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칼럼(is) 2013-10-01   5449

[아시아생각] 4년전 끝난 스리랑카 내전, 상처는 ‘현재 진행중’

*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4년전 끝난 스리랑카 내전, 상처는 ‘현재진형형’

같은 상처 공유한 한국, 국제연대 적극 동참해야

강은주 천주교인권위원회 상임활동가

 

 

지난 9월 초 스리랑카 캔디에서 열린 제 9회 아시아 정의평화 활동가 회의 (JPW – Jutice and Peace Workers Asia Pacific Forum) 참석 차, 스리랑카에 가게 되었다.

 

JPW 회의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나 천주교 비정부기구 등이 모여 각국의 인권상황과 교회의 활동을 공유하고 대책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이다.

 

이번 회의가 열린 스리랑카에 대해서 출국 전까지 검색해보면서 식상하리만큼 많이 접한 수식어가 ‘동양의 진주’였다. 그리고는 뭔가 마력이 있는지, 다녀 온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스리랑카와 사랑에 빠진 듯 보였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대열에 끼게 되었다.

 

하나 더 안고 온 것이 있다면, 흔히 여행지역으로는 기피하는 북부지역과 – 북부는 26년 간 지속된 내전의 중심지였다 –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아름다운 스리랑카 안에 여전히 진행 중인 내전의 상처를 알게 된 것이었다.

 

라야프 조지프 주교와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들

▲ 라야프 조지프 주교와 스리랑카의 인권 상황, 한국 제주해군기지 건설의 문제점 등을 함께 나누고 연대의 뜻을 전했다. ⓒ 강은주 활동가

 

지금도 분쟁지역으로 분류되는 스리랑카

출국 전 여행자 보험을 들려고 찾아간 보험사 창구에서 스리랑카는 분쟁지역으로 분류되어 여행자 보험 가입이 안 된다고 했다. 이미 4년 전 2009년에 내전은 끝났다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이 곧 스리랑카와의 먼 거리, 차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전의 상처와 갈등이 계속되어서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한국 모 항공사의 스리랑카 직항 항로는 생겼지만 항공사 광고의 이미지만큼이나 아직은 그저 미지의 아득한 아름다움 말고는 아는 게 적었다.

 

두 민족 사이 깊은 갈등의 뿌리에는 영국 제국주의의 어두운 유산이 자리잡고 있다. 내전과 관련된 스리랑카 상황은 알수록 너무나 복잡했다. 민족문제와 종교문제가 비극의 씨실과 날실이 되어 엉켜있었다.

 

스리랑카 내전은 1983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지난 2009년까지 무려 26년 간 일어났던 전쟁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긴 내전이라고 한다.

 

스리랑카의 내전은 다수 민족인 싱할리(Sinhalese)족과, 스리랑카 북부에 주로 살면서 분리독립을 요구했던 소수의 타밀(Tamils)족 간의 갈등이다. 기나긴 내전은 지난 2009년 타밀족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내전의 원인은 복잡하다. 대부분의 싱할리족의 종교인 불교와, 타밀족의 힌두교, 이슬람교 간의 갈등도 거기에 더해져서 불교가 타밀족에 대한 탄압을 지원하거나 묵인하고 또 반대로 힌두교, 이슬람교가 싱할리족을 적대시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하면서, 민족 간의 갈등과 그에 따른 종교 간 갈등이 동시에 일어났다.

 

내전 이전의 상황으로 거슬러가자면 싱할리족과 타밀족이 사이가 좋았던 때도 있었다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는 두 민족이 함께 영국의 식민정책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이 두 민족을 이간질하는 정책을 쓰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고, 다수인 싱할리족의 우월감과 소수 타밀족의 열세로 갈등은 깊어지게 되었다.

 

스리랑카 지뢰 매설 경고표지와 타밀반군의 은신처

▲ 스리랑카 내전의 상흔을 보여주는 지뢰 매설 경고표지와 타밀반군의 은신처. ⓒ 강은주 활동가

 

종족 갈등 부추긴 제국주의의 어두운 유산

1983년 7월, 타밀족 무장 반군 ‘엘람 해방 타밀 호랑이(LTTE: 타밀 타이거즈)’가 스리랑카 정부군을 공격하면서 내전이 본격화 되었고, 한때는 타밀족이 북부지역에 분리 독립을 거의 이루기 직전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타밀 타이거즈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상하고 어린 아이들까지 전투에 투입시키는 등 명분과 동조를 잃어가며 세력이 약화됐다.

