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대위원회 칼럼(is) 2014-01-28   4433

[아시아생각] 말레이시아, 국가보안법 폐지는 눈속임?

*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말레이시아, 국가보안법 폐지는 눈속임?

장기독재, 의회는 유명무실

김형종 창원대학교 국제관계학과 조교수

 

나집 말레이시아 총리는 2011년 9월 악명 높던 국가보안법(ISA)의 폐지를 선언했다. 말레이시아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의 개선을 기대할 수 있는 상징적 전환점이 되기에는 여전히 걸림돌이 많다. 그 중심에는 정권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방위하려는 집권세력의 저항이 있다.

 

말레이시아 국가보안법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체포영장과 재판 절차 없이 내무장관의 승인으로 피의자를 2년 동안 구금할 수 있었다. 구금 기간은 역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연장될 수 있었다. 초법적 조치가 가능한 국가보안법의 시초는 1948년 말라야공산당 토벌을 구실로 영국 식민정부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도입한 ‘예방적 구금’이다. 말레이시아 독립 후 비상사태가 종료되었으나 ‘예방적 구금’조치는 말레이시아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당시에도 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을 의식한 총리는 보안법이 공산당 활동가의 체포에만 사용될 것이며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에 쓰이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바 있다. 그러나 이후 노조활동가, 학생운동가, 야당 정치인, 종교단체 관계자, 학자, 시민단체 활동가 등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의 피해자가 되었다. 그간 국가보안법에 의한 구속자 수는 1만 명을 넘었고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12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됐다.  2005년 이후에만 4000명 이상이 구속되었다.

 

이름만 바꾼 사실상의 국가보안법, ‘범죄예방법’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에 대처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국가보안법의 집행은 정권안보가 위협받는 시점에서 광범위한 구속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사례는 1987년 대규모 구속 사태를 불러 온 이른바 ‘오퍼라시 라랑'(제거 작전) 사건이다. 중국계 초등학교 교장에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다수가 임명되자 중국계를 중심으로 항의 집회가 열렸다. 이에 몇 배에 달하는 규모의 말레이계의 대응 시위로 이어졌고 정부는 종족 간 갈등으로 확대될 수 있다며  중국계 인사들의 활동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이는 말레이시아 정치사에 ‘검은 10월’로 불리게 되는 106명 구속 사건을 낳았다. 국회의원을 비롯해 야당 정치인, 교육계 인사, 시민단체 활동가 등이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당시 마하티르가 이끄는 집권세력의 사정은 여러 가지 정권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1986년 총선에서 득표율에 있어 중국계 야당의 득표율이 상대적으로 약진했다. 무엇보다 1987년 치러진 여당 암노(UMNO) 전당대회에서 마하티르는 가까스로 당 총재에 재선 되었으나 부정선거 시비에 휘말린 상황이었다(결국 1988년 당내 부정 경선을 이유로 위법 판결이 나자 마하티르는 당명만 바뀐 ‘신암노'(UMNO Baru)를 창당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998년 마하티르와 안와르 간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안와르를 구속시켰던 것도 바로 국가보안법이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 인도계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던 인도계 운동 조직 힌드라프(HINDRAF)지도부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적용하여 구속한 바 있다.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나집 총리의 말대로 민주주의 성숙과 시민의 자유와 종족 간 조화를 위한 정권차원의 자발적 선언의 결과가 아니다. 그간 수많은 직간접적인 피해자를 양산했고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벌여왔다. 응집된 여론은  2009년 8월1일 쿠알라룸프르 일대에서 진행된 보안법 반대 집회에 약 2만 명이 참가하면서 표출된 바 있다. 그러나 정부의 국가보안법 폐지가 이들 폐지 요구에 굴복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나집 총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더 이상 정치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정치 쓰나미로 불린 2008년 총선에서의 야당의 약진은 정권교체 가능성을 제기했고 이러한 추세는 집권세력이 차기 총선에서의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을 불러왔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정치적 부담을 덜고 기능적으로 다른 대체 법안으로 해결하려는 계산의 결과인 듯하다. 즉, 국가보안법의 폐지라기보다는 대체이다. 폐지 발표 당시 국가보안법을 안보위반 특별조치법(Security Offences Act)으로 대체할 계획이 포함됐다. 

