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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소비산업과 해외근로자 송출

 

김동엽 (부산외대 동남아지역원, 국제연대위원회 실행위원)

 

필자가 필리핀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94년이다. 그 후 필리핀에 장기간 체재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으면 거의 매년 필리핀을 방문하고 있다. 지난 17년 동안 필리핀에서 가장 많이 변화된 모습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면, 수적으로는 물론 더욱 거대하고 화려해진 마닐라의 쇼핑몰과 콘도미니엄이 떠오른다. 필리핀 방문객들이 일정을 마무리할 무렵 한번쯤을 들리는 마닐라의 쇼핑몰은 그 규모에서 뿐만 아니라 엄청난 고객 수에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필리핀 마가티 쇼핑몰, 그린벨트

필리핀을 저개발국이며 가난한 국민들이 살고 있는 국가라는 선입견에 의구심을 품게 되기도 한다. 필리핀 경제상황에 대해 조금 공부를 하고 온 사람이라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돈이 나서 이렇게 화려한 소비문화를 즐길 수 있을까하는 호기심이 발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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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산업별 인구통계에 따르면 생산성이 낮은 농업분야와 비전문 서비스분야에 대부분의 노동력이 집중되어 있다. 고소득 산업분야의 노동력은 생산규모와 비례해서도 낮은 고용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필리핀 통계청이 발표한 공식 실업률은 약 7.1%이고, 저고용율(underemployment)은 약 19.1%에 이른다(2011년 7월 현재). 한 여론조사기관(Social Weather Station)이 지난 5월 조사해서 발표한 전국 성인 실업률은 27.2%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초라한 필리핀 국내 경제상황이 그처럼 화려하고 활발한 소비산업을 지탱해 줄 수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다. 물론 여기저기에서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의 모습이 보이긴 하지만, 이들의 소비 패턴과 규모가 필리핀 소비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결국 대부분 필리핀 국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일 것인데, 그 수입원은 어디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잠시 쇼핑몰을 돌아다니다 보면 각국 통화의 환율을 표시해 놓은 환전소가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필리핀 사람들을 보노라면, 한국에서 낮선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힘든 일을 하고, 월급을 아껴 송금하는 외국인근로자들이 떠오른다.

 

필리핀은 해외로 약 900만 명의 근로자를 송출하고 있으며, 2010년 11월 조사에 따르면 필리핀 전체 가구의 13.6%가 해외근로자 가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필리핀 해외근로자들이 국내로 보내는 송금액은 2010년 집계된 액수만 약187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세계에서 멕시코와 인도 다음으로 세 번째이며, 그 규모는 필리핀 국내총생산의 약 10%에 해당한다. 필리핀 해외근로자라 하면 흔히 가정부나 비숙련 노동자 혹은 가수와 같은 예능인들을 떠올리며, 외국에서 차별받는 그들의 삶에 대해 연민이 생겨난다. 그러나 이처럼 필리핀 해외근로자를 가난하고 불쌍한 이미지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편견일 수 있다. 필리핀 해외근로자의 약 28%는 전문직 고소득자들이며, 30%에 해당하는 건설분야 인력들도 대부분 기술직에 종사하고 있다. 필리핀 해외근로자들의 교육수준은 약 60%가 대학교육을 받았고, 약 30% 정도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나타난다. 필리핀 해외근로자의 약 28%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가정부의 경우에도 고학력에다 필리핀 사회경제 구조상 중상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해외직장에서 받는 금여수준은 필리핀내 일반 직장에서 얻는 소득보다 훨씬 높다. 필리핀에서 중하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해외에 직업을 찾아 진출할 기회를 갖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필리핀 해외근로자들은 본국에 두고 온 자녀들에 대한 애틋하고 미안한 마음을 주로 물질적인 보상으로 대신하는 경향이 있다. 중동에 진출한 한 필리핀 해외근로자는 현지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로 가족들을 위해 과도하게 지출함으로써 그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처벌받을 처지에 있다는 소식이 필리핀 신문에 보도된바 있고, 이와 유사한 경우가 많이 있다고 전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더라도 필리핀 해외근로자들은 본국의 가족들에게 국내에서는 벌기 쉽지 않을 정도의 돈을 송금함으로써 필리핀 소비산업의 활성화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지향적인 개인 성향과 함께 필리핀 국가와 기업들도 소비산업의 진작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한다. 특히 지난 아로요 정권하에서는 인위적으로 공휴일을 조정하여 여행이나 소비를 촉진시킬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2011년 포브스지(Forbes Global)가 선정한 세계 2,000대 기업들 중 필리핀 기업이 4개 포함되었다. 이들 회사들은 필리핀의 대표적인 주류회사이면서 각종 음료와 식품을 생산 유통하는 산미겔(San Miguel), 통신서비스회사인 필리핀장거리통신(PLDT), 필리핀의 대표적인 쇼핑몰 기업인 슈마트(SM), 그리고 전력서비스회사인 마닐라전기(Meralco) 등이다. 이들 모두 필리핀의 소비산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대표적인 회사들이며, 필리핀 해외근로자들이 벌어들인 돈의 소비를 유인하는 회사들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해외근로자는 필리핀의 큰 자산이다. 이는 그들의 외화송금액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변화의 잠재력 때문이다. 필리핀 사회는 “변화 없는 역동성”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활발한 시민사회 운동 등 역동적인 측면이 있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기본적인 사회구조에는 변화가 없다. 특히 엘리트와 민중 간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다. 주어진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개척해 가는 해외근로자들은 필리핀 사회의 진취적 중산층을 대변한다. 아키노 대통령은 필리핀 해외근로자 송출과 관련된 사회적 비용을 인정하고, 지금처럼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선택에 의해서 해외로 진출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양질의 국내 일자리 창출을 강조한 바 있다. 최근 필리핀 정부는 귀국하는 해외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창업과 관련된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가족을 떠나 해외에서 외롭고 힘들게 벌어 송금한 돈들이 단순히 화려한 소비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생산적인 분야에 투자되어 필리핀 사회와 경제의 발전에 밑거름이 되길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서남포럼 뉴스레터(2011.9.25)에 소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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