 

JPW 회의 기간 중 9월 5일에는 회의 참가자 모두 북부 마나르 지방으로 가서 내전으로 인한 실종자 가족, 수용자 가족을 만나거나 폐허가 된 지역을 방문했다. 킬리노치와 더불어 마지막 전쟁터였던 북부의 물라티브의 한 가정은 내전 때 폐허가 된 집 바로 옆에서 작은 오두막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팔에 총상이 있었고 22살인 아들은 내전 중에 타밀 타이거즈에 납치되었다가 탈출해서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

 

내전의 잔혹함에서 스리랑카 정부군도 결코 타밀 타이거즈에 못지않았다. 내전 막바지였던 2009년 1월부터 종전이 선언된 2009년 5월 19일까지, 4개월 동안 정부군이 타밀족 반군 지역인 북부지역에 총공격을 시작하며 약 4만여 명이 죽게 되었다.

 

스리랑카 정부의 경고에 의해 국제구호단체와 UN마저 떠난 후 목격자도 중재자도 없는 그 곳에서 정부군은 적십자 병원들마저 폭격하고 투항자들이나 식량 배급 줄까지 폭격하는 등 제네바 협정에 명시된 전시 규율들을 두루 유린하며 학살을 자행했다.

 

 

전범 행위 부정하는 한 끝나지 않은 내전

이 시기에 정부군에게 끌려간 14만 6000여 명의 실종자들의 행방에 대해서 스리랑카 정부는 지금까지도 전쟁범죄를 부인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실종자들 중 이미 죽은 이들도 있겠지만 어딘가에 수용되어 있는 이들도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26년의 내전 기간에 정부군과 반군으로 인해 사망한 약 10만 명 중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언제 어디서, 서로 어떤 대의명분을 내세워 싸우건 간에 그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평생을 슬픔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그걸로 이미 명분은 없어지는 게 아닐까.

 

제국주의에 휘둘려 시작된 갈등의 근원에 대한 분노나, 내전을 좀 더 일찍 끝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들은 접어두고 우선은 내전 이후 현재의 인권상황을 짚어보는 게 먼저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녹록치 않다. 스리랑카 정부는 실종자 문제에 대한 해결은커녕 언급하려 하지 않고, 사망자ㆍ실종자ㆍ수용자 가족을 포함한 타밀족을 계속해서 배척하고 있다.

 

또 타밀족 반군의 근거지였던 북부지역을 내전 이후 군사지역화 하고 있다. 우리 일행도 북부 마나르 지방에 들어서면서부터 검문소를 거치게 되었다. 마나르보다 더 북쪽인 물라티브 지역으로 가면서는 더 많은 검문소를 지나야 했다.

 

많은 검문소를 좀 더 수월하게 지나기 위해서 우리 일행 중 신부님들은 미사가 없는데도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긴 수단을 입고 갔다. 신부님들의 수단 덕분인지 수월하게 지나 다녔는데 평소에는 검문이 까다롭다고 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이 검문소들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실종되는 사건들이 아직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스리랑카는 여전히 실종과 고문의 악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북부지역에서는 눈에 띄게 많은 검문소와 군부대들이 있었고 아직 해체하지 못한 지뢰 매설 지역들도 있었다. 북부의 군 밀집도는 민간인 5명 당 군인 1명의 비율이라고 한다.

 

스리랑카 군 전체 규모의 4분의 3이 북부에 밀집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는 군부의 허가 없이 4명 이상의 모임이 아직도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 북부는 이전에 반군의 근거지였다 보니 반군의 훈련 장소들과 은신처들도 많았는데, 그 곳들을 이제는 마치 관광지처럼 둘러보도록 만들어놓았다.

 

스리랑카 정부는 반군진압과 내전종결을 정부 선전용으로 많이 쓰고 있었다. 지난 9월 21일에 있었던 지방선거에 있어서도 여당에서는 반군진압을 성과로 내세워 홍보했다.

 

검문소를 거쳐야만 갈 수 있는 마을들이 있고, 전쟁의 상처가 관광이나 홍보용으로 쓰이는 모습이 묘한 느낌을 주면서도 한편 한국과 겹쳐지기도 했다.

