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기록개혁 2005-06-09   2263

[비밀공화국①] 비밀, 제멋대로…’기자간담회’가 3급비밀이라니

진실을 가리는 ‘방패막이’ 정부문서 접근금지

김형욱은 누가 죽였나?

국가정보원 과거사위가 최근 김형욱 피살 사건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발표 결과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관련자들의 진술에만 의존한 조사의 한계 탓인데, 확실한 문서가 뒷받침됐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터이다.

국가기관이 중요한 정보를 일정 기간 비밀로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비밀이 권력자의 범죄행위나 정책 실패를 덮는 수단이 돼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비밀이 진실을 가리는 ‘방패막이’ 노릇을 하고 있다. 비밀을 만들어내지만 해지·공개 절차가 뚜렷하지 않고, 한 번 비밀은 ‘영원한 비밀’로 묻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밀과 공개가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해진 규칙에 따라 투명하게 비밀을 관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참여연대는 <한겨레>와 함께 비밀관리 제도의 실태와 문제, 개선 방안을 네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비밀공화국 연재순서 ①비밀, 제멋대로 ②한번 비밀은 영원한 비밀 ③나, 비밀맞아? ④비밀관련법 정비해야)

일반문서로 바꿨지만 비공개 여전, 등급·보호기간등 작성자 마음대로

어린아이도 다 아는 황우석 서울대 교수에 대한 경찰의 경호가 Ⅲ급 비밀로 분류돼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준비접촉 대표단, 통일부 기자단 간담회’, ‘장관, 방송 3개사 보도국장 간담회’ ‘차관, 출입기자단 간담회’도 Ⅲ급 비밀이었다. 통일부가 2000년 비밀해제를 하면서 비로소 일반문서로 재분류된 서류의 목록이다. 한 기록물 전문가는 “언론과의 간담회를 대외비도 아닌 비밀로 분류한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다”며 “3급 비밀의 기본분류 지침에도 없는 사항”이라고 코웃음을 쳤다.

건설교통부는 같은 제목의 서류인데도 비밀 보호기간을 멋대로 정했다. Ⅱ급 비밀에서 일반문서가 된 ‘전시예산 내시서’를 보면, 2000년 내시서는 보호기간이 1년이었다. 하지만 2001·2002년 내시서는 2년이었다. 2003년 내시서는 다시 1년으로 바뀌었다. 건교부 관계자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고 담당자가 바뀌어 보호기간을 그렇게 설정한 것 같지만 자세한 내용은 비공개 사항”이라고 말했다.

<한겨레>와 참여연대는 1월부터 비밀을 어떻게 지정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비밀에 접근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정부 부처를 상대로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대상은 최근 5년 사이에 비밀에서 풀린 문서와 행정규칙이었다. 외교통상부의 북미 1·2과와 동북아1과, 건설교통부 등 14개 부처에서 비밀이 풀려 일반문서로 전환된 1만6224건과 39개 부처에서 ‘비공개하는 훈령·내부규정·내부지침’ ‘비공개 기록물’의 목록(문서 제목) 등을 받아 분석해 보니, 비밀문서의 공개범위·등급·보호기간 등이 ‘엿장수 마음대로’였다.

우선 공개 범위를 보면, 감사원과 해양경찰청 등은 Ⅱ급 비밀과 Ⅲ급 비밀, 대외비 등으로 분류된 행정규칙과 기록물의 제목까지를 공개했다. 그러나 국정원과 외교통상부 등의 부처들은 비밀 건수조차도 밝히지 않았다.

비밀이 풀린 외교부의 문서들 가운데 ‘제16대 대통령 취임행사’(비용 자담 방한 외빈, 2003-230)는 대외비였지만, ‘제16대 대통령 취임행사’(비용 자담 방한 외빈, 2003-80)는 Ⅲ급 비밀로, 서로 분류 등급이 달랐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고 내용 공개를 청구했으나 외교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해양경찰청은 ‘채증활동 규칙’이나 ‘밀항사범 처리규칙’ ‘외사첩보 활동규칙’ 등이 Ⅲ급 비밀이라고 밝혔다. 반면, 경찰청은 이미 Ⅲ급 비밀로 지정된 것이 알려진 ‘채증활동 규칙’조차 비공개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국가인권위원회는 3월 경찰청에 ‘이례적인’ 권고를 했다. “채증활동 규칙을 개정해 경찰관의 불법행위도 의무적으로 채증하고, 이 규칙을 비밀문서(3급)에서 일반문서로 재분류하라”는 내용이었다. ‘채증활동 규칙’은 경찰청 예규 125호로, Ⅲ급 비밀이다. 경찰은 1994년 1월 집회·시위 등에서 범법 활동을 촬영·녹화·녹음해 상황을 파악하고 형사처벌용 자료로 쓸 요량으로 이 규칙을 만들었다.

인권위의 정병춘 서기관은 “국가안보와 아무런 상관이 없고, 비밀로 지정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과대 분류를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도무지 납득이 안 됐습니다. 일반인에게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숨기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고 권고 배경을 설명했다.

비밀에 대한 포괄적인 규정을 하고 있는 ‘보안업무규정’은 “비밀을 적절히 보호할 수 있는 최저 등급으로 분류하고, 내용과 가치 정도에 따라 분류해야 하며, 다른 비밀과 관련해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규정에 불과할 뿐이다.

Ⅱ급 비밀문서를 자주 접하는 한 부처 관계자는 “비밀등급 지정은 관례에 따라 이전 문서를 보고 내용이 비슷하면 같은 등급을 매긴다”며 “문서의 가치를 따져 몇 급이 되는지를 판단할 여유도 없고, 부서장이 ‘이게 왜 3급이냐?’고 물으면 ‘전에도 그렇게 했다’고 말하면 끝”이라고 말했다. 보호해야 할 가치가 없는 비밀문서들이 숱하게 생산되는 까닭의 하나다. 심지어 업무 담당자가 아닌 기능직 직원이 문서를 작성하고 등급을 써넣는 경우도 많다고 공무원들은 전했다.

김익한 명지대 교수(기록관리학)는 “어떤 정보를 비밀로 지정해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며 “포괄적이고 허술하기 짝이 없어 업무의 전 과정을 분석해 비밀로 설정하는 구체적인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비밀을 적절하게 지정하는지를 감시하거나 재검토할 수 있는 장치조차 없다. 사실상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이 한 번 등급을 매기면 모든 것이 끝이다. 비밀 지정이 어떤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지를 알기 위해 통일부 등 13개 부처에 ‘비밀 세부분류 지침’을 공개하라고 청구했으나 돌아온 것은 “비밀에 준해 관리되는 사항” “공개될 경우 국가의 이익을 해할 우려가 있다”는 답변뿐이었다.

한겨레 황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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