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프리즘> 경제 ‘안정’ 부총리의 소신과 예측

김진표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른바 경제’안정’부총리다. 경제안정이라는 그의 직책상 성과지표는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부여한 것이다. 참여정부의 첫 경제팀 수장에게 임명장과 함께 주어진 정책목표가 ‘개혁’이 아니라 ‘안정’이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었지만, 그건 임명권자가 책임질 문제이지 김진표 장관 본인이 해명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정작 문제는, 이른바 참여정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하는 ‘코드인사’ 원칙을 위배할 정도로 높이 평가된 그의 직업관료적 전문성이 경제안정에 얼마나 기여했느냐이다. 섣부른 평가일지는 모르지만, 김진표 장관의 성적은 낙제점을 면키 어렵다.

물론 어느 누가 경제부총리를 했더라도 올해 우리 나라의 경제성장률은 3%를 넘기 어려울 정도로 국내외 경제환경이 악화되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개인신용불량자 문제, 청년실업 문제, 강남 아파트 버블 문제 등을 한 순간에 해결할 묘책이 없다는 점도 수긍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현재 한국경제가 안고 있는 문제의 상당부분은 그에게 귀책사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업관료적 전문성이 불신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보자. 최근 김진표 장관은 모 경제신문사가 주최한 포럼에서 연설을 하였는데, 그중 다음 두 가지 발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9월 27일 경제장관간담회에서 발표된 카드사 규제완화 조치에 대해 시민단체는 물론 국회 국정감사에서 연일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와중에서도 김진표 장관은 급격한 소비위축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둘째, 9월 17일 열린 국회 법사위에서 증권집단소송법안 통과가 좌절된 이후 신4당체제의 출범 등 정치혼란으로 인해 법안 재심의 여부조차 불투명한 와중에서도 김진표 장관은 증권집단소송법안이 1∼2주 내에 국회를 통과할 것이라는 낙관적 예측(!)을 내놓았다.

카드사 문제와 증권집단소송법 문제는 참여연대가 올해 전력을 기울인 핵심 사안들이다. 김진표 장관만큼은 아니겠지만, 필자 역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사안들이다. 그러나 필자는 김진표 장관의 그 소신과 예측이 무엇에 근거한 것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카드사의 부대업무(현금대출) 비중을 50% 이내로 제한키로 한 규제는 작년 7월 처음 도입되었는데, 원래 규제준수 시한은 대차대조표(B/S) 기준으로는 2003년말, 관리자산기준으로는 2004년말까지였다. 그러나 올해 초 카드사 문제가 급격히 악화되자 시한을 각각 1년씩 연장하는 방향으로 여신전문금융업법 시행령을 개정키로 하였다. ABS를 통해 매각한 자산은 포함하지 않는 대차대조표 기준 규제는 어차피 카드사에 크게 부담이 되지 않는 상황이니, 실제 문제가 되는 관리자산기준 규제만 보면 시한이 2005년말까지로 아직 2년 이상 남은 셈이다. 그런데, 지금 당장 규제준수 시한을 2007년말까지로 또다시 연장해야 할 불가피한 사유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카드사의 건전성이 2005년말까지도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새로운 전망자료가 나온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카드사의 현금서비스 업무 확대를 경기부양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인가.

금융회사에 대한 건전성 규제를 경기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조정하겠다는 것이 경제’안정’부총리의 소신이라면, 그의 직업관료적 전문성은 의심받아 마땅하다. 매일매일 천문학적 액수의 거래가 이루어지는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의 핵심은 일관성과 예측가능성이다. 규제자가 피규제자의 고충을 미리미리 짐작하여 규제의 강도를 조정해 준다면, 규제를 엄격히 지킬 바보같은 피규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피규제자는 규제자에 대한 로비에 열중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며, 이런 합리성은 이미 한국경제에 깊숙이 체화되어 있다. 현재 340만명에 이르는 개인신용불량자 문제가 그러한 합리성의 결과이다. 결국 경제’안정’부총리의 소신은 경제의 장기적 불안정성을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편, 15대에 이어 16대 국회에서도 회기만료로 증권집단소송법안이 자동폐기될 것을 우려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1∼2주 내에 증권집단소송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것이라는 김진표 장관의 낙관적 예측은 가뭄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그러나 필자의 솔직한 심정을 표현하면,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그 수많은 국회 논의 과정에서 재경부가 보인 무소신과 의지박약을 직접 목격한 필자로서는, 김진표 장관이 1∼2주 내 국회 통과를 자신할 만큼 최근에 재경부가 국회를 상대로 한 입법활동을 열심히 했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증권집단소송법안은 이제 껍데기만 남았다. 재계의 이른바 남소우려 주장 때문에 법안 내용이 끊임없이 후퇴함으로써 소액다수 투자자의 사후적 구제수단이라는 애초의 증권집단소송제도 도입취지는 완전히 훼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증권집단소송제도의 입법화를 17대 국회로 넘기는 것보다는 지금 통과시키는 것이 백번 낫다고 판단한다. 17대 국회라고 해서 지금보다 더 개혁적인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제도 도입이 조속히 확정되어야만 기업들이 경영투명성을 제고하는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는 사전적 규율효과를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진표 장관은 증권집단소송법의 통과에 전력을 다 기울였다고 평가받을 수 없다. 사실상 껍데기만 남은 증권집단소송법안조차 기업경영에 부담이 된다는 것이 경제’안정’부총리의 판단이라면, 그의 직업관료적 전문성은 의심받아 마땅하다. 피규제자의 사정을 미리미리 헤아려 탄력적으로 조정해주는 규제자의 태도가 초래하는 도덕적 해이의 문제는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1∼2주 내에 증권집단소송법의 국회통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김진표 장관은 양치기 소년으로 전락할 것이다.

재삼 부연하지만, 필자는 더 이상 김진표 장관에게 경제개혁을 기대하지 않는다.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부여하지도 않은 정책목표를 추구하라고 요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경제개혁의 후퇴는 결국 경제’안정’부총리를 임명한 대통령이 책임질 문제이다.

그러나, 외람되지만, 김진표 장관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단기적 경기부양을 목적으로 정부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신뢰를 깨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은 경제개혁을 후퇴시킬 뿐만 아니라,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부여한 최소한의 목표인 경제안정마저 달성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상조 (한성대 경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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