 

외국인 여행자들이 한국에서 가보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인 비무장지대, 민간인접근금지구역 안의 마을들과 지뢰 매설 지역들, 또 전쟁의 상처나 분단 상황을 정치에 이용하기도 하는 것들이 떠오르면서 전쟁의 상처가 진행중이라는 점은 닮아 보이기도 했다.

 

스리랑카 정부 측 인사들은 내전 중에 고문, 성범죄, 무차별 학살 등의 전쟁범죄가 없었다고 거짓말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 학살전쟁의 꼭대기에서 사령관 노릇을 했던 국방부 장관 고타바야 라자팍사이다.

 

그는 “민간인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며 언제나 목청 높여 거대한 거짓을 말한다. 이 거짓을 바로 잡고 수많았던 전쟁범죄를 인정, 사죄하고 실종자 행방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해결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계속 진행 중인 것이다. 전쟁범죄도 내전의 고통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 8월 27일 자정 무렵에 내전으로 폐허가 된 트린코말리의 한 마을에 몇몇 군인들이 찾아왔다. 군인들은 유엔 인권최고대표인 나비 필라이가 스리랑카에 와서 만나고 갔던 실종자 가족들과 그들과 함께 하는 활동가들, 천주교 신부를 만나서 나비 필라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냐고 물었다. 필라이는 스리랑카 정부의 초청을 받고 왔는데도 말이다.

 

내전으로 실종된 가족들을 찾고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힘든 실종자 가족들에게 스리랑카 군부는 고통을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스리랑카 정부 측 사람들은 내전 사망자의 유족, 실종자ㆍ 구속자 가족과 그들을 위해 활동하는 활동가들을 ‘테러리스트 조력자ㆍ후원자 (terrorist supporter)’로 부른다. 내전으로 인한 갈등과 상처가 여전하다는 것을 스리랑카 정부가 보여주고 있었다.

 

필라이는 스리랑카 북부지역의 군사화, 소수 종교 탄압, 정치범 수용 등에 우려를 표했다. 그리고 내전 희생자 및 그의 가족에 대해서 제대로 대우하고, 정의와 진실, 평화를 존중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화해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타밀족 정치범이었던 니말라루반은 2012년에 감옥 안에서 고문 받고 죽었다. 내전은 2009년에 종결되었다지만 2012년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는 고문 받고 죽어가고 있으니 전쟁과도 같은 폭력은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내전이 끝난 뒤 4년이나 지난 후에도 스리랑카 보안부대가 타밀족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자백을 끌어내기 위해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또한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납치ㆍ살해되었던 것에 대해 국제인권단체들이 보고서 발표 등을 통해 스리랑카 정부를 비판해왔다.

 

국제사회와 다른 여러 나라의 시민들도 스리랑카의 평화를 염원하고 주시해왔다. 그러나 내전 기간에 스리랑카 정부군을 무기와 자본 등으로 지원하고 학살전쟁을 부채질했던 중국, 인도, 러시아 대한 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과 인도는 내전 이후 스리랑카 재건사업에 있어서도 이권 다툼을 보였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도 스리랑카 문제 개입에 미온적인 태도여서, 어렵게 결성된 진상조사위 활동은 큰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학살전쟁을 이끌었던 마힌다 라자팍사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느라 만든 스리랑카 국내의 ‘교훈과 화해 위원회’에 진상조사를 맡겨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국제사회는 독립적으로 전범조사를 면밀히 해나가고 전범재판을 결의해야 한다.

 

종교지도자들도 분열시킨 내전

스리랑카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갈등해결을 위해 오랜 시간 힘들게 애써온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한편으로는 그에 반하는 이들도 교회 안에 함께 있었다. (스리랑카 국민 중 가톨릭 신자는 120만 명 정도이고 비율로는 낮은 편이다. 국민의 70%가 불교, 힌두교가 12%, 이슬람교가 10%, 가톨릭이 6%이다.)

 

가톨릭은 스리랑카 안에서 소수종교에 속하지만, 전쟁피해자의 편에 서서 구호활동을 해오고, 갈등해결을 위해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스리랑카 가톨릭 교회의 모든 이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도 싱할리족과 타밀족 간의 갈등이 있어왔다.

