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기록개혁 2003-09-23   1707

폐기, 또 폐기… 국가기록이 사라지고 있다

<참여연대 /미디어다음 공동기획> 사라지는 국가기록 ①

공동기획

국가 기록물이 무차별 폐기되고 있다. 참여연대는 지난 7월부터 정부 각 부처의 기록물 관리 실태조사를 벌였다. 조사 결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국가 기록물이 무단으로 폐기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심지어 법령이 정하고 있는 폐기절차마저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는 지난 9월 3일 보도자료를 통해 기록물 폐기의 문제점을 폭로한 바 있다. 여기에 더해 참여연대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으로 기록물폐기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구체적 사례를 좀 더 꼼꼼이 살펴보고 그 원인과 개선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미디어다음 / 신동민 기자 media_dongmin@hanmail.net

“폐기하지 말라” 정부기록보존소 요청 무시

▲ 최근까지 정부 각 부처는 사료가 될만한 유용한 자료들을 대거 폐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디어다음 김준진
“2001년부터 매년 각 행정부처에 보존 기간이 5년 이하인 문서만 폐기하고, 5년이 넘는 문서는 보존 기간이 지났어도 계속 보존하라는 지침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최근 확인 결과 몇몇 부처 및 기관에서 지침을 무시하고 문서를 일괄 폐기 했더군요. 행정자치부의 경우 2002년에도 보존기간 10년인 문서를 대량 폐기했습니다.”

얼마 전 각 행정부처의 기록물 폐기 목록을 확인했다는 기록물 관리 전문가는 정부의 기록관리 실태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폐기된 문서 대부분 제대로 된 심의 없이 폐기됐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 관계자는 또 “문서 폐기는 지금도 이뤄지고 있고, 통상적으로 12월에 기록물 폐기 작업이 더욱 늘어나는 만큼 주요 문서가 대거 폐기될 가능성이 높다”며 “사전 문제제기가 절실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디어 다음이 입수한 ‘2002년 폐기 기록물 심의’라는 제목의 행정자치부 문서에 따르면 2002년 5월 19일 이후에도 보존기간 10년인 문서가 251건을 폐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폐기 심의도 ‘서면심의’라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쳤다.

현행 기록물관리법에서는 모든 공무원은 공공기관의 기록물을 보호할 의무를 갖고(제3조) 있으며, 국가 기록을 무단으로 폐기했을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제29조)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법 대로라면 지침을 어기고 기록물을 폐기했거나, 제대로 심의하지 않은 문서 관리 관계자들은 처벌을 피할 수 없는 셈이다.

유용한 자료 무차별 폐기, 열람조차 할 수 없어

최근 정부는 어떤 기록물을 폐기했을까. 미디어다음은 참여연대의 도움으로 정부 각 부처의 기록물 폐기 목록을 입수할 수 있었다. 이 목록에는 국정운영과 역사 기록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으로 보이는 주요 자료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행정자치부는 1998년에 생산된 실업대책 추진 문서와 16건에 이르는 개인정보보호 관련 문서 등 수백건의 문서를 2001년 12월 31일 폐기했다. 실업 문제는 지금도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만큼, 과거의 실업 문제에 대한 현황과 대책 등이 담긴 문서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지만, 1998년 IMF 당시 실업문제가 심각했던 상황에서 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했던 실업 대책의 일부는 이제 열람조차 할 수 없게 됐다.

개인정보 문제도 마찬가지다. 최근 개인정보 침해 사례가 잇따르자 행정자치부는 개인정보침해신고센터 설립 및 개인정보 이용을 제한하는 내용이 담긴 개인정보 보호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는 등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정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하지만 ‘개인정보 관리 실태조사’,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철’, 개인정보 실태분석’ 등 1998년에 만들어진 16개의 관련 자료는 이미 2001년 12월 폐기 됐기 때문에 참고할 수가 없다.

특히, ‘개인정보 실태분석’ 문서는 “조사ㆍ연구 계획은 5년, 조사ㆍ연구보고서 원본은 10년”이라는 공문서보존기간표상 규정과 달리 3년 만에 폐기됐다. ‘개인정보보호법 개정철’, ‘개인정보보호법 관련철’ 등도 “보존기준에 따라 법 관련 문서는 영구 보존하고 있다”는 행자부 관계자의 설명과 달리 기록물 폐기 목록에 이름을 올려 놓고 있다.

