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기록개혁 2004-06-03   1299

[기록이 없는 나라④-1] 행정정보공개청구 해보니

“조직치부 흔적 지워라” 멋대로 폐기

소중한 공공기록이 국가기관들의 자의적인 관리와 폐기 탓에 사라지고 있어 효율적·체계적인 관리가 시급하다. 세계일보 취재팀이 행정정보 공개청구를 통해 국가기관 42곳의 기록관리 실태를 확인한 결과 일선 기관의 원칙 없는 보존 실태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특히 법원이나 검찰 등 소위 ‘힘있는 권력기관’이 조직의 치부와 관련된 내부 문건을 서둘러 폐기한 것은 국가기관의 부실한 기록관리 실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법원, 검찰 기록보존 의식 수준 이하=지난해 대법원은 법관 100여명의 집단건의서를 사법파동 직후 폐기했다. 대검찰청은 1999년 김태정 검찰총장 사임을 요구한 소장 검사 150명의 연판장 사건 관련서류를 모두 폐기했다.

또 법무부는 2002년 이용호게이트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와 함께 검찰 쇄신 6대 방안을 발표했는데 현재 관련 서류는 모두 없어졌고 보도자료만이 그날의 흔적을 말해 주고 있다. 이들 기관의 기록보존 인식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올해부터 시행된 기록물 관리법은 범국민적 관심 사안이 된 사건과 사고에 대해서는 영구문서로 지정해 보존토록 규정하고 있다. 지난해 사법파동은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전국 판사와의 대화를 이끌어냈고 연판장 파동은 검찰 사상 초유의 항명사태로 촉발된 역사적인 사건이다.

조직의 기반을 밑에서부터 흔든 충격적인 사건인 셈이다. 따라서 비록 현행법이 시행되기 전에 문서는 모두 폐기됐지만, 영구문서로 지정해 보존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자료들인 것이다. 이는 진지한 반성과 재발 방지를 위한 점검보다는 ‘이번만 넘기고 보자’는 임기응변식의 사건 대처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그만큼 조직의 치부와 관련된 기록은 일단 폐기하고 보자는 기록 경시 풍조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비단 검찰이나 법원뿐만이 아니다. 96년 운동권 출신 사병을 특별 관리한다는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의 발언 관련서류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99년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묘소 쇠말뚝 훼손사건도 별도 서류는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업무이관은 곧 문서 소실=현재 없는 기록 대부분은 다른 부서로 업무가 이관되는 과정에서 소실됐다. 이는 일선 부처와 부서 사이에 기록에 대한 통합적인 관리가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하루 빨리 정착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94년 정부의 카지노 영업 허가 확대 정책은 업무가 경찰청에서 교통부로 이관됐다가 다시 문화관광부로 이관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관련 서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특히 IMF 경제위기 직후인 98년 1월 비상경제대책위원회가 발표한 기업구조조정 추진 방안도 총리실이 주재하고 금융감독위원회가 주(主)지원부서로 업무를 담당하다 재정경제부로 이관되면서 관련 서류의 행방이 묘연한 것으로 드러났다. 94년 국정홍보처가 발표한 4대 지방도시 민영방송 확정 발표 서류와 97년 케이블 TV사업자 선정 문건도 업무가 방송위원회로 이관되면서 백서만 남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외에도 대형 사건·사고서류 보존 실태는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수십명의 어린 목숨을 앗아간 99년 경기도 화성 씨랜드 화재사건은 행정자치부에서 경기도로 관장 업무가 이관되면서 관련 서류가 폐기됐고, 삼풍백화점 붕괴 관련 서류도 이미 폐기된 것으로 확인됐다.

<행정기관들 반응>

있나 없나조차 몰라 우왕좌왕

“사용처·근거자료 내놔라” 적반하장 요구도

행정정보 공개청구에 대한 국가기관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이런 기록문건을 왜 요구하는지,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에서부터 근거자료를 먼저 보고싶다는 답변까지 각양각색이었다. 특히 대상 기록이 국가적 차원의 정책에다 비교적 대형 사건·사고였음에도 불구, 기록이 어디에 보관돼 있는지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 부서 내에서도 업무가 중첩되거나 이관되면서 주무 부서가 어디인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시는 1996년 시청앞 지하광장 개발 계획과 관련해 담당 직원이 여섯차례나 전화를 걸어 “이런 사업이 검토된 적이 없는 것 같다”며 청구한 근거 자료를 보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련 문건은 시설계획과, 총무과, 신청사 이전 추진기획단 등으로 이첩됐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재정경제부와 문화관광부, 해양수산부, 환경부, 건설교통부 등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특히 해수부는 ‘21세기 해양수산발전계획’ 문건 보존 여부와 관련, 처음에는 과학기술부에 서류 일체가 보관 중이라고 답변했으나 재차 확인을 요청하자 결국 관련 문건 일부가 폐기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또 청구된 정보공개를 다른 부처로 이관하는 과정에서 누락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발생했다. 국무회의록 공개를 국무조정실에 요청했으나 담당 부처인 행정자치부로 사안을 이관하려다 누락시켜 행자부는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것이다.

국정원, 외교통상부, 통일부 등 ‘힘있는 기관들’은 약속이나 한듯 “외교관계와 대북정책 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공개할 수 없다”는 똑같은 답변을 보내왔다.

특히 국정원은 이메일이나 팩스로 공개청구가 불가능해 담당 직원을 만나 정보공개 요청서를 전달했으나 기밀사항에 해당하는 대북정보라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다. 헌법기관인 헌법재판소와 국회 등도 기록 보존 유무를 확인하려는 행정정보 공개청구에 “이런 청구를 왜 하느냐”는 의문을 표시하는 등 달갑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세계일보 특별기획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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