 

2013년 5월 총선에서 정권교체의 위기를 넘긴 정부는 2013년 9월 23일 범죄예방법(PCA) 개정안을 상정하여 10월 2일 의회에서 이를 통과시켰다. 범죄예방법은 종전 국가보안법의 독소 조항을 고스란히 부활시켰다. 보안법체제에서 내무장관이 구금을 명령했다면 범죄예방위원회 위원회 3인의 결정에 의해 2년간 구금이 가능하게 되었다. 구금은 공공질서와 치안, 범죄예방을 이유로 2년간 연장될 수 있다. 구금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는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위원회의 자체 재량권에 기반한 결정과 행위에 대해서는 사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피의자와 증인은 위원회의 조사에 앞서 변호인 또는 법정대리인이 허용되지 않아 피의자는 홀로 조사를 받게 된다. 변호인 선임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인권보호에 있어 치명적 결함을 의미한다. 아울러 위원회, 조사원 또는 공무원은 공공의 이익 또는 증인, 가족, 관계자의 안전을 위해 특정 정보를 공개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이는 특정 정보가 거짓 또는 조작되었더라고 이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논의가 생략된 채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예방적 조치’를 정당화하는 범죄예방법은 공공의 이익과 질서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정부여당의 정권강화와 안위를 위한 사용될 가능성이 높고 이를 견제할 장치는 여전히 마련되지 않았다. 나아가 집권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1987년 당시 암노 청년위원장으로 반 중국계 대규모 시위를 주도한 바 있는 현 총리 나집은 집권 이후 고조되는 정권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2013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말레이시아 대표적 인권단체인 수아람 (Suaram)에 대한 탄압은 정부 비판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2012년 9월 8일, 말레이시아 정부는 수아람의 법적 단체인 Suara Inisiatif Sdn Bhd가 회사법을 위반 사항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수아람의 재정지원에 대한 차단을 기도하기도 했다. 수아람 등과 같은 정부 비판 세력에 대한 탄압은 역대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강화되곤 했었다. 수아람 활동가에 의하면 활동가들에 대한 경찰의 위협도 일상화되었다. 

 

헌법도 무력화하는 악법들

 

1969년 종족 간 유혈사태를 계기로 종족 간 갈등의 문제는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중대 사안으로 보안법 등의 단골 메뉴였다. 그러나 여당은 종족 간 민감 사안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여 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마하티르는 종족 간 이해관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함으로써 시의 적절하게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최근 이슈화 되는 비무슬림의 ‘알라’ 용어 사용문제 또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한다. 현재 논쟁의 시발점인 2007년에 사라왁 주의 가톨릭 매거진에서 신을 지칭하는 의미로 ‘알라’를 언급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는 매거진이 야당 지도자인 안와르에 대한 사설을 작성한 시기여서 야당 견제를 목적으로 한 정치적 조치라는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사바, 사라왁의 원주민들은 반도 말레이시아와 더불어 현재의 말레이시아를 구성하기 이전부터 자신들의 종교의례에서 ‘신’을 ‘알라’로 언급해왔다.

 

비무슬림 토착민들에게 ‘알라’를 언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 원칙에 위배 된다는 것이 중론을 형성했다. 사바, 사라왁의 정치적 비중이 증가하고  ‘킹메이커’역할이 강조되자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사바, 사라왁에서는 비무슬림의 ‘알라’ 언급 금지 조치가 해당되지 않음을 밝혔다. 그러나 총선 이후 다시 조직되는 보수적 말레이계의 ‘알라’언급의 전면적 금지를 요구하는 시위는 무슬림인 말레이계의 지지를 의식한 정부 당국에 의해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형국이다. 무슬림을 포함 다수가 이를 포용하는 현실에 반해 또 다시 ‘종족간 민감사안’으로 정치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예방적 조치를 남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말레이시아 정치제제의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입헌군주제하의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9개 주의 술탄 중에 선출된다. 5년을 임기로 사실상 순환제에 의해 운영되며 정치적 기능은 매우 제한적이다. 독립 이후 아직 단 한 번의 정권교체도 허용하지 않은 여당은 막강한 행정부 권한을 키워왔고 상대적으로 의회의 견제 기능은 제약되었다. 이는 입법예고기간이 매우 짧아 충분한 논의가 불가능한 상황을 낳았다. 따라서 인권 침해 가능성이 높은 법안들의 경우에도 졸속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사례로는 범죄예방법과 더불어 DNA정보 수집을 위한 DNA법과 사실상의 집회의 자유를 제약하는 평화적 집회법의 제정 등을 들 수 있다. 국가보안법(ISA)이 역사적으로 특정 상황에서 도입된 악법이 국가안보로 위장한 정권안보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후 그 악법적 속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이름만 바뀌었다. 정치적 정통성이 없는 정권에게 악법적 권한을 부여할 때 인권은 더욱 위태롭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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