 

유엔인권최고대표 필라이의 방문 때에도 수도 콜롬보에서 필라이와 면담이 약속된 실종자 가족들과 타밀 신부들이 북부에서 콜롬보로 이동하는 중에 경찰에 제지당하며 고생을 겪을 때 싱할리 신부들은 외면했다.

 

심지어 바티칼로아 교구의 한 싱할리 주교는 필라이의 방문을 의식하여 마힌다 라자팍사 스리랑카 대통령과 군부를 칭송하기까지 했다. 가톨릭 신자이자 인권 활동가인 한 친구는 스리랑카 가톨릭 교회 안의 이러한 분열이 이제는 놀랄 일도 아니라고 했다.

 

필라이의 방문이 스리랑카의 인권상황을 보여주고 알리는 계기였던 동시에 스리랑카의 가톨릭 교회 내의 분열을 다시 한 번 보여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물론 전쟁피해자의 편에서 함께 하는 싱할리 사제들도 있지만, 하나 된 교회를 지향하는 가톨릭교회 안에서조차 분열을 보일만큼 민족 간 갈등은 깊었다.

 

스리랑카의 눈물, 국제연대의 소중함 일깨워

진정한 종교인의 길을 묻던 소설 <천국의 열쇠>가 떠오른다.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을 들어가며 전쟁고아, 미망인, 탈출한 소년병들의 편에 서서 신변의 위협까지 감수하며 싸워 온 주교. 그리고 수많은 전쟁피해자들과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의 가족을 잊고 돌아서서 앞서 가는 것에 가치를 둔 추기경. 문득, 진정한 종교인의 길을 묻던 A.J. 크로닌의 소설이다.

 

스리랑카의 내전 중에도 전쟁피해자를 지원하고 그들과 함께 해온 성직자들 중에서도 정부군에 의해 납치되어 실종되거나 고문, 살해된 사제들이 십여 명이 넘는다.

 

이렇게 사라진 사제들을 비롯한 많은 실종자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고, 전쟁피해자들의 편에 서서 애써온 대표적인 인물이 북부 마나르 교구의 라야프 조지프 주교이다.

 

조지프 주교는 내전 종결 이후에도 스리랑카 정부기관인 ‘교훈과 화해 위원회’에 실종자문제 해결을 촉구했지만, 독립성이 결여된 정부소속의 진상조사위원회에서 해결의지를 보이지 않자 그와 뜻을 함께 하는 사제들과 2012년 3월 유엔인권이사회에 서한을 제출했고 그 결과로 스리랑카의 인권상황 개선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유엔에서 통과되었다.

 

그 후 정부와 정부를 지원해온 불교계 정당, 스리랑카 가톨릭 교회 내의 싱할리 사제들을 비롯한 보수파들은 국제사회에서 스리랑카를 욕보였다면서 조지프 주교와 성직자들을 ‘반역자, ‘테러리스트’로 낙인찍었다.

 

그 비난의 대열에는 스리랑카의 앨버트 말콤 란짓 추기경도 있었다. 심지어 란짓 추기경은 민족 간 중재에 나서며 갈등해결을 위해 조지프 주교와 함께 애쓰기도 했던 추기경이었는데, 전후 인권상황 대응에 있어서는 다른 행보를 보였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었던 지난 콘클라베에서 아시아의 유일한 교황 후보로 꼽히며 스리랑카 교회와 국민들의 기대와 사랑을 받은 인물이다.

 

스리랑카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광 못지 않게, 계속 되는 내전의 아픔 속에서 삶을 다시 살아내는 이들도 ‘동양의 진주’가 아닐까.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며 불안한 신변이나 망명과 같은 생활도 무릅쓰는 진짜배기 활동가들, 명예와 안위를 잊고 약자들의 손을 잡고 있는 종교인들. 그들이 세상의 눈물로 ‘진주’를 만들고 있었다.

 

직접 만나고 오기 전까진, 국제연대는 조금은 한가한 소리라고 생각했다. 국내의 인권상황도 전부 챙기지 못하는데 바다 건너 일까지야… 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국제연대는 분산이 아니라 총합이 커지는 것에 의의가 있다는 생각이 새로 들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 반대활동을 하면서 국제연대에서 받았던 힘을 기억한다. 바다 건너 먼 곳에서 인권이 무시되는 것을 눈감는다면 여기 나한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진흙 속의 진주 같은 이들이 사라지거나 다치지 않도록 지켜봐야 함을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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