삼풍사고 관련 문서 폐기… 자료 폐기한 뒤 비슷한 자료 또 만들기도

▲ 정부 문서 담당 관료들은 정부기록보존소의 지침도 무시했다. 사진은 행정자치부 자료관. ⓒ미디어다음 김준진
정부는 태풍 ‘매미’의 여파로 태풍을 비롯한 각종 재난을 국가적 차원에서 전담해 관리하는 ‘소방방재청’을 신설하는 내용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의 하는 등 열의를 보이고 있지만, 행자부 재난 관리과에서 1998년 생산된 ‘재난수습 사례집’, ‘주요재난분석 및 원인 조사’, ‘재해대책 상황보고서’ 등 재난 관련 문서 수십 건이 폐기돼 정책의 일관성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이에 대해 행자부의 한 관계자는 “일이 터지면 자료를 새로 만들곤 하지만, 사실 예전에 해 본 일을 다시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문서 보존과 활용에 대한 관료들의 안이한 자세를 고백했다.

그 밖에 행자부는 1996년에 생산된 ‘신경제 장기구상 총괄정책’ 등 프로젝트 관련 문서들을 ‘장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제대로 된 심의없이 문서 작성 5년만인 2001년 12월 폐기했다. 공문서보존기간표에는 “장기 업무계획 문서의 보존기간은 20년”으로 명시돼 있다. 전국민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던 ‘삼풍사고 관계철’도 문서 보존 5년만에 폐기했다.

건교부, 교육부, 재경부 등 총체적 난국

건설교통부도 1993년 외부 기관에 의뢰해 생산했던 ‘물류표준화 연구용역’기록 2건을 보관 6년여만인 1999년 폐기했다. 물류표준화는 전경련이 지난 7월 국가물류체계 혁신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결성하고, 정부가 지난 4월 물류표준화 사업에 673억원의 예산을 책정하는 등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과거 연구 자료가 필요한 상황이다.

1994년 생산된 ‘건설재해예방을 위한 대책’도 보관 5년만에 폐기됐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붕괴 이후 크고 작은 건설 재해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다소 성급한 폐기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정부 정보를 관리하는 한 관계자는 “가치 있는 문서가 불필요한 문서와 섞여 폐기되는 것은 폐기 대상 문서들을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고, 보존 기간만 맞춰서 일괄 폐기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교육인적자원부의 기록물 폐기 목록에서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교육정보화 사업 관련 문서가 눈에 띄었다. 목록에 의하면 1997년 생산된 ’97 교육정보화추진 현황’ 문서가 폐기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교육정보화는 지금도 NEIS(교육행정정보시스템) 재검토를 위한 교육정보화위원회가 진행되고 있는 만큼 여전히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1995년 생산된 ’95교육정보화계획’은 폐기 심사를 통해 “업무에 참고할 가치가 있어 폐기를 보류한다”는 결정이 내려져 ‘보존’ 판정을 받았다. 지금도 꾸준히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급식 운영 평가 관련 문서(1995)가 보존기간 만료를 이유로 2000년 폐기됐다는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재정경제부도 WTO(세계무역기구), 세계은행(IBRD) 관련 문서와 ‘국민연금운영위원회’ 문서를 폐기해 아쉬움을 남겼고, 전담 부서를 두는 등 문서관리에 비교적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외교통상부는 몇 가지 문서에 대해 공문서 보존기간표 보다 짧은 보존 기간을 임의대로 책정한 것이 눈에 띄었다.

기록물 폐기 자체보다 큰 문제는 각 부처에서 법에 규정된 심의 절차를 지키지 않거나 정부기록보존소의 지침 요청을 무시한 채 기록물을 폐기하고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명지대학교 기록관리학과 김익한 교수는 “지난 50년 동안 정당성이 없는 권위주의 지배구조 아래 있다 보니 비정상적 문서관리가 횡행하게 됐다”며 “많은 관료들이 문서 관리 의식이 낙제점 수준이고, 국가 기록물을 불법적으로 파기하는 등 물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기록을 기피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김교수는 이어 “공공기록관리법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공무원들이 문서기록을 역사자료로 인식하지 않는 한 관련법은 사문화될 수 밖에 없다”며 “참여정부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는 만큼 이제라도 정부 차원의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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