른바 ‘이헌재 펀드’가 우리금융의 민영화를 염두에 둔 것임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삼성그룹의 우리금융 지배를 우려하는 것이 과연 참여연대만의 과잉반응이겠는가.

5. 참여정부가 추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경제개혁 과제가 바로 산업과 금융의 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재경부는 재벌금융사의 의결권을 다시 제한하고자 하는 공정위의 공정거래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지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더니, 급기야는 재벌의 은행소유를 사실상 허용하는 방안까지 들고 나왔다.

참여정부, 아니 노무현 대통령은 이제 마지막 시험대에 올랐다. 지난 1년간 보여준 경제개혁에 대한 유예는 ‘총선 승리’라는 명분으로 어느 정도 변명이 될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변명이 불가능하다. 재벌개혁·금융개혁을 저지하는 재경부의 독주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경제적으로 실패한 대통령이 될 것이다.

경제개혁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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