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프리즘> Race to the Short-termism

3월 12일 두 개의 빅 쇼

지난 3월 12일 한국에는 두 개의 빅 쇼가 있었다. 하나는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야3당이 ‘태극기 쓰러뜨리며’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워커힐 컨벤션센터에서 최태원 회장이 ‘태극기 휘날리며’ 외국자본으로부터 경영권 방어에 성공한 것이다. 외국 국적의 제3자라면 그저 흥미진진한 쇼로 생각하고 차분히 관전하겠건만,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그냥 내던져 버릴 수 없는 주민등록증 때문에 하루종일 안절부절하며 인터넷을 들랑날랑했다. 그러면서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는 듯한 이 정치적 쇼와 경제적 쇼의 이면에 내재한 공통점을 찾으려고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렸다.

각각의 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논하지는 않겠다. 탄핵정국이나 SK(주) 경영권 분쟁이나 ‘무엇이 합리적인 선택이냐’의 차원을 넘어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극단적 이해관계 충돌로 치달은 상황에서 경제학은 이미 판단기준으로서의 유용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학의 합리성 기준이 허용하는 양비론(兩非論) 내지 ‘최선이 아니면 차악이라도’ 식의 논리는 쓰레기 더미에 오물봉지 하나 더 투척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럴 때는 ‘on one hand 어쩌구, on the other hand 저쩌구’ 하는 양팔잡이 경제학자보다는, 차라리 ‘노무현 탄핵 만세’를 외치는 보수단체나 ‘어떻게 뽑은 대통령인데…’하며 울부짖는 노사모의 감성적 행동이 사태의 본질에 훨씬 더 깊숙이 접근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을 때, 경제학자를 가장 안타깝게 하는 것은 이번 빅 쇼 과정에서 드러난 주요 player들의 단기주의(short-termism)이다. 원래 경제학에서는 1년을 기준으로 이를 넘기면 장기, 그 이내면 단기로 부른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1년이면 초장기다. 한달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상황에서 미래를 계획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면, 오늘의 전투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다.

야3당도 최태원 회장도 그러한 의미에서는 합리적인 전술로 오늘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어차피 내일은 무의미하며, 오늘 지면 끝이니까…. 그러나 야3당 지도자도 최태원 회장도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뜬다’며 자위할 수 있는 스카알렛 오하라와 같은 위치에 있지는 않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만약 이 게임의 장에 오늘의 전투, 한달 후의 전투가 아니라 1년 후, 10년 후의 전쟁을 기획하며 참여하는 player가 있다면, 이 게임의 결과는 자명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탄핵정국을 보면서 ‘이것은 한국민이 결정할 한국의 내부 문제다’라고 말하는 미국과 중국의 대변인 논평이 액면 그대로의 외교적 수사로만 들리지 않고, ‘SK(주)에 투자한 1억 5천만불은 나에게는 없어도 되는 돈이다’라고 말하는 소버린자산운용 챈들러 형제의 자신만만한 태도가 단순한 공갈협박으로만 들리지도 않는다.

정치도 경제도 one-shot game이 아니라 repeated game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 지도자들은 한판에 모든 것을 거는 의사결정을 거듭하고 있으며, 더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의사결정 환경이 계속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라는 단기로의 질주(race to the short-termism)만이 남았다.

탄핵정국이 형성되자 재벌개혁이고 동북아허브고 산업클러스터고 나발이고 간에 모두 무의미해졌다. 이젠 안정만이 최고의 덕목이 되었다. 고건 총리의 안정감과 이헌재 부총리의 카리스마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그나마 이 사람들이 행정과 경제를 이끄는 것이 다행이라는 분위기다.

최태원 회장 물러나라고 하자 집중투표제 도입, 내부거래위원회 설치, 사외이사 비중 확대 등의 정관개정안은 모두 무의미해졌다. 최태원 회장의 SK(주) 등기이사직 유지 여부만이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심지어 SK텔레콤에서 전문경영인이 반강제로 물러나고 독립적 사외이사 수가 줄어드는 것도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앞으로 줄을 이을 소송과 임시주총 소집, 나아가 내년의 정기주총도 그 때 가서 해결할 일로 치부되었다.

경제학자의 눈에는 정치모델(제왕적 대통령제? 이원집정부제? 내각제?)이나 기업모델(영미식? 유럽대륙식?)에 대한 선험적 결론은 별 의미가 없다. 어떤 결론이든, 그 결론에 도달하는 각 주체의 인센티브구조가 더욱 중요하다. 지금 한국에는 한달 후도 기약할 수 없는, 오직 오늘만을 생각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향으로 인센티브구조가 단기화되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과 재계 지도자들의 의사결정 시야(time horizon)를 하루, 한달에서 1년, 10년으로 늘리기 위해서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들 자신에게도 유리하도록,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그들 자신에게도 불리하도록 인센티브구조를 짤 수밖에 없다. 우리 눈앞에 있는 심각한 현안을 해결하고 거대한 외부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우리 모두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식의 국가주의적 캠페인은 오히려 인센티브구조를 왜곡하고 단기화할 뿐이다. 유권자와 투자자가 정치적·경제적 의사결정자에 의해 선동되는 객체로 계속 머문다면, 이들 의사결정자의 단기적 시야는 교정될 수 없다. 유권자와 투자자가 단기적 시야의 의사결정자를 제재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줄 때에만이 그들의 인센티브구조는 변화할 것이다. 4년에 하루만 심판할 것이 아니라 4년 내내 심판할 때 국회의원들의 행동이 변할 것이다.

최근 이헌재 장관이 부화뇌동하는 금융기관의 모습을 질타했는데, 법과 원칙을 무시하는 경제관료들의 단기주의적 관치금융을 시장참여자들이 거부할 때에만이 경제정책의 예측가능성이 제고될 것이다.

최태원 회장의 지배구조 개선 약속을 주주의 권리 행사로 확인할 때에만이, SK그룹의 경영권은 장기적으로 안정화될 것이다. 오늘의 행동은 오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심판의 근거가 됨을 보여 주자.

김상조(한성대 교수, 경제개혁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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