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감시센터 칼럼(ts) 2004-07-06   1259

<안국동窓>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한들

일전에 한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흥미로운 논지를 접할 수 있었다. 지금 한창 논란이 되고 있는 백지신탁제도와 관련해서이다. 요지는 이렇다. 미국의 제도는 국가와 공무원이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지만 한국은 정반대라는 것이다.

이같은 환경적 차이는 제도의 유무에서도 드러나지만 규제의 구체성에 있어서 확연히 구분된다. 일례로 미국의 공직자윤리법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세하고 촘촘해 공직자들이 숨쉬기도 힘들어 보일 지경이다. 반면 우리는 굉장히 추상적이고 포괄적이서 공직자들의 재량범위가 매우 넓다. 어떤 방식이 좀 더 긍정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최근 제도 도입의 흐름을 보건대 공직불신의 경향이 커져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불신이 커져갈수록 규제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공무원들이야 그만큼 불만의 소리도 높겠지만 어쩌겠는가, 자업자득인 것을.

‘신뢰적자’는 구체적인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어제 정동채 장관의 인사청탁 의혹에 대해 청와대가 조사결과를 발표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의혹이 남는다고 얘기한다. 정 장관이 개입한 증거가 없다는 조사결과를 내놓았지만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랴. 실체적 진실이야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고, 더 이상 조사할 방법도 없어 보이니 입다물 수밖에. 결코 수용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정 장관이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고 해서 정부에 대한 실망마저 거둬지는 것은 아니다. 청탁은 사실이었고 관련 인물들은 현정부와 어떻게든 연관을 맺고 있다. 차관은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직접 패가망신을 경고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업무관련성이 있는 교수에게 인사청탁을 해놓고 이를 단순한 추천이라고 변명하는 차관은 다름아닌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사람이다. 좀 과장하면 현재 우리나라 공직자의 윤리수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불신이다.

여담으로 이 사건에 대해 마저 얘기하자. 서영석씨는 애초부터 우리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공직자도 아닌 사인이 부도덕한 짓 좀 했다고 온 국민이 나서 비난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열렬한 정치적 지지자를 권력자로 착각하거나 받들어 모시는 씁쓸한 현실이다.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말은 이쯤해서 해야한다. 대통령 혼자서 아무리 노력한들 그의 손발이 되어야할 공무원들이 그리고 행동으로 정치적 가치를 구현해야할 지지자들이 대통령의 뜻과 정반대로 간다면 나라도 대통령직 못해먹을 것 같다.

김선일씨 피랍과 관련한 감사원의 조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 사건은 국회의 국정조사도 예정되어 있다. 이미 외교부는 은폐사실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를 믿지 않았다. 섣부른 예단일지 모르지만 감사원과 국회의 국정조사 결과 역시 믿기 힘들 것 같다. 감사원이 사건 말아 먹은 게 어디 한둘인가. 국회가 국정조사 해서 정치공세 외에 그럴싸한 실체적 진실을 밝혀 낸 적이 있는가 말이다. 이 역시 근거 없는 불신은 아니다. 어쩌다 이리 됐는가. 우리 국민이 유독 의심이 많은 성향을 지녔기 때문인가. 아니면 근거 없는 의혹을 부풀려 정치적 의도를 달성하려는 언론과 야당의 공세인가. 결코 그렇게 해석하지 않길 바란다.

돌이켜보건대 정부와 공직자에 대한 이같은 불신은 매우 역사적이고 경험적이다. 권위주의 시절, 정권은 그 민주적 정당성마저 의심받았고, 민주화가 진행된 이후에도 국가기관과 그 구성원의 중립성과 독립성은 불신받아 왔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오히려 그 권력을 이용해 국민을 지배하거나, 아니면 국민보다는 조직과 공직자의 개인적, 정치적 이익에 충실해 왔기 때문이다.

최근 백지신탁 등 공직자의 이해충돌 규제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나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신설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기실 공직과 국가기관의 신뢰를 회복하자는 공감대에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이마저도 조직논리나 정치논리가 개입되면서 모양새가 일그러지고 있으니 한심할 뿐이다.

백지신탁 제도는 그 본래의 취지는 감춰지고 생색내기에 급급해 일부 고위공직자에 한정해 제한적으로 시행될 요량이고 고비처는 검찰눈치 살피느라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기구가 되고 있다. 구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새삼스럽지만 적어도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 다른 소리를 하거나, 위헌이니 하는 어려운 얘기로 – 사실 위헌 주장은 근거 없다 – 반대를 위한 반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

억울한가? 너무 억울해 할 것 없다. 원래 공직이란, 공무원이란 불신의 대상이다. 그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불신을 신뢰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국민이나 공직자 모두에게 서로 피곤하지 않은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는 것이 사실임을 믿게 해 달라. 정히 억울하거든 사업가들이 흔히 ‘남의 호주머니 돈 버는 게 어찌 쉽겠냐’고 하듯이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것 역시 사업가가 돈 버는 어려움에 뒤지지 않는다고 체념해 주기 바란다.

이재명 (참여연대 